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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종주/백두대간자료

설악산 구간 지명 해설(구룡령~삼재령)

by 산엔달 2014. 4. 18.

◆[구룡령] 九龍嶺 1013m

본래 지명 장구목. 도로가 나기 전 강원도 홍천에서 속초로 넘어가던 고개다. 속담에 9개의 용이 지나갔다 하여 구룡령이라 한다. 구룡령의 미천골, 미천[米川]이라는 이름도 이곳의 수도승들이 많아 공양을 짓기 위해 씻은 쌀뜨물이 하얗게 흘렀다 해서 붙은 것이다.

아흔아홉 굽이의 고개가 마치 용이 꿈틀거리며 지나간 듯 하다고 해 이름 붙여진 구룡령 옛길은 지금의 정상에서 북쪽으로 30분 가량 떨어져 있는 옛 구룡령 정상 ~ 갈천리까지의 5㎞로 100여년 전만 해도 사람들이 걸어서 넘던 길이다. 구룡령 정상주변에는 50년생 천연활엽수림의 숲으로 단풍이 절정을 이루고 있으며, 특히 봄철에는 철쭉꽃이 만개하여 장관을 이룬다. 또한 양양군과 홍천군의 경계를 정할 때 양양의 땅을 조금이라도 더 넓게 하려고 달리다가 숨진 청년이 묻혔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묘가 있으며 주변은 갈천약수와 미천골 자연휴양림도 있어 탐방코스로 손색이 없다.

 

- 구룡령 옛길

구룡령 옛길 정상과 갈천마을의 딱 중간에 자리한 ‘솔반쟁이’ 주변에는 1980년대 후반 경복궁 복원공사 때 재목으로 잘려나간 노송들의 그루터기가 흩어져 있다. 이곳에 자생하던 수령 100년 이상의 금강송 40여 그루가 경복궁 대들보와 기둥의 재목으로 베어졌다고 한다. 지금도 갈천마을과 가까운 옛길의 아래쪽 길가에는 어른 둘이 껴안아도 모자랄 만큼 우람한 금강송이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로 서 있다. 신목(神木) 같은 형용의 금강송이 있는가 하면, 뿌리를 반쯤 드러낸 채 늠름하게 서 있는 노송도 있다.

 

구룡령 옛길은 우리 사회가 옛길을 어떻게 취급하고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로 꼽힌다. 구룡령의 지명과 위치가 현재 잘못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지리에 밝고 산을 잘 안다는 사람들조차 구룡령의 옛길은 모른다. 대부분이 구룡령 하면 지금 차가 다니는 56번 국도가 넘나드는 고개를 원래의 구룡령길이라 생각한다. 이 도로는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자원 수탈 목적으로 구룡령 고개에서 1km가량 떨어진 곳에 개설한 비포장도로가 지난 1994년 포장된 것이다. 일제 당시 일본인들이 지도에 원래의 구룡령의 위치가 아닌, 차가 다니는 비포장도로를 구룡령으로 표기하면서 사람들은 구룡령의 위치를 잘못 알기 시작했다. 더욱이 94년 이후에는 모든 지도와 행정 표기에서 구룡령의 위치가 현재 차가 다니는 지점으로 정리됐다. 백두대간을 연구하고 관리하는 정부나 민간단체, 학자들조차 구룡령길을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다.

구룡령 옛길에는 조상들이 어떻게 길을 다녔는지를 보여주는 원형이 남아 있다. 요즈음 사람들은 영서와 영동을 차로 넘으면서 차창 밖으로 보이는 백두대간의 험한 지형을 실감한다. 그래서 이런 급경사의 산지에서 말이 다닐 수 있다는 사실을 상상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 길을 걸어보면 구룡령 옛길에서 노새와 조랑말 등이 큰 등짐을 지고 다녔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게 된다. 그만큼 옛길은 힘겨운 고개를 가장 힘이 덜 드는 형태로 만들어놓았다. 비탈길이어도 최대한 경사를 누인 길이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은 누군지도 모를 옛사람들의 지혜가 세월과 함께 쌓인 덕분이다. 어떤 빼어난 등산로도 따라올 수 없을 만큼 자연 속에 파고드는 절묘한 흐름이 길 구석구석에 배어 있다. 숲과의 조화가 자연스럽고 깊다는 점은 걸어보면 단박에 느껴진다. 똑같은 고도의 등산로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여유가 길에 묻어 있다.

지리산이나 설악산 등 큰 산의 등산로를 오르다 보면 주변의 숲을 감상하기 어려운 비탈과 고빗길이 수없이 펼쳐진다. 그래서 산쟁이들 가운데서도 발품이 노련하고 옹골진 이가 아니면 대부분 숲을 제대로 살펴보지도 못하고 정상으로 오르기에 바쁘다. 하지만 구룡령 옛길은 숲의 모습을 제대로 보고 느낄 수 있다. 옛사람들은 요즘 일부 등산꾼들처럼 싸우는 듯이 산길을 걷지는 않았던 것 같다. 어차피 갈 길이니 최대한 여유 있고 천천히 걸음이 이어지도록 길을 냈던 셈이다. 그러다 보니 숲의 원형이 훼손되지 않으면서도 다니기에 편안한 길이 되었다. 선조의 경험과학이 녹록지 않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 솔반쟁이, 묘반쟁이, 횟돌반쟁이…

구룡령 옛길에는 굽이굽이 민중들의 꿈과 희망, 아픔과 좌절도 녹아 있다. 특히 일제 강점기 때 숯을 구웠던 재탄장과 함께 철광의 흔적이 남아 있다. 농경사회의 시작과 함께 철기문화가 열리면서 양양 일원으로 공급한 철로 만들어진 농기구의 원재료를 구룡령의 옛길 한쪽에서 생산해냈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철을 캐던 동굴이 그대로 남아 있다. 광산이 일제 강제수탈의 현장이었던 점도 흔적을 통해 확인된다.

