[칼바위] 태조 이성계가 등극한 후 자신을 노리는 사람이 지리산 중턱 큰 바위 밑에서 은신 중이라는 소문을 듣고 한 장수에게 그를 찾아 목을 베어 오라고 명령했다. 명령을 받은 장수가 지리산을 헤매다 이곳에서 2Km 떨어진 곳에 이르러 큰 바위 밑에서 공부하는 사람을 발견하곤 칼로 치니 바위는 갈라져 홈바위가 되고 칼날은 부러지며 이곳까지 날아와 꽂히면서 하늘을 찌를 듯한 형상의 바위로 변하였다고 하여 칼바위라 부른다는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망바위] 1068m. 마치 경계병처럼 망을 보고 있는 듯한 모습 때문에 이름이 지어졌다 한다. 조망이 그만큼 좋다는 의미라고도
한다. 망바위에 오르면 영신봉에서 시작된 낙남정맥 산줄기가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법계사] 1450m.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본사인 쌍계사의 말사이다. 지리산 천왕봉 동쪽 중턱, 해발 1400m에 있는 남한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절이다. 서기 544년(신라 진흥왕 5년) 인도에서 건너온 연기조사가 부처님 진신사리를 봉안하면서 창건했고, 1405년 정심선사(正心禪師)가 중창하였다. 그 뒤부터 수도처로 알려져 고승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6.25전쟁 때 불에 탔지만 워낙 높은 곳에 있어 재건을 못하고 토굴로 명맥을 이어오다 최근에야 법당이 세워졌다. 고려시대에 만든 것으로 보이는 법계사 삼층석탑(보물 제473호)이 법당 왼쪽에 거대한 암석을 기단으로 세워져 있다. 지리산 7대 사찰로 꼽히며 사찰 뒤로 암봉과 문창대가 보인다.
법계사는 전란 때마다 수난을 겪었다. 그 첫 번째가 고려 무왕 6년 9월에 남원의 황산벌에서 이성계에게 크게 패한 왜구들이 황급히 도망가면서 지리산으로 들어가 불태운 것(법계사가 흥하면 일본의 기운이 쇠퇴한다는 전설 때문에 고려말 왜적 아지발도에 의해 소실), 두 번째가 조선시대 재건돼 많은 불자들의 기도처로 이용되던 중 1908년 지리산이 항일의병의 근거지로 활용되면서 박동의의 의병부대가 덕산에서 패한 뒤 법계사로 후퇴, 계속 항일전을 벌일 당시 일본군의 방화로 화마에 휩싸였다. 세 번째는 1948년 여수반란 사건을 겪으면서 지리산이 반란군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자 토벌군이 대원사와 함께 불태워 버린 것이라 한다.
[개천문(개선문)]
천왕봉 서쪽의 통천문과 함께 천왕봉을 오르는 관문으로 여겨진다. 통천문처럼 신비스럽고 위용을 갖춘 모습은 아니지만, 마치 개선하는 기분이 든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과거에는 왼쪽은 물론 오른쪽에도 비슷한 높이의 바위기둥이 서 있었지만, 지금은 오른쪽의 기둥은 붕괴되어 없어지고 왼쪽에만 높이 10m의 문설주가 있다. 통천문이 '하늘을 오르는 문'이라는 의미라는 점을 보면, 개선문보다는 개천문이 '하늘을 여는 문'이라는 의미에서 타당해 보임.
[천왕샘] 1800m. 남강댐의 발원지. 여기에서 솟구친 물은 덕천강을 따라 흘러, 남덕유산 참샘을 발원지로 하는 경호강과 남강댐에서 합류하여 남강을 이루어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6m 정도의 바위 밑에서 방울방울 흘러모인 샘물로, 1977년 덕산 두류산악회에서 석공을 동원해 물이 고일 수 있도록 홈을 파놓았지만 가물 때는 쉽게 말라버리기 일쑤다. 깍쟁이처럼 바위에 졸졸 흐르는 정도의 양이지만, 남강의 첫 물. 강이 되고 바다가 될 그 시초다.
[천왕봉] 1915m. 남한 내륙의 최고봉. 3대가 덕을 쌓아야 천왕일출을 볼 수 있다는 속설과 더불어, 반드시 관문을 거쳐 들어오도록 하고 있다. 동쪽으로 개천문(일명 개선문), 남서쪽으로는 통천문을 두어 이들 관문을 경건한 마음으로 거쳐 들어오게 하고 있다. 거대한 암괴(岩塊)가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으니, 서쪽 암벽에는 하늘을 받치는 기둥이라는 의미의 '천주'라는 음각 글자가 새겨져 있다.
천왕봉에 지금의 '한국인의 기상 여기서 시작되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기 전에는 '경남인의 기상'이 있었고, 그전에는 남명의 '하늘이 울어도 산은 울리지 않는다'는 뜻의 '만고천왕봉 천명유불명(萬古天王峰 天鳴猶不鳴)'이란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서산대사는 금강산, 구월산, 묘향산과 더불어 지리산을 평하면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장엄한 산이라 했다.
-천왕봉의 성모상
아득한 옛날부터 지리산 신령을 봉안 했던 성모사가 자리해 있었으나 속인들의 끊임없는 욕심으로 자취를 감추고 빈 자리만 덩그렇게 남아 있다. 성모상은 훼손된 채 사라졌다가 다행히 한 스님에 의해 찾아진 후 중산리 천왕사에 모셔져 있으나 제자리로 돌아오기란 쉽지 않은 모양이다. 천왕봉의 성모사는 1489년 이곳을 오른 김일손의 <속두류록>에 의하면 "천왕봉 정상에 한 칸 정도의 돌담벽이 있고 담 안의 너와집에 성상이 안치돼 있었다"고 전한다. 이 사당은 빨치산에 의해 허물어진 뒤 오늘날까지 노천암대만 남아 처량하게 수십 여 성상을 보내고 있는 처지에 놓여있다.