숲으로 펼쳐진 구룡령 옛길의 또 다른 상징은 금강소나무다. 1980년대 말 경복궁 복원 과정에서 많은 금강소나무가 베어진 뒤 국내에는 금강소나무가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드물다. 무리를 이룬 200~300년 된 금강소나무들의 붉은 기운이 하늘로 뻗어 있다. 굵은 금강소나무의 표본인 곳이라 해 ‘솔반쟁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젊은 청년 죽은 터는 ‘묘반쟁이’, 장례식의 하관 때 회다짐을 하기 위해 쓰던 횟가루를 생산한 곳이라는 뜻의 ‘횟돌반쟁이’ 등의 지명도 남아 있다.

 

 

◆[갈전곡봉] 葛田谷峰 1204m

강원 인제군 기린면과 양양군 서면의 경계에 있는 산. 홍천의 내면과 양양의 서면, 인제의 기린면의 세 오지를 일구어 내는 교차점이다. ‘칡넝쿨 밭’이란 이름이다. 가칠봉(1,240m)·사삼봉(私參峰:1,322m)·응봉산(鷹峰山:1,016m) 등과 함께 태백산령의 일부를 이룬다. 또한 소양강의 지류인 방대천(芳臺川)을 비롯하여 계방천(桂芳川)·내린천(內麟川) 등의 발원지를 이루고 있다.

 

 

- 방동약수

백두대간의 구룡령은 56번 국도 상의 강원도 홍천군 내면과 서면 경계에 위치한다. 구룡령에 이어 백두대간 상의 갈전곡봉의 계곡물은 인제군 기린면 방동리로 흘러가는데, 이곳 방동리에는 방동약수라는 유명한 약수가 있다. 방동약수는 무색투명한 광천수로, 특히 탄산 성분이 많아 사이다 맛이 나며, 탄산 이외에도 철분, 망간, 불소 등의 성분이 들어 있어서 위장병에 특효가 있다고 한다. 또한 방동약수에서 백두대간 넘어 양양군 서면 갈천리에는 갈천약수가 있는데, 이곳의 약수도 방동약수와 성분과 맛이 비슷하다. 이렇게 강원도 지역 내의 백두대간에는 약수터가 많은 곳에 산재하고 있다.

풍수지리에서 기본적인 요소는 산과 물인데, 산은 인물과 관계가 있고, 물은 재물과 관련이 있다. 중국 청조에 심호(沈鎬) 선생이 지은 형기풍수 고서인 지학(地學)을 보면 물에 관한 설명 중 특히 수형(水形) 이외에 물에 관련하여 상세한 내용이 있다. 풍수지리에서 물은 수형(水形) 즉 물이 흐르는 형태로 분합(分合)과 내거(來去)의 방향·대소·원근 등을 보고 길흉화복을 판단한다.

 

 

◆[연가리골 샘터(안부)]

정감록에 보면 인제군 기린면과 홍천군 내면 일대는 난리를 피할수 있는 최고의 피난처로 3둔(살둔, 달둔, 월둔) 4가리(적가리, 아침가리, 연가리, 명지가리 또는 곁가리)를 꼽고 있는데, 그만큼 이 주변은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오지였다.

 

 

◆[쇠나드리고개(옛조침령)]

쇠나드리는 진동리의 설피밭에서 방태천을 따라 두무터와 연결되는 나들목이다. 대간상 ‘솨나드리고개’는 쇠나드리의 뒷산 노루목으로서 설악산의 험준한 산줄기와 오대산의 산줄기가 만나 살작 허리를 낮춘 곳이다. 쇠나드리는 ‘쇠(소)나들이’가 본디말로 옛날에 ‘소 등에 올라타고 넘나들던 먼 길’이어서 붙여졌다. 대간 종주자들이 가끔 탈출로로도 이용한다. 동쪽의 서림으로 경사가 급해 내려서는 길이 마땅치 않다. 이 구간은 흔히 산거머리와 검은 진드기가 많아 산행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곳인데, 최근에는 산림방제의 효과인지 검은 진드기만 가끔 보이고 산거머리는 아예 눈에 띄지 않는다. 송충이나 쐐기도 없다.

 

세 계곡 물이 합수된 지점에 다리가 있는데 이곳은 바람이 매우 세차 세나들목이라, 강원 어휘 변형으로 쇠나들이라 하였다.

 

일명 風趣洞. 봄에는 땅을 메마르게 하는 흙바람, 여름에는 길을 가로막는 비바람, 가을에는 억새를 뒤흔드는 낙엽바람, 겨울에는 눈보라에 살을 에는 칼바람이 불어, 황소까지 날려버릴 세찬 바람이 불었다 하여 쇠나드리 마을이 되었다 한다. 또한 마을 안에 있는 개천의 여울이 급하고 바람이 세차 소들이 건너다니기 힘들었다고 한다.

바람이 거세기로 유명한 쇠나들이는 바람불이로도 불린다. 억새와 닮은 속사가 널려 있는 ‘버덩’이 색다른 느낌을 준다. 원래 세 줄기 험한 물줄기가 길을 막는다고 해서 세나들이로 불리던 곳인데 ‘버덩’에 소를 방목하면서 쇠나들이로 바뀌었다고 한다.

 

 

 

◆[조침령] 曺枕嶺 877m

강원도 양양군 서면 서림리와 인제군 기린면 진동리를 연결하는 조침령은 원래 소금을 지고 오던 길이었지만, 일제 강점기 자원 수탈을 위해, 유신 당시에는 고관대작의 정원 조경수와 원석을 실어나르는 데 이용되었다고 한다. 증보문헌비고에서는 '떨어질 조阻', '가라앉을 침沈'자를 써서 험준하다는 뜻의 조침령(阻沈嶺)이라 하였으나, 산경표에는 조침령(曺枕嶺), 근래의 백두대간 종주자들은 '새도 자고 넘는다는 고개'라는 뜻으로 조침령(鳥寢嶺)으로 표기하고 있다.

 

양양문화원에서 발행한 <양양의 땅이름>과 <양주지>에서는 증보문헌비고와 표기는 같으나, 다만 침자만 '베개 침枕'자로 표기하고 있다. 하여튼, 한계령이 1004m이고, 구룡령이 1013m인데, 그보다 훨씬 낮은 조침령을 새도 자고 넘는다고 한 것은 무슨 까닭일까. 예로부터 조침령은 말을 타고 다니기는 쉽지만 실제론 먼 길이라 했던 걸로 봐서는 구절양장 먼 길이라 그리 부른 듯싶다. 그래서 조침령을 '좆칠령'이라고도 했다 한다.

조침령도 구룡령과 마찬가지로 지금의 길이 본래의 옛길이 아니다. 본래의 옛길은 현재의 조침령보다 남서쪽에 위치한 쇠나드리 근처를 넘었다. 지금의 조침령은 20여 년 전 군부대가 놓은 새길이며, 83년 6월~84년 11월 제3군단 공병여단이 21km 군사도로를 개설한 것이다. 예전에는 '반평고개'라 불렀다 하며, 지금도 주민들은 반평고개로 부른다. 반평고개라 한 까닭은 서림마을에서 조침령으로 가는 중턱에 5만여 평에 달하는 평지가 있는데, 소반 같이 평평하다 하여 '반평(반부둑')이라 부른 데서 따온 것이다. 그 반평고개에 지금은 동홍천-양양간 고속국도를 닦느라 터널도 뚫고, 포장공사도 하고 해서 옛길의 정취를 모두 삼켜버렸다.

 

- 양양의 다섯 고개

양양과 백두대간 너머 지역을 잇는 고개 중 한계령과 구룡령 외의 고개를 제외하고 아직까지 사라지지 않은 고개들이 조침령, 북암령, 단목령이다. 양양에 있는 이 다섯 개의 고개 모두가 양양군 서면에서 인제 혹은 홍천으로 넘어가는 길에 자리 잡고 있다. 서면뿐 아니라 양양군 현북면 또한 백두대간과 접해 있지만, 유독 서면에만 고개들이 나 있는 까닭은 대간 너머에 마을과 주민들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조침령, 북암령, 단목령은 대간을 가운데에 두고 양양, 인제, 홍천에 살던 선질꾼, 마꾼과 같은 생선장수, 소금장수, 젓갈장수들이 양양장을 보거나, 수산물을 팔기 위해 왕래했던 고개이다. 선질꾼은 등에 바지게나 통지게를 지고 물건을 싣고 다니며 팔던 이들이고, 말을 가지고 물건을 실어 날랐던 이들은 마꾼이라 한다. 서림에서 조침령으로 올라가다 보면 초입의 새림골부터 굴아우골까지 11개의 골들이 고개길 좌우로 있는데, 이 골들에 이들이 쉬어가던 주막이 십여 개 남짓 있었다고 한다.

 

 

◆[북암령] 北岩嶺 925m

한계령을 사이에 두고 설악산 대청봉(한계령을 기준으로 할 때 북쪽)과 마주보고 서 있는 점봉산의 동쪽 산줄기에 해당하는 북암령은 세계적인 희귀식물인 한계령풀의 집단 분포지로 알려진 곳이다. 백두대간상에 위치해 있어 대간 종주인들이 점봉산을 앞두고 꼭 거쳐가야 할 고개로도 유명하다.

 

조침령이 도로공사로 옛길이 사라져 버렸지만, 그 북쪽에 위치한 북암령과 박달령은 아직도 옛길 그대로이다. 북암령은 양양군 서면 북암리에서 서쪽 2km가량 지점에 있으며, 북암리는 미천골 선림원지에서 북쪽에 위치한 암자가 있었다 하여 북암리라 했다. 양양을 사투리로 '예양'이라 부르는 것처럼, '북애미'라고도 부른다.

 

-국내 최대 한계령풀 군락지

매자나무과의 이 식물은 국내에서는 그 이름과 달리 설악산 일부 지역과 점봉산에서만 서식하는 희귀식물로, 중국 동북부와 러시아 연해주지방에서도 있으나 그곳에서의 것들과 달리 이곳 한국에서의 서식지 영향으로 또 다른 개체종으로의 성격을 띄게 된 종이다. 제철에 잠깐 노란색 꽃을 피웠다가 이내 몸째로 녹아 없어져 뿌리로서만 동정이 가능한 한계령풀은 전세계에서 내노라는 초본식물원(herbatium)들도 그 표본을 제대로 갖고 있지 못하고 있다.

지난 ‘90년대 중반 점봉산 양양 양수발전댐 건설반대 운동중 이 지역을 조사했던 우이령보존회의 식물학자들에 의해 북암령 일대에 대규모 서식 군락을 발견 당국에 천연기념물 지정이나 보호구역 설정을 건의했으나 아무런 조치가 따르지 않고 있다.

 

 

 

[875봉]

설악산 국립공원이 시작되는 곳이다

 

 

◆[단목령] 檀木嶺 809m

박달나무가 많아 박달령이라고도 불린다.

박달령은 점봉산에서 내려온 잘록한 고개목으로써 조침령, 북암령과 마찬가지로 양양군 서면 오색의 마산에서 인제군 기린면 진동리를 잇는 고개이다. 1217년(고려 고종 4년) 김취려 장군이 거란군을 제천, 원주에서부터 추격하여 이 곳 박달령에서 섬멸했다고 양양지방에 전해내려 온다. 그러나 실제로는 1216년에 침범한 거란군을 1217년에 김취려 장군이 전군병마사가 되어 충북 제천군 박달령에서 크게 무찔러 격퇴시킨 것으로 옛 문헌에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고개 이름이 같은 것에 주목한 누군가 이야기를 와전시킨 것이 지금껏 전해 내려오는 듯하다.

옛적부터 박달령을 넘는 길은 현재 오색초등학교가 있는 박달마을에서 시작한다. 오색마을 사람들은 '박다룩'이라고도 하고, 학교가 있다 하여 '학교마을'이라고도 한다. 옛적에는 산 형국이 말 같기도 하고, 조선 초에 오색역을 거쳐 갈 때 이 곳에서 말을 갈아타고 갔다고 해서 '마산(馬山)'이라고 불렀다.