[제석봉] 천왕봉 서쪽에 있다. 오르는 길은 가파르지만 정상 부근은 느슨하고 봉긋한 형태다. 과거에는 고사목이 즐비하여 별난 경치를 자랑했지만 이제는 세월이 흘러 그 수도 많이 줄었다. '제왕이 자리했다'는 의미지만 천왕봉이 바로 지척에 있으므로 어울리는 이름 같지는 않다.
[장터목]
천왕봉의 자매봉인 제석봉의 남쪽능선 고개 마루를 장터목이라 부른다. 장터목은 옛날에 천왕봉 남쪽 기슭의 시천 주민과 북쪽 기슭의 마천 주민들이 매년 봄가을 이곳에 모여서 장(場)을 세우고 서로의 생산품을 물물교환한 데서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연하봉] 장터목의 남서쪽 봉우리로 천왕봉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건너다볼 수 있는 위치다. 정상은 암장으로 형성되어 있다. '지리산8경'인 '연하봉 선경'이 이곳에서 연출된다. '연기(煙연기연)가 노니는(霞놀하) 선경'이니 매우 아름답다는 뜻이다. 여기에서의 연기는 당연히 구름을 지칭하며 선경이라 함은 좁게는 바로 건너다보이는 천왕봉이고, 넓게는 천왕봉은 물론 중산리계곡과 거림계곡, 백무동계곡 그리고 겹겹이 둘러져 꿈틀대는 능선 등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
[촛대봉] 옛날에 연진이라는 여인이 남편 호야와 대성계곡에서 행복하게 살았는데 자녀가 없어 고민하던 중 흑곰에게 세석고원에 있는 신비의 샘물을 마시면 자식을 낳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남편과 상의 없이 산신령이 금기시킨 영신봉 음양수를 마셨다. 평소 흑곰과 앙숙이던 호랑이가 산신령에게 일러바쳐 산신령의 노여움을 사서 평생 남편과 생이별한 채 철쭉밭을 가꿔야하는 벌을 받았다고 한다. 연진 여인이 촛대봉 정상에 촛불을 켜고 천왕봉 산신령에게 용서를 빌다가 돌로 굳어버렸고 촛대봉 바위는 연진 여인이 굳어진 모습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평생 손끝에서 피가 배어나오도록 철쭉꽃을 가꾼 여인의 슬픔과 피가 이곳의 철쭉꽃을 처연하도록 아름답게 하는 것이라 사람들은 믿었다 한다.
[세석고원] 1074m. 오래 전에는 작은 돌밖에 없는 토양지대라 해서 '잔돌고원'이라 부르던 것을 한자 표현으로 바꾸어 세석평전이라고도 했는데 '평전(平田)'이 일본식 표기라는 의견이 있어 일반적으로 세석고원으로 불리고 있다.
사실 세석의 철쭉은 연한 빛으로 창백하기까지 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소설가와 문장가들이 자극적인 붉은빛으로 묘사한 이유는 과거 빨치산 투쟁 때 이곳에 '김일성대학'이 있었고, 또 많은 사람이 죽은 곳이라서 이들의 흘린 피와 절규가 한(恨)의 꽃으로, 즉 과거 이데올로기의 비극의 채색물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현상의 남부군 주둔지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당시 이곳에서는 남부군의 군중대회와 연극공연 등이 열렸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토벌대에 포위되어 몰살을 당했던 피비린내 나는 역사의 현장이다.
경남 산청, 거림계곡, 함양의 백무동, 하동의 청학동 등 여러 지역과 연결되는 지리산의 중심지. 세석고원(1400m~1703m)은 약 30만평에 달하는 드넓은 면적과 남향으로 15도 경사를 이루며 완만하게 펼쳐진 지형이다. 이로 인해 남녘의 개마고원으로 불릴 정도로 지리산에서 가장 특이하고 인상적인 지형을 보이는 곳이다.
이곳에 자생하는 구상나무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우리나라의 지리산, 한라산, 덕유산 등 높은 산에서만 자라는 나무로 알려져 있다. 세석고원에는 200여 종의 키 작은 나무들이 자라고 있다고 한다. 또 세석의 철쭉은 '지리산10경'의 하나로 '세석척촉'으로 유명하다.
[영신봉] 1651.9m. <산경표>에서는 낙남정맥을 '낙남정간'이라 하는데, 정맥의 시작되는 곳이 영신봉이다. 300~800m의 산들로 이어지는 낙남정맥의 북쪽으로 흐르는 물은 낙동강이 되고, 영신봉에서 옥산에 이르는 구간의 남쪽은 서쪽의 섬진강으로 물을 보낸다. 그러나 낙남정맥이 동쪽으로 방향을 정한 뒤로는 남쪽의 바닷가로 물이 흐른다. 마산의 무학산, 김해의 익산을 지나 낙동강 하구를 지키는 분산에서 끝나는 낙남정맥은 내륙과 남부 해안지방과의 경계로 작용한다.
[낙남정맥]
지리산 영신봉(靈神峰. 1,651m)에서 낙동강 남쪽을 가로지르며 김해 분성산(奮城山:360m)까지 약 299km에 이르는 산줄기. 한반도 13정맥의 하나로, 영신봉에서 동남쪽으로 옥녀산(玉女山)·천금산(千金山)·무량산(無量山)·불모산(佛母山) 등으로 이어져 분성산에 이른다.
이 산줄기의 남쪽에는 대체로 경남 남서의 해안지방, 즉 하동·사천·삼천포·고성·마산·창원·김해가 위치한다.
[청학동] 해발 800m의 지리산 중턱에 위치해 있다. 삼신봉 남쪽 자락에 그림처럼 펼쳐진 지리산 마을로 고운 최치원 선생이 은거하기도 했던 곳이다. 전설로는 청학이 많이 노닐던 곳이라는 유래를 가진 곳으로 예로부터 수많은 묵객들이 삼신봉을 중심으로 한 살기 좋은 곳, 즉 이상향을 찾아 나섰던 곳이란 느낌이 들게 하는 산세와 물줄기를 가지고 있다.
청학이란 '푸른 학'이라는 뜻으로 전설에 의하면 청학은 신선이 타고 다니면서 도술부리는 새로서 사람의 몸에 새의 부리를 하고 있다고 한다. 현재 <儒佛仙三道合一更正儒道會>라는 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유교를 근간으로 하되 '유교, 불교, 선도와 동학, 서학을 하나로 합하여 큰 도를 크게 밝혀 유도를 다시 일심으로 교화하는 도' 라는 뜻이다. 이들 대부분은 논밭에서 식량을 자급하고 양봉과 축산, 약초, 산나물 등을 캐다 팔고 하동 장에서 생필품을 구입해 쓰고 있다. 이곳 주민들은 전통적인 생활방식을 고수하며 언젠가는 그 이상의 세상이 여기에 올 것이라고 믿으며 살아가고 있다. 청학 마을의 서당에서는 청소년에게 한학과 예절 등을 가르쳐 주고 있다.
이곳엔 또다른 설화가 있다. 옛날에 나무꾼이 산에서 나무를 하는데 사슴 한 마리가 나타났다. 나무꾼이 사슴을 잡으려고 쫓아가다 어떤 굴 속으로 들어가게 됐다. 그 곳은 캄캄한 굴이 아니라 사람들이 살고 있는 별천지였다. 나무꾼이 한 사람을 붙들고 이곳이 어디냐고 묻자 그 사람이 옛날에 세상의 난을 피해 들어와 살게 됐는데 지금까지 죽지 않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대답했다. 나무꾼은 푸짐한 대접을 받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뒤 나무꾼의 말을 들은 사람들이 그 곳을 찾으려 했으나 다시는 찾을 수 없었다 한다.
[칠선봉] 1576m. 북쪽으로 백무동계곡과 남쪽으로 대성골이 관찰되는 위치다. 봉우리 자체가 암장으로 형성되어 있다. 천왕봉과 제석봉이 가까운 거리로 보이고 날씨가 좋을 때는 연하봉과의 사이에 있는 장터목산장까지 보인다. 일곱개의 바위가 오밀조밀 모여서 정상을 이룬다고 해서 칠선봉이다.
[덕평봉] 정상부가 '각지지 않고 평평한 것이 덕스러워 보인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옛날 덕평 마을이 자리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덕평마을의 원래 이름은 영신마을이었다. 덕평마을의 정확한 위치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일부의 주장은 선비샘 아래편의 상덕평 분지라고 하고, 또다른 주장은 영신사에서 가까운 음양수 샘 부근이라고 한다.
화개동천의 의신 마을에서 덕평봉(德坪峰 1,651m) 선비샘으로 곧장 오르는 산길이 있다. 선비샘 직등 루트인 이 산길을 편의상 덕평봉 코스라고 부른다.
이 등산로는 가파른 부분과 평탄한 길이 번갈아 이어지고, 처음부터 끝까지 부드러운 흙길로 이어져 있어 딱딱한 바위를 찾아보기 어렵다. 산행하는데 이상적이며 시종 서정적인 오솔길이 나타난다. 키 큰 나무들의 터널을 통과하는가 하면, 사람의 허리 정도의 산죽(山竹)밭을 지나기도 하고, 억새풀밭을 거쳐 가기도 한다.
[선비샘]
의신마을에서 7Km의 직등 루트를 올라 만나는 선비샘은 지리산 종주산행 코스에서 귀중한 식수를 제공해주는 곳이다.
<전설>
선비샘에는 한 노인의 전설이 전해온다. 옛날 상덕평 마을에서 평생동안 가난하고 천대받으며 살아온 한 노인이 사후에라도 사람대접 한번 받아보는 것이 소원이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이 노인의 아들들은 선비샘 위에 무덤을 만들어 많은 사람들이 샘에서 물을 뜰 때면 반드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므로 결과적으로 이 노인의 무덤에 절을 하는 격이 되게끔 하였다는 것이다.
선비샘은 몇 해 전까지 무릎을 꿇고 물을 떠야 했다. 현재는 이 샘물을 파이프로 시멘트 물탱크에 연결하여 선 채로 받을 수 있도록 해 놓았다. 노인의 무덤도 사라지고 없지만, 전설이 무색하게끔 상황이 변모한 것이다.