오색초등학교 맞은편 오색천에 놓여진 돌 징검다리를 건너 박달골을 따라 넉넉히 2시간이면 박달령 정상에 도착할 수 있다. 한참 오르다 보면 우거진 풀숲에 가려진 길을 찾기가 쉽지 않는 곳도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한낮에도 어두컴컴한 원시림 숲 속을 산책하듯 걷다보면 중턱쯤에는 장년의 두 팔 폭 정도의 난치나무가 있는 난치고개에 이르게 된다. 이 고개에 대한 오색리 홍창해 이장님의 설명이 재미있다.

'난치나무란 오래된 단풍고목을 이야기하며 박달령 오르는 길 주위에는 박달나무와 단풍나무가 유난히 많습니다. 난치고개 주변에는 머릿짐이나 지게를 올려놓기 좋을 만큼의 돌들이 쌓여 있는데 고개를 오르던 아낙네들은 혼자서 머릿짐을 내리고 다시 올리기 좋도록 높이를 맞추어 놓은 돌들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가쁜 숨을 죽이고 다시 단목령을 오릅니다.'

그렇게 가쁜 숨을 죽이고 오르다 보면 가파른 경사가 시작되는 데 정상까지 약 1km 정도 남겨둔 지점이다. 정상에 오르면 활엽수림이 나타나는데 이 구간이 바로 남한 최대의 원시림구간이다. 박달령 마루턱에서 서북쪽으로 보이는 우뚝 솟은 산이 바로 점봉산이다.

 

- 민초들의 고개 조침령과 박달령

소동라령은 한동안 오색령이라는 반쪽의 이름으로 쓰이다가 국도가 넘어가는 오늘날에는 또 다른 반쪽의 이름인 한계령으로 소통되는 운명을 지녔다. 옛날처럼 다시 서울길이 열렸으니 소동라령으로 돌아가면 되겠지만 그도 한 세월에 하릴없이 되는 일은 아니다. 정작 고갯마루에서 내려다보면 한계와 오색은 그저 내리막 길 양쪽에 걸린 땅이름에 다름 아니지만 부르기에 따라 한쪽은 소외(疏外)로 여기는 일이 고개 이름에는 흔하다. 고개 또한 사람의 생리를 닮아 한쪽 이름만 부르면 또 한쪽은 냉큼 토라져 돌아앉는다.

역로가 소동라령에서 미시령으로 옮겨간 다음부터 개화기 무렵까지 근동의 민초들이 내린천 물길을 중심으로 백두대간을 넘나들던 고개는 조침령과 박달령이다. 조침령은 양양의 서림에서 인제의 기린으로 넘는 고개인데 본래 옛길을 피해 엉뚱한 곳에 새로 흙먼지 길을 닦고 지명비를 세웠다. 박달령은 오색의 들 목에서 인제의 으뜸 오지 진동리로 넘는 고개이니 고려 고종 4년에 김취려 장군 이 충북의 제천에서부터 추격한 글안족을 마지막으로 섬멸했다는 곳이다.

 

 

◆[점봉산] 點鳳山 1424m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과 양양군 서면에 걸쳐 있는 산. 한계령을 사이에 두고 설악산 대청봉과 마주보며 점붕산이라고도 하며, 옛이름은 덤붕산이다. ‘덤’은 둥글다는 뜻으로 이것이 한자화하면서 점봉으로 변한 것이다. 또한 부드러운 육산과 날카로운 암봉이 조화를 이룬 점봉산은 등벙산 또는 등붕산(登朋山)이라 불리기도 한다. 설악산국립공원 중 남설악의 중심이 되는 산으로, 설악산의 최고봉인 대청봉을 오르는 시발점이기도 하다. 북동쪽에 대청봉이 있고, 북서쪽에 가리봉, 남서쪽에 가칠봉 등이 솟아 있다. 산의 동쪽 비탈면을 흘러내리는 물은 주전골을 이루어 오색약수를 지나 백암천에 합류한 뒤 양양의 남대천으로 흘러든다. 산자락에 12담계곡·큰고래골·오색약수터·망월사·성국사터 등 명소가 많으며, 오색약수를 거쳐 오르는 주전골은 단풍명소로서 흰 암반 위를 흐르는 계곡물과 단풍이 어우러져 매우 아름다운 풍경을 빚어낸다.등산로는 약수터와 온천이 있는 오색에서 시작하고 정상에 오르면 대청봉·가리봉 등 설악산의 영봉과 푸른 동해가 한눈에 들어온다.

산 일대에 펼쳐진 원시림에는 젓나무가 울창하고, 모데미풀 등 갖가지 희귀식물을 비롯하여 참나물·곰취·곤드레·고비·참취 등 10여 가지 산나물이 자생한다. 특히 한반도 자생식물의 남북방한계선이 맞닿는 곳으로서 한반도 자생종의 20%에 해당하는 8백 54종의 식물이 자라고 있어 유네스코에서 생물권 보존구역으로 지정하기도 하였다. 주전골 성국사터에 보물 제497호인 양양 오색리 삼층석탑이 남아 있다.

부드러운 육산과 날카로운 암봉이 조화를 이룬 점봉산은 등벙산 또는 등붕산(登朋山)이라 불리기도 한다. 정상에 올라 설악의 장대한 연릉과 동해바다의 드넓음을 조망하는 것은 점봉산 산행의 백미다. 가을 단풍으로 유명한 주전골도 이에 뒤지지 않는다. 12담 구곡으로도 불려지는 주전골은 옛날 위폐범들이 계곡에서 불법으로 염전을 만들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 오색약수(五色藥水)

약150여년 전 성국사 승려가 반석위에서 용출되는 천맥을 발견하고 무심히 한모금 마신 결과 약수로 판명되었다. 당시에 성국사에 오색화가 피는 특이한 수목이 있기에 이후 오색약수라 칭하게 되었다. 설악산의 최고봉인 대청봉과 그 남쪽 점봉산 사이의 깊은 골짜기에 있다. 오색천(양양남대천의 지류) 개울가의 한 너럭바위 암반에서 약수가 솟는다. 3개의 구멍에서 솟는데, 위쪽의 약수는 철분이 많고 아래쪽 2개의 구멍은 탄산질이 많다. 하루 용출량은 1,500ℓ 정도이고, 물맛이 특이한 것으로 유명하며, 위장병 ·신경통 ·피부병 ·빈혈 등에 효력이 있고 특히 메밀꽃 피는 가을철에 탁효가 있다고 한다. 약수터에서 온정골 쪽으로 2 km쯤 올라가면 오색온천이 있다.