<자연조건 및 인물>
선비샘에서 곧장 남쪽으로 내려와 헬기장 조금 못미친 부분에 편편하고 넓은 터가 있다. 이 평지에는 놀랍게도 물가에서 자생하는 수초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의신마을 주민들은 이곳이 지난날에는 큰 못으로 의적 두목 임걸년이 배를 띠우고 놀았던 곳이라고 말한다. 이 못 주변에는 산죽이 밀생하고 있는데. 산죽이 더 이상 뻗어들지 못하고 있는 사실과 수초가 자라는 점, 현재에도 물이 솟아나고 있는 것을 들어 '임걸년 못' 이라고 불렸던 것이 거짓이 아니란 주장이다.
의적 임걸년의 활동 본거지는 현재 임걸령으로 불리고 있는 반야봉 아래편이다. 엄걸년이 덕평봉까지 와서 배를 타고 놀았는지, 또는 관헌에 쫓겨 화개골로 숨어들었다는 도둑 장영기를 잘못 알고 있는지, 과연 실제로 배를 띄울 수 있었을 만큼 큰 못이었는지도 지금은 확인할 길이 없다. 의신마을 주민은 못터 주변의 산죽밭을 뒤져보면 배를 매달았던 두 개의 돌기동을 찾을 수 있다고도 했다.
이곳과 가까운 선비샘에도 임걸년의 일화 한 토막이 전해오고 있다. 임걸년은 애마(愛馬)의 달리기 실력을 시험해 보기 위해서 선비샘에서 세석고원쪽으로 힘껏 활을 쏘았다고 한다. 그는 활을 쏜 것과 동시에 화살이 나는 방향으로 말을 몰아 달려갔다. 그가 목표지점까지 갔지만 화살이 보이지 않았다. 임걸년은 애마의 달리는 솜씨가 형편없다고 판단하여 말의 목을 잘라버렸다. 말의 목이 떨어진 뒤 자신이 쏜 화살이 그제야 날아오는 것을 보고 그는 대성통곡을 했다는 것이다.
이와 똑같은 내용의 전설이 경북 희양산 등 여러 곳에서도 가각 다른 주인공의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으니 믿을 것은 못된다. 아무리 빠른 말이기로서니 들판도 아닌 바위와 나무가 어지럽게 뒤엉킨 산을 화살이 날아가는 것보다야 빨리 달릴 수는 없을 것이다.
[벽소령] 지리산 허리춤에 위치한 벽소령은 화개재나 장터목과 함께 지리산의 남북을 넘나드는 고개중의 한 곳이다. 벽소령의 달밤은 여러 문장가들에 의해 시와 소설이 되었고, 동란 중 빨치산도 벽소령을 넘을 때 달빛 때문에 고향을 그리며 울었다고 한다. 밝다 못해 푸른빛이 도는 지리산 달밤의 운치를 가장 극명하게 표현한 '푸른밤'이란 뜻의 벽소령은 언제부터 '벽소령'이라 불렸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전해오는 고서 및 고지도에 표기되어진 것을 보면 대개 1750년경이 아닌가 추정한다. '벽소(碧푸를벽 宵밤소)'라는 단어는 1751년에 쓰여진 이중환의 <택리지>에서 나온 듯하다.
"지리산의 북쪽은 함양 땅이다. 영원동, 군자사, 유점촌이 있는데 남사고는 이곳이 모두 복지라고 했다. 또 벽소운동과 추성동은 모두 경치가 뛰어난 곳이다."
이중환이 말한 '벽소운동'이 지금의 백무동이 아닌가 추정이 가지만 정확히 규명할 수는 없다. 다만 마천 쪽의 벽소령 자락에 있었던 마을임은 분명하다.
태초에 길이 생겼을 때부터 주로 이 고개를 이용했었던 사람들은 고개의 이쪽저쪽에 사는 민초들은 물론, 등짐 진 보부상들, 혹은 지리산에서 항전의 의지를 불태웠던 의병들과 수 많은 절집의 스님들이었겠지만 조선시대에 지리산을 찾은 유산객들도 이 고개를 넘나든 흔적이 많아 보인다.
조선시대의 '유산기'에서 벽소령을 최초로 언급한 사람은 진주선비 하익범이다. 1807년 중산리 - 천왕봉 - 벽소령 - 칠불암 코스로 산행을 한 그는 "망암(칠선봉으로 추정됨)을 따라 벽소령 냉천(선비샘으로 추정됨) 역참까지 70리였는데 여기서부터 비로소 길이 아래로 꺾였다"고 <유두류록>에 기록했다.
당시 양쪽 산자락의 고개 길이 시작되는 지점인 의신쪽의 삼정리와 마천쪽의 양정마을에는 주막까지 있어 지나는 길손들이 요기와 함께 숙박까지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군사정권시절(1972년) 작전도로가 생기면서 그 옛날 오솔길들은 사라지다시피 했지만 아직도 흔적은 있어 최근에는 등산객의 발길이 잦아지고 있다. 대표적인 오솔길이 빗점골 상부의 천내골, 오리정골, 광대골 상부의 소금쟁이길 등이다.
벽소령의 원래 이름은 '초료조(鷦鷯鳥)재'였다. 추강 남효온이 쓴 지리산기행문인 <지리산일과>(1487년)에 '초료조재'가 등장한다. 초료조는 우리가 흔히 촉새 또는 때까치라고 부르는 뱁새의 학명이며, 한국의 텃새이다.
한편 고개 밑의 의신마을 사람들은 벽소령을 '뱁실령'이라 부르고, 벽소령 샘을 '뱁실샘'이라 부른다. 500년 정의 기록물에 보이는 벽소령의 옛이름 '초료조재', 즉 '뱁새재'가, 어원의 근거지인 옛날 의신사가 있었던 의신쪽 사람들이 부르는 '뱁실령'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고 보아진다.
[형제봉] 1115m. 지리산 자락 가장 남쪽에 있는 최고봉. 우뚝 솟은 봉우리가 우애 깊은 형제와 모습이 비슷하여 형제봉이라 한다. 정상에는 철쭉이 군락을 이루어 매년 5월에는 철쭉제를 개최한다. 형제봉 등산로 주변에는 통천문, 신선대, 봉수대, 고소성 군립공원 등의 관광지가 있다. 고소성 군립공원에서 내려다보면 박경리 소설 <토지>의 주 무대인 평사리가 한눈에 보인다. 또한 악양팔경(岳陽八景)이라는 악양의 주요 경치를 구경할 수 있다.
형제봉의 정확한 지명은 부자바위 즉 부자암(父子巖)이다. 형제봉 아래 사는 마천의 삼정마을 사람들은 아무도 부자암을 형제봉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지역민들이 형제봉을 부자암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설화 때문이다.
<부자암 설화>
조선시대에 지리산 마천의 삼정마을(양정, 음정, 하정)을 끼고 흐르는 광대골에는 전래설화 '선녀와 나무꾼'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하늘에서 일곱 선녀가 목욕을 하러 왔다가 그 장면을 몰래 엿본 나무꾼이 한 선녀의 옷을 훔침으로서 하늘로 돌아가지 못한 선녀는 어쩔 수 없이 나무꾼과 하계에서 살아가게 되고…. 여기까지 스토리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내용과 거의 비슷하나 선녀가 다시 하늘로 올라가 버리는 후편에 가서는 조금 각색이 되어 부자암의 전설을 잉태시켰다.
선녀는 지아비와 두 아들을 두고 하늘로 올라가 버리고 삼부자는 날마다 지리산에 올라가서 하늘을 향해 돌아오지 않는 아내와 어미를 기다리다 화석이 되어버렸다. 훗날 사람들은 화석이 되어버린 바위덩어리들을 부자바위라고 불렀다. 선녀 이름은 '아미'이고, 나무꾼 '인걸'은 옛날 하정부락에서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던 인물이라고 전설은 전하고 있다. 산 아래 하정마을 쪽에서 보이는 부자암의 모습은 꼭 삼부자가 나란히 손을 잡고 걸어가는 형상이라고 하나 속인의 눈에는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하정마을 사람들은 전설의 주체가 되는 부자암을 기리기 위해 1976년에 '석문암계'라는 친목계를 조직해 선녀와 나무꾼이 살았다는 부락의 계곡에 선유정이라는 정자를 세우고 매년 초복이면 전설 속의 나무꾼인 인걸 삼부자를 위해 제사를 올리고 있다고 한다. 한편, 부자암에서 발원한 광대골 물길의 상부 골짝을 지역민들은 '부자바위골'이라고 한다.
[명선봉] 1586m. 연하천 발원지의 남서쪽 봉우리다. 정상에는 이정표와 쉼터가 있다. 대성리 의신마을과 삼정마을(마천리 삼정리가 아님)이 계곡 안에 묻히듯 가라앉은 모습이 내려다보인다. 명선봉에서 연하천으로 발길을 옮기다보면 형제봉과 덕평봉, 칠선봉, 영신봉, 촛대봉이 묘하게 일직선상에 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토끼봉] 반야봉에서 방위가 묘향이라 하여 묘봉이라 불리다 토끼봉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여순사건 이후 지리산으로 숨어든 빨치산들이 덕평봉 전의 봉우리에 꽃이 만발한 모습을 보고 꽃대봉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화개재] 삼도봉과 토끼봉 사이의 허리목이자 뱀사골과 화개골을 연결하는 노루목이다. 지리산 능선에 있었던 장터중 하나로, 경남에서 연동골을 따라 올라오는 소금과 해산물, 전북에서 뱀사골로 올라오는 삼베와 산나물 등을 물물교환하던 장소였습니다. 지금은 지역간 도로가 개설되어 사람들이 편하게 이동하고 있지만, 옛날에는 어떻게 짐을 지고 이곳을 오르내렸을까?
[뱀사골]
뱀이 많아서 뱀자가 들어간 지명이 붙었을 수도 있으나, 뱀의 골짜기란 뜻이라면 '뱀골'이 되어야 하는데, 뱀의 뜻을 지닌 '사'자가 또 들어간 '뱀사골'은 의문이 간다. 지금은 사전에도 없고, 쓰이지도 않는 말이 되었지만 심하다는 뜻의 '배다(베다)'가 있었다. 따라서, '비탈이 배다(베다)'라고 하면 비탈이 매우 심하다는 뜻이 된다. '밴+샅(사이)+골 → 뱀샅골 → 뱀사골'로 비탈이 심한 골짜기란 뜻에서 나왔다고 가정해볼 수 있다.
[594계단]
화개재와 삼도봉 구간에 1999년 설치한 나무 계단으로, 폭 1.5m 길이 240m. 누군가 10계단마다 계단 오른쪽 하단에 표시를 해 두어 595개로 적혀 있으나, 594개가 맞는 것 같다.
[삼도봉] 1449m. 남한쪽 대간의 세번째 삼도봉이다. 반야봉의 남동쪽이자 화개재의 서쪽에 있다. 정상부는 심하게 주름진 암릉이다. 남쪽으로 뻗어내리는 불무장등능선이 전마로가 경남을 가르는 경계이고, 그 끝에 화개장터가 매달려 있다. 불무장등능선은 쌍계사와 연곡사의 중간을 가로지르는 형상인데 이곳을 등반하면 지리산은 졸업했다고 할 정도로 경관이 뛰어나다. 찾는 여행자는 거의 없다.