 

- 점봉산은 식물의 남북방한계선이 만나는 곳

점봉산의 총체적 가치는 이곳이 한반도에서 자라는 식물의 남북방한계선이 만나는 곳이라는 점이다. 북에서 서식하는 바람꽃류가 설악산을 거쳐 이곳에 내려와 있으며 남에서 자라는 모데미풀이 여기서 멈춘다. 목본식물로는 북에서 자라는 이노리나무를 이곳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하늘소의 숙주로도 알려진 서어나무의 경우 설악산과 함께 이곳이 북방한계이다. 남쪽 더서 지방의 난대림 식물을 제외한 대부분의 식물을 이 한곳에서 볼 수 있는 자리이다.

북국의 식물들이 태고로부터 백두대간을 타고 내려오고 남쪽의 친구들이 올라와 한 데 사는 식물들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망대암산] 望對岩山 1236m

인제 동쪽 21km 지점, 양양 서쪽 18km 지점에 있다. 태백산맥 설악산 군봉(群峰) 중의 하나로, 북동쪽에 최고봉인 대청봉, 남쪽에 점봉산, 남서쪽에 시선봉(侍仙峰) 등이 같은 산체 안에 있는 형제봉으로서 삼각형을 이루어 대좌하고 있다. 대청봉 북쪽의 한계령은 남쪽 대관령과 함께 영동·영서 간 교통의 요로이며, 북동 산록에는 오색약수·오색온천이 있어 휴양지로 알려져 있다. 산은 정상이 첨봉(尖峰)이고 망대암과 금표암 등 기암괴석으로 덮여 있다. 소양강과 양양 남대천의 분수령으로서, 사면에서 발원하는 하천이 좁고 긴 협곡과 폭포, 벽담(碧潭)을 이룬 데다 삼림이 울창하여 설악산국립공원의 일부를 이룬다.

점봉산 능선에서 발원한 천이 여신폭, 12폭, 선녀탕등의 명소가 되어 주전골이 오색약수를 경유 남대천으로 유입된다. 주전골 바위굴에서 사전(私錢)을 주조하려고 놋그릇을 부셔 위조주전을 만들다 적발되어 이후로 이곳을 주전골이라 하였다. 망대암산은 이를 감시하던 봉우리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한계령] 寒溪嶺 1004m

강원 인제군 북면(北面) ·기린면과 양양군 서면과의 경계에 있는 고개.

인제~양양 간 국도가 통한다. 설악산국립공원에 속하는 고개로, 영동·영서 지역의 분수령을 이룬다. 옛날에는 소동라령(所東羅嶺) 또는 오색령이라고 했다. 이중환의 택리지 산수총론에 보면 백두대간 여섯령을 소개하는 부분이 있는데, 철령, 추지령, 연수령, 오색령, 대관령, 백봉령이 그것이다. 오색령이 지금의 한계령이다. 동해안 지역과 내륙지방을 잇는 교통의 요지가 되어왔다. 1971년 12월에 양양과 인제를 연결하는 넓은 포장도로가 고개 위로 뚫려 내설악 및 외설악의 천연관광자원 개발에도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

대청봉과 그 남쪽의 점봉산을 잇는 설악산 주능선의 안부이며, 영동지방과 영서지방의 분수령을 이룬다. 과거에는 양양군에 해당하는 산을 설악산이라 하고 인제군에 해당하는 산을 한계산이라 했다. 고개의 이름은 한계산에서 유래했다. 그러나 양양군에서는 오색령. 소동라령(所東羅嶺)이라고도 했으며, 양양군 사람들이 설악산을 넘어서 인제군이나 서울로 갈 때 주로 이용되던 험한 산길이었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이곳에는 산도둑이 들끓어, 해가 지면 이 고개를 넘지 말라는 뜻으로 고개의 길목인 양양군 서면 오가리의 길 옆 바위에 금표라고 새겨두었다. 지금도 그곳에 바위가 있으며, 한계령에 오르는 길에는 금표교가 있다.

남동쪽 사면에서 발원하는 오색천은 많은 지류를 합류하며 계곡과 폭포를 이루고 동해로 유입하는 남대천에 흘러든다. 서북쪽 사면에서 발원하는 물 또한 일대 계곡을 형성하면서 소양강 상류를 이루는 북천으로 흘러든다. 내설악은 산세가 수려하고 계곡이 아름답지만, 내륙 깊숙이 있고 교통이 불편하여 등산객 외에는 찾는 이가 드물었다.

그러나 1971년 한계령을 지나는 44번 국도인 한계령도로가 닦이고, 설악산 및 동해안을 찾는 관광객의 증가에 대비하여 1981년 인제군에서부터 양양군과 속초시까지 이어지는 도로가 확장, 포장됨으로써 설악산의 북쪽으로 돌아 진부령이나 미시령을 넘던 자동차들이 이 고개를 이용하게 되었다.

한계령도로를 따라 옥녀탕·대승폭포·장수대·소승폭포·여심폭포·십이폭포·발폭포·오색온천·오색약수·선녀탕 등의 명승지가 이어지며, 서쪽 기슭 안산의 남쪽 사면에는 한계산성의 일부가 남아 있다. 이 도로는 설악산을 지나기 때문에 주변의 빼어난 경관을 구경할 수 있다. 서울에서 한계령까지는 서울-양평-홍천-인제-한계령 코스와 서울-가평-춘천-홍천-인제-한계령 코스가 있다.