[반야봉] 1733m. 주능선의 삼도봉에서 서북쪽으로 1.2Km 정도 떨어져 있다. 독립봉으로는 천왕봉에 이은 두번째 고봉이다. 생김새는 달마대사의 머리를 닮았다. 심원과 쟁기소, 반선으로 오르내리는 등산로가 모두 북봉에서 갈라진다. 반야봉에는 남신의 상징인 반야와 천신의 딸이자 여신인 마야고 사이에 얽힌 러브 스토리가 전설로 내려온다.
<전설>
마야고(마고)는 어느 날 사모하는 반야의 옷 한 벌을 지어놓고 반야가 오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고원에 핀 쇠별꽃이 바람에 일렁이며 물결칠 때마다 마야고는 행여 반야가 달려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에 사로잡혔다. 마야고는 마침내 신명나게 머리채를 나부끼며 그 꽃잎 물결 속으로 반야의 옷을 든 채 달려갔다. 그리고 무엇을 잡을 듯이 허우적거렸지만 아무리 찾아보아도 그리운 반야는 보이지 않았다. 쇠별꽃의 움직임을 착각한 마야고는 수치와 분노를 못 이겨 얼굴을 손바닥에 묻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자신을 속인 쇠별꽃을 다시는 피지 못하게 하고 반야의 옷은 갈기갈기 찢어서 불어오는 바람에 흩날려버렸다. 또 매일 같이 얼굴을 비추어보던 산상의 연못은 신통력을 부려서 메워 없앴다.
이 전설의 흔적은 지금도 지리산에 남아 있다. 그녀가 메워버린 못을 누군가 천왕봉 밑 장터목에서 찾아내 '산희샘'이라 부르고, 찢겨져 흩어진 반야의 옷은 소나무 가지에 실오라기처럼 걸려 기생하는 풍란으로 되살아났다고 한다. 그래서 지리산 풍란은 '환란'이라는 별칭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노루목]
1. 노루가 자주 다니는 길목.
2. 넓은 들에서 다른 곳으로 이어지는 좁은 지역.
노루목이란 명칭은 이곳의 암두(巖頭) 모양새가 마치 노루가 머리를 치켜든 모습이란 얘기와, 노루가 지나다니던 길목이라는 얘기가 전해져 온다. 또한 문순태의 장편소설 <철쭉제>에는 '산에서의 세 갈림길'을 흔히 노루목이라 한다고 적혀 있는데, 많은 사람이 쉬어가는 길목인 노루목에서는 흔히 세 갈림길을 만나게 되는 것으로 보아 이 역시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또는, 땅의 모양이 넓거나 늘어졌다는 뜻으로 '널'자에 지점이라는 뜻의 '목'자가 합쳐져 널목→놀목→날목→너르목→노루목 등으로 변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임걸령] 전설에는 초적 도적 임걸년은 팔도행상의 물건을 일부만 털었고, 또 그것을 모아 빈민을 구제한 의적이라고 하는데 실제 임란 당시 어떤 행적을 보였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조선 선조 남원의 의병장 조경남이 지은 <난중잡록>(의병의 기록과 사회상 기록)에는 1594년 6월 "이때에 영남사람 임걸년이 또한 도당을 모아 지리산 반야봉에 둔쳐서 출몰하며 도적질을 하였다"라고 적혀 있다. 임걸년이 와전되어 임걸령이라 한다.
임걸령에서 노고단까지는 대체로 순탄한 길이라, 노고단에서 임걸령을 향해 화살을 쏘고 말을 타고 달렸더니 말이 먼저 도착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주변에 키 큰 나무가 호걸처럼 많이 서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피아골] 지리산 피아골 관문은 전남 구례군 토지면, 경남 하동에서 섬진강을 따라 19번 국도를 타고 북서쪽의 구례로 달리다가 화개장터 앞을 지나 2Km쯤 더 간 외곡마을이 바로 그곳이다. 이 마을에서 섬진강 큰 물줄기와 헤어져 북쪽에서 흘러내려오는 연곡천의 작은 물줄기를 따라 오르면 피아골의 긴 골짜기가 주위의 풍경을 펼쳐 보이며 산길을 안내한다. 목아재와 촛대봉이 반원형으로 터 준 골짜기를 오르면, 양쪽 산기슭에 기촌, 가락골, 중터, 조동 등의 마을들이 차례로 타나면서 외진 산길의 적적함을 덜어 준다. 촛대봉 능선이 경남과 전남을 갈라놓았다. 예부터 두 도(道)의 사람들이 오가던 길 줄기들이 등성이를 나란히 얽어 느랏목, 뒷골재, 새끼미재 등의 고개들을 만들어 놓았다. 목아재를 감돌아 산길 왼쪽으로 비스듬히 발길을 꺾으면 조선시대에 원집이 있었다던 원터에 닿는다. 더 오르면 피아골이다. 마을의 한자명은 직전(稷田), 여기에서 직(稷)이란 척박한 땅에서 잘 자라는 작물로 '피'라고도 불린다. 즉 피밭이다. 피아골 골짜기를 직전계곡이라고도 한다. 6.25 등 싸움이 벌어질 때마다 이곳에서 피를 많이 흘려 '피의 골짜기'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피아골을 피와 관련지어 지명의 원뜻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왜냐면, 6.25 전에도 '피아골'이라 불렸기 때문이다.
[돼지령] 예로부터 멧돼지들이 좋아하는 둥굴레가 많이 나는 곳이어서 이름이 생겼다(일부에서는 원추리 뿌리를 캐먹는 멧돼지들의 모습이 많이 목격돼 돼지평전이 됐다는 설도 있음).
[노고단] 1507m.
<지명>
노고단이란 도교에서 온 말로, 우리말로는 '할미단'이며, '할미'는 국모신(國母神)인 서술성모(西述聖母:仙桃聖母)를 일컫는다. 서술성모를 마고할미로 존칭하며 부르게 된데서 노고단이란 지명이 유래됐다. 옛날 신라시대부터 지리산의 산신 서술성모를 모시는 남악사가 있었던 민속신앙의 영지였다.
산정부에 가까운 1,100∼1,200m 높이에는 원추리꽃으로 덮인 광활한 고원이 펼쳐져서 부근이 좋은 피서지를 이루기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 전까지 서양사람들의 별장지가 되었다. 노고단의 경관은 울창한 임상(林相)과 웅대한 산용(山容)의 경치가 훌륭하고, 정상부에서의 조망이 뛰어나다. 서쪽 계곡에는 화엄사(華嚴寺)가 있는데, 경내에 각황전(覺皇殿)을 비롯해 국보·보물로 지정된 전각(殿閣)·석등(石燈)·석탑 등이 많다.
-마고할미 전설(반야봉)
지리산 산신 중 여신인 천왕봉의 마고할미는 선도성모(仙桃聖母) 또는 노고(老姑)라 불리는데 바로 천신(天神)의 딸이다. 마고할미는 지리산에서 불도를 닦고 있던 도사 반야(般若)를 만나 결혼해 천왕봉에서 살았다. 그들은 딸만 8명을 낳았다. 그러던 중 반야는 더 많은 깨우침을 얻기 위해 가족들과 떨어져 반야봉으로 떠났다. 그리고 마고할미가 백발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마고할미는 반야봉에서 깨우침을 얻기 위해 외로이 수도하는 남편 반야를 그리며 나무껍질을 벗겨 남편이 입을 옷을 만든다. 그리고 마고할미는 딸들을 한 명씩 전국 팔도에 내려 보내고 홀로 남편을 기다린다. 기다림에 지친 마고할미는 끝내 남편 반야를 위해 만들었던 옷을 갈기갈기 찢어버린 뒤 숨지고 만다. 갈기갈기 찢겨진 옷이 바람에 날리어 반야봉으로 날아가니 바로 반야봉의 풍란이 되었다고 전한다.
후세 사람들은 반야가 불도를 닦던 봉우리를 반야봉이라 불렀고 그의 딸들은 8도 무당의 시조가 됐다는 이야기이다. 반야봉 주변에 안개와 구름이 자주 끼는 것은 하늘이 저승에서나마 반야와 마고할미가 만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 한다
[코재] 종석대 동쪽이자 화엄사 계곡에서 올라가면 만나게 되는 깔딱고개의 끝이다. 언젠가부터 이곳에 전망대를 만들어 여행자들이 섬진강을 멀리서 구경하고 지나간다. 성삼재로 차량이 올라가기 전에는 화엄사를 산행 기점으로 삼아 이곳 코재를 경유했다. 화엄사에서 올라가자면 줄잡아 3시간 30분 소요된다. 화엄사에서 오르자면 코재를 앞두고 경사가 하도 급하여 "코가 땅에 닿는다"고 해서 '코재'라 부른다 한다.
[종석대] 성삼재의 남쪽이자 코재의 서쪽에 올라앉은 봉우리다. 동은 지리산 주능선, 서는 시암재와 양미봉으로 연결되는 서릉, 남은 원사봉으로 이어지는 차일봉 능선, 북은 만복대로 올라가는 서북릉이 종석대를 기점으로 갈라져 나간다. 코재에서 출입문을 만들어놓고 통제하는데 관리인은 없다. 정상부가 암릉인데 '엎어놓은 종처럼 오뚝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성삼재] 지리산 주능선의 가장 서쪽에 위치한 고개다. 지리산 종주의 기점으로 이용된다. 861번 지방도로가 올라간다. 정상에는 단정한 휴게소와 식당이 있다. 이곳에 있는 국립공원 관리사무소에서 서북능선인 만복대까지 관리한다. 일반 등산객들은 종석대를 거치지 않고 코재로 직접 올라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돌을 다듬어 바닥에 끼워 맞춘 돌포장 도로가 길이 크게 꺾이는 지점까지 올라간다. '3개의 재(고개)로 이루어졌다'고 하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성삼재는 삼한시절의 전적지로, 마한군에게 쫓기던 진한왕이 달궁계곡에 왕궁을 짓고 피난하여 살 때였다. 북쪽 능선에 8명의 장수를 두어 지키게 한 곳이 팔랑재요, 동쪽은 황장군에게 지키게 하였으므로 황영재, 남쪽은 성(姓)이 각각인 세 사람의 장수를 보내어 지켰다 해서 성삼재라 하였다 한다.
[만복대] 풍수지리적으로 지리산의 많은 복을 차지하고 있다고 하여 만복대라는 이름이 붙었다고도 하며, 사방으로 복을 내려주는 봉우리란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가을에는 전형적인 초가지붕을 연상케 한다고 할 만큼 복스럽게 생긴 모양새다. 거대한 젖무덤처럼 부드럽게 솟아 오른 만복대는 광활한 억새 군락지를 이루고 있어 가을 풍경이 특히 아름답다.