 

 

- 인제 기린면

인제는 본래 오사회(烏斯回)라 부르던 맥국의 땅이었다. 고구려는 저족현(猪足懸)이라 하고 신라가 희제현(蹄縣)이라 부른 것은 생김이 돼지 발굽을 닮은 탓이었고, 오늘날의 인제(麟蹄)란 이름을 얻은 것은 고려 초엽이었으니 돼지보다는 기린이 영물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기린이야 어차피 풍문으로만 듣던 짐승이고 보면 '사슴이 백년 묵어 기린이 된다'는 전설에 기대어 한껏 신비감을 자아낸 이름이다. 내린천이 인제로 흘러오는 길목의 지명은 조선 태종 이래 오늘도 변함없이 기린(麒麟)이다.

 

- 마의태자의 전설이 깃든 한계(寒溪)

인제 읍에서 설악의 들목으로 만나는 원통(元通)은 본래 원통역(圓通驛)이 그 근원인데 언제부터인가 그렇게 이름 내력이 바뀌었다. 사람들이 오가며 흔히 우스갯소리로,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살겠네'라고 한다. 어떤 이는 한 임금이 설악에 파천(播遷)하여 도성으로 차사를 띄울 적에 매양 돌아오지 않으므로 생겨난 말이라 하나

 

 

그리 따를 만한 전설은 아니다. 일설에는 첩첩산중 휴전선 근처로 배속받은 군인들 사이에서 생겨난 말이라고도 한다.

명산이란 본래 유람에나 좋은 땅이지 터를 두고 살기에는 불편한 곳이다. 탈속의 나그네야 더없이 즐거운 설악의 풍광이지만 생계를 작정으로 산중에 깃든 민생들의 호구지책이야 논밭 한 뙈기가 마뜩찮은 명승을 어디에 쓰겠는가. 그렇듯 사는 일이 내내 고단하였지만 그래도 명산 그늘이라고 한껏 멋을 부린 이름이 바로 한계 마을이다. 한계는 풍진 영화를 한낮 베옷 품에 감추고 세속를 떠나던 마의태자의 전설이 곳곳에 서린 곳이다. 「신라김씨대종원」의 기록에는 '태자 일행이 서울을 떠난 것은 935년 10월 하순이고, 한계에 닿은 것은 살을 에는 추위와 눈보라 몰아치는 혹독한 겨울이었다'고 한다.

 

한계령 길과 미시령 길은 한계리 재내(瓦川) 마을에서 갈린다. 옛날에 기와를 구워 사람들이 줄지어 날랐다는 내력으로 얻은 이름이다. 재내에 사는 홍기주(65)옹은 내설악의 고갯길과 더불어 늙어온 사람이다. 지금의 한계령이야 소문도 부산한 관광길이 되었지만 그의 어린 시절에는 그저 사람 하나 걷기에 맞춤한 잎새 우거진 오솔길이었다. 1971년, 군장비로 고갯길을 뚫고 한계의 지명을 따라 새로 붙였다는 한계령의 이름에 대하여 물었더니, "웬걸, 우리 에려서 왜정 때두 그렇게 부른 걸" 하면서 고개를 젓는다.

 

- 소동라령과 오색령, 그리고 한계령

'왜정 때'도 불렀다는 그 한계령이 좀처럼 옛 글에는 보이질 않는다. 다만 한계는 옛 이름이되 한계령은 그리 오래 묵은 옛 이름이 아닌 탓이다. 한계령의 본명으로 유력하게 들먹이는 이름이 소동라령과 오색령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양양도호부 편에는 소동라령에 대하여, "부 서쪽 60리에 있으며 산줄기가 겹치고 포개져 지세가 험하고 궁벽하다. 예전에는 서울로 통하는 길이었으나 지금은 없 어졌다" 하였고, 『증보문헌비고』「여지고」의 양양 편에는 "오색령은 인제의 영로이며 소동라령, 조침령, 구룡령은 모두 강릉으로 통하는 길"이라고 적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이 간행되는 중종 25년(1530년) 무렵은 소동라령이란 이름으로 부르던 한계령 길이 너무 험하다는 이유로 폐하고 이미 미시령 길을 새로 개척한 다음이다. 조선시대 초엽까지 한양 길로 삼았던 소동라령이 풀숲에 묻히면서 점차 그 쓰임새를 잃고 마는 것이다. 다만 같은 책에 실린 남대천의 설명으로 "강릉부 오대산에서 나오며 소동라령의 물과 합쳐 부의 남쪽으로 바다에 들어 간다"는 대목을 보면 적어도 소동라령이 지금의 한계령 길을 의미하고 있음은 뚜렷한 사실로 보인다. 훗날 『동국여지승람』의 근간이 되는 『세종실록지리지』 (1454년) 양양도호부 편 역시 소동라령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이전의 문헌이 오직 소동라령을 고집하는 반면, 조선시대 말엽에 간행되는 문헌에는 오색령의 출현이 두드러진다. 『여지도서』(1760년), 『대동여지도』(1861년), 『증보문헌비고』(1908) 같은 기록에는 모두 한계령을 오색령으로 표기하고 있다. 짐작컨대, 이는 분명 오색약수를 비롯한 명승을 탐방 하는 길과 관련된 이름일 터이다.

 

 

 

 

 

이미 오래 전에 흔적을 잃은 소동라령의 존재는 잊혀지고 남설악으로 통하는 고갯길에 대한 새 이름으로 오색령이 등장한 것이다. 다만 오색령과 소동라령이 더불어 쓰인 『증보문헌비고』의 기록은 얼핏 신뢰성을 잃고 있다. 왜냐하면, "소동라령, 조침령, 구룡령은 모두 강릉으로 통하 는 길"이라고 쓴 것은 틀림없이 어림에 의한 오기(誤記)이기 때문이다.