[정령치] 정령치는 주천면 고기리에서 산내면 달궁 부락으로 넘어가는 지리산 줄기의 고개로, 황령치(黃嶺峙)와 함께 마한의 별궁을 지키던 중요한 곳이었다 하는데 이곳은 고개 마루가 운동장만큼이나 넓어 이에 대한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전설> 마한의 별궁을 방어하기 위해 황령치와 정령치에 성을 쌓고 정씨 성을 가진 장군과 황씨 성을 가진 두 장군이 각각 지키고 있었는데, 정 장군이 지키던 이 정령치에 마을을 만들고자 그의 신통력을 써서 손바닥으로 고갯마루를 쳐서 주위의 높은 산들을 뒤로 물러나게 하였다.
이리하여 산들이 조금씩 뒤로 물러나 앉기 시작하는데 운봉에 사는 어느 아낙이 저녁을 짓고 있는데 천지를 올리는 천둥소리와 함께 지축이 흔들리므로 괴이하게 여겨 소리나는 쪽을 바라보니 정령치쪽 높은 산들이 탕탕 내리치는 소리에 맞추어 빙빙 돌면서 조금씩 움직이므로 무심결에 "어메 산이 가네이!"하고 외치면서 들고 있던 부지깽이로 부엌 문턱을 치니 그 순간 정 장군이 내리치는 소리에 맞춰 움직이던 산들이 그만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아 다시는 움직이지 않아 고갯마루가 넓어지려다 말았다 한다.
6.25 전만 해도 정 장군의 손바닥이 찍힌 바위가 달궁마을 앞까지 굴러 내려왔다 하는데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없고 다만 정 장군이 쌓았다는 산성만이 고리봉 능선에 약 20m 정도 남아 있어 옛 전설(마한의 별궁설)을 전해주고 있다. 현재는 이 고개를 정령치(鄭嶺峙)라 하지 않고 정령치(正嶺峙)라 고쳐 부르고 있다.
[고기리] 본래 남원군(南原郡) 상원천면(上元川面)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고촌리(高村里)와 내기리(內基里)가 병합되어 고촌과 내기의 이름을 따서 고기리(高基里)라 하고 주천면에 편입되었다가 1995년 남원시 군이 통합되어 남원시 주천면 고기리가 되었다. 고기리에는 내기, 고촌 등이 있다. (남원시 주천면 자료)
마을 뒤로 산지가 위치하며 앞으로는 원전천이 흐른다. 자연마을로는 고촌, 안터, 내건너 등이 있다. 고촌은 고기리에서 으뜸가는 마을로 지대가 높다 하여 붙은 이름. 안터는 고촌 서쪽에 있으며 골짜기 안에 깊숙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생긴 이름이다. 1914년 지명을 한문으로 표기할 때 안내(內)자와 터기(基)자로 고쳐 내기(內基)로 바뀌었다. 내건너는 고촌 남쪽에 있으며 내 건너편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다.
[노치마을] 가재마을
남원시 주천면 덕치리, 백두대간 마루금이 지나는 유일한 마을이다. 동쪽은 운봉읍, 서쪽은 주천면에 위치해 한 집안에서도 행정구역이 갈리는 곳이다. 그래서 주천 부엌에서 밥을 지어, 운봉 안방에서 밥을 먹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물 역시 한 마을에서 낙동강과 섬진강으로 나뉜다.
이 마을에는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홍수에도 넘치지 않으며, 물맛 좋기로 소문난 노치샘이 있다. 고려시대에는 이곳에 절이 있었다고 하는데, 마을 사람들은 이 샘이 스님들이 판 것으로 여긴다. 6.25가 터지고 장티푸스가 돌 때도 이 샘물을 마신 사람만은 무사했다고 한다. 이 마을을 지나가는 대간꾼들만 일년에 4천여명. 노치마을의 당산 소나무에게 인사하지 않은 사람, 노치샘물을 마시지 않은 사람은 백두대간을 지났다고 할 수 없다 한다.
蘆峙. 갈대 노, 언덕 치. 이 마을에는 갈대가 많아서 갈대마을로 불렸다고 한다. 갈대의 전라도 사투리가 ‘갈재’. 이것이 다시 가재로 된 것으로 보인다.
6.25때는 지리산 공비토벌 작전으로 모두 불태워졌던 아픔이 있는 마을. 마을 뒷산에는 삼국시대 축조된 노치산성이 있다. 신라와 백제의 국경지대로써 중요한 방어지역이었으며, 아영면 아막성에서 정령치 고리봉의 산성까지를 이어주는 기점이다.
[수정봉] 여원재와 주촌리 사이에 가장 높은 봉우리다. 서쪽의 남원방향은 지대가 매우 낮은 반면 동쪽의 운봉은 고원분지에서 지대가 매우 높으면서도 편편하다. 정상 주변에 성터가 있었던 흔적이 남아 있다. 수정은 보석의 일종으로 귀하게 여겨진다. 수정봉은 귀하므로 지켜져야 할 곳이라는 존재의 가치를 지명으로 사용하고 있다.
[입망치] 수정봉 북쪽, 이백면 과립리 동쪽, 운봉읍 행정리 서쪽에 위치한 고개다. 입망치는 과립리와 연관된 이름으로 ‘서서 멀리 보이는 곳’이라는 뜻이다. 수정봉에 성터 흔적이 보이는데 예전에 망루가 있었다고 한다.
원문: 프레시안 <백두대간 12걸작선2>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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