 

- 다섯 빛깔 전설의 땅, 오색(五色)

한계령이라 부르니 그저 서운한 땅이 바로 남설악의 오색이다. 소동라령을 한양 길로 삼았던 시절에는 오색역(五色驛)이 있었다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이미 '지금은 없어졌다'는 간략한 기록으로 남는다. 역로는 비록 끊어졌지만 남설악의 절경에 앞장을 서는 오색의 명성이 사람 발길을 끊임없이 불러들여 예나 지금 이나 인파가 모박이를 하는 곳이다. 호사스런 건물을 줄지어 지어놓고 아예 마을 하나가 몽땅 관광으로 밥을 먹고 산다.

 

오색에서는 그저 모든 것이 다섯이다. 신통하게도 골물이 흐르는 골짜기 너럭바위에서 솟아나는 오색약수 역시 그 맛이 다섯이라 하고, 보물 제 497호 삼층석탑 이 남아 있는 성국사터의 다른 이름 또한 돌빛마저 다섯 빛깔을 낸다하여 오색 석사(五色石寺)다. '다섯 전설'의 백미는 뭐니뭐니해도 다섯 빛깔의 꽃이 핀다는 오색화(五色花) 전설이다. 오색이란 마을 이름도 다섯 빛깔의 꽃이 피는 나무가 있어 생겨났다는 이야기가 거의 정설이 되었다. 구체적으로는 1937년 양양의 전 재우 군수가 세 빛깔의 꽃이 피는 나무를 옮겨 심었다는 기록이 전하고, 해방 무렵까지도 지금의 관터 마을 앞의 길턱에 있었던 세 빛깔의 꽃이 피는 나무를 보았다는 사람은 아직도 곳곳에 흔하다.

 

 

 

 

 

- 한계령을 둘러싼 이야기들

한계령 길은 언제부터 사람이 다니기 시작했을까. 구석기, 신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하였던 양양인만큼 아주 오래전부터 한계령 길이 나 있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문헌상으로는 <고려사>에 기록된 것이 최초인 듯싶다. <고려사>의 기록에 의하면, 고려 고종 44년 당시 몽고군은 철원, 춘주(현 춘천), 인제를 거쳐 한계령을 넘어 양양으로 진격한 것으로 나와 있다. 당시 춘주성의 항복소식을 듣고 인제 지역 백성들이 한계령을 넘어 양양으로 피난했다는 얘기도 있다. 그러한 한계령이 조선 초기에는 험하다는 이유로 폐쇄되었다.

1400년대에서 1500년대 사이에 간행된 동국여지승람 양양도호부편에서는 한계령을 ‘부 서쪽 60리에 있으며 겹쳐지고 포개진 산맥에 지세가 험하고 궁벽지다. 예전에는 서울로 통하는 길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라고 적고 있다.

 

 

즉, 동국여지승람이 완성된 1481년 이전에 한계령 길을 폐쇄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그 사유는 증보문헌비고에 나와 있다. 증보문헌비고 중 미시령을 설명한 부분을 보면 ‘조선 성종조에 양양부의 소동라령(所冬羅嶺, 현 한계령)이 험액(險?)이라고 하여 다시 이 길을 열었다’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폐쇄했다고 해서 전혀 사람이 다니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1750년 씌여진 것으로 보이는 <택리지>에서 이중환은 백두대간 강원도 지역의 령 여섯 개 중 하나로 오색령(현 한계령)을 손꼽았으니, 험하다 해서 다니지 않았던 것은 조선 왕실과 양반 사대부일 뿐, 민초들은 1971년 현재의 한계령 포장도로가 완성되기 전까지는 한계령 오솔길을 통해 백두대간을 넘나들었다.

현재의 한계령 도로는 1968년 김재규가 사단장으로 있던 1102 야전 공병단에서 착공하여 1971년 완공하였다. 한계령 도로의 완공을 기념하여 한계령 108계단 위에 있는 설악루라는 정자 옆에 공덕비를 만들었으며 “설악루”라는 현판은 김재규 당시 사단장이 직접 썼다고 하며, 현재까지 전해온다.

 

이러한 한계령이 더욱 유명해진 것은 아마 양희은씨가 1985년에 발표한 노래 “한계령” 때문일 것이다. 계간 <시인세계>에서 2004년 봄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글 짓는 문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곡 중 5위에 뽑힐 정도로 가사가 시적이며 서정적인 선율을 지니고 있는 노래 “한계령”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계령의 옛 이름을 찾아서

"소동라所東羅, 그녀의 이름이었다. 서른 하나, 그녀의 나이였다. 현수(絃首, 코머리), 그것은 그녀의 신분이었다. 양양 고을의 관기, 그리고 그 우두머리. '천첩의 기명을 소동라령(현 한계령)에서 딴 것은 실로 외람된 바가 적지 않사온데, 여짜오면 내륙의 길손은 원통역으로부터 반드시 소동라령을 넘어야만 비로소 설악에 이를 수가 있사옵고, 또 설악을 거쳐서 본읍에 당도하셔도 마땅히 천첩의 수발을 넘어야만 마침내 양양을 보았다고 하리라 하여 기명으로 정했던 터입니다. 하오나 나리께서는 바야흐로 천첩의 시험을 넘으신 듯하옵기에 감히 아뢰오니다.'"

소설가 이문구 선생이 쓴 <매월당 김시습>의 한 장면이다. 물론 양양 고을의 기생으로 나오는 소동라는 허구의 인물이지만, 김시습과 수작하는 기생의 이름으로 한계령의 옛 지명인 “소동라”를 붙이고, ‘소동라령을 넘어야만 양양과 설악에 다다를 수 있고, 소동라의 수발을 넘어야만 마침내 양양을 보았다’고 한 작가의 상상력에 감탄을 금할 수가 없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것처럼 김시습이 살았던 15세기에는 한계령을 “소동라령(所冬羅嶺)”이라 하였다. 문헌상 가장 최초로 등장하는 한계령에 관한 지명은 세종실록지리지(1454년)의 “소등라령(所等羅嶺)”이다. 소등라령을 국역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바드라재’

로 번역하였다. 속초여고 주상훈 교사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 고개의 원래 이름은 '바드라'였다. 이 바드라를 세종실록 지리지에서 이두식으로 소등라(所等羅)라고 표기하였다가, 그 후 조선시대 읍지류에서 발음상 편한 소동라(所冬羅)로 바뀐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조선시대 후기 문헌인 택리지, 대동여지도, 증보문헌비고 등에서는 전부 한계령을 ‘오색령’으로 부르고 있다. 현재와 같이 한계령으로 명명된 것은 1968년 공병부대가 한계령 도로공사를 인제쪽에서부터 시작하다 보니 인제군 한계리의 이름을 따 한계령이라 하였다.

 

-한계령(寒溪嶺)은 한계령(限界嶺)인가?

많은 문인들이 한계령을 삶의 한계 또는 그만이 가지고 있는 무언가의 한계라는 의미로 읽으며 그 한계를 깨닫거나 혹은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을 담은 시, 산문, 소설을 남기고 있다. 즉, 차디찬 계곡이라는 뜻의 한계령(寒溪嶺)을 넘지 못하는 일정한 범위라는 뜻의 한계령(限界嶺)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한 작품들 중에 '한계령을 위한 연가'(문정희 시)는 오히려 한계령의 한계에 묶이길 원하는 유일한 작품일 것이며, 한계령에 관한 시 중 가장 알려진 시이다.

 

한계령을 위한 연가

 

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뉴스는 다투어 수십 년 만의 풍요를 알리고

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

제 구멍들을 찾아가느라 법석이지만

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긴 척 기꺼이 묶였으면.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면 풍요는

조금씩 공포로 변하고, 현실은

두려움의 색채를 드리우기 시작하지만

헬리콥터가 나타났을 때에도

나는 결코 손을 흔들지는 않으리.

 

헬리콥터가 눈 속에 갇힌 야생조들과

짐승들을 위해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시퍼렇게 살아 있는 젊은 심장을 향해

까아만 포탄을 뿌려 대던 헬리콥터들이

고란이나 꿩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자비롭게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나는 결코 옷자락을 보이지 않으리.

 

-한국건축가협회 대상 수상작 '한계령휴게소'

한계령에 가면 누구나 한 번쯤 들르는 곳이 한계령휴게소이다. 거대한 자연을 억누르지 않고 자연 속에 부드럽게 안겨 있는 건축물, 혹여 한계령과 설악의 경치를 보고자 하는 이들의 눈길을 현혹시킬까 두려워 온통 검정으로만 칠해져 있는 외관, 남설악에 대한 탁월한 전망을 제시하는 휴게소 테라스 등 한계령휴게소는 겸손의 미학을 지니고 있는 건축물이다. 그럼으로써 가장 훌륭하게 자연과 어우러져 있으며, 미시령휴게소나 대관령휴게소와 비교해 생각해보면 더욱 한계령휴게소가 자연친화적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 한계령휴게소는 미국의 <타임> 지에서 ‘한국의 가장 경탄할 만한 훌륭한 건축가’라고 평한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건축물이다. 이 땅에 현대건축의 기틀을 마련함과 동시에 건축도 예술임을 증명한 김수근 선생은 건축을 빛과 벽돌이 짓는 '시'라 여겼다. 한계령휴게소는 창암장과 더불어 김수근 선생의 건축작품 중 자연과 가장 어우러진 건축물로 꼽힌다. <김수근 건축론>을 쓴 정인하 교수는 한계령휴게소의 설계와 건물구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한계령휴게소는 한계령의 정취를 방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기존의 지형을 변형시키지 않으면서 건물이 자연스럽게 대지에 삽입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또한 한계령에서 보이는 설악산의 장엄한 환경을 조망할 수 있도록 건물 내에서 어디서나 바깥을 감상할 수 있도록 건물을 충분히 개방하고, 테라스를 길게 뽑았다. 또한 폭설과 강풍, 추위에 견딜수 있도록 외부는 목조로 처리하되, 실제 구조는 철골조로 시공되었다.' 이러한 작품성이 인정되어 한계령휴게소는 1982년 한국건축가협회 대상을 수상하였다.양양과 남설악으로의 전망을 훌륭하게 제공하는 한계령휴게소 덕분에 지금도 많은 관광객들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주차장 옆 울타리로 달려가 한계령의 전망을 마음껏 만끽하고 있는 것이다.

 

-내륙지방과 양양을 잇는 한계령

백두대간은 옛날부터 강원도의 동서 교통에 큰 장애가 되어 영동과 영서의 문화, 풍속, 기후, 인심, 산수, 역사를 갈라 놓았다. 그러나 이 큰 산맥에도 곳곳에 말안장처럼 잘록한 곳이 있어 이 고개들로 그 동쪽 사람들과 그 서쪽 사람들이 넘나들었다. 령(嶺)이란 한자를 풀이하면 잇닿은 산의 능선을 뜻하며, 택리지에서는 “등마루 산줄기가 조금 나지막하고 평평한 곳을 말한다. 이런 곳에다 길을 내어 영 동쪽과 통한다”고 하였다. 이 고개들을 살펴보면 철령, 추치령, 오소령, 건봉령, 진부령, 대간령, 미시령, 한계령, 대관령들이다.

 

 

 

그 중 한계령은 고려시대부터 있었던 도로망이었던 서울에서 경기도 청평과 가평을 거쳐 강원도 춘천, 화천, 양구, 인제, 홍천을 도는 ‘춘주도’와 양양을 잇는 주요 고개이다. 양양을 여행하기 위해서는 한계령, 구룡령을 넘거나, 대관령을 넘어 강릉으로 들어오거나, 아니면 저 멀리 경상도 동해안에서부터 7번 국도를 따라 올라와야 한다.

양양으로 넘어가는 령중 첫 번째로 꼽히는 한계령을 넘기 위해서는 춘천, 홍천에서 44번 국도를 따라 와야 한다. 미시령 길과 한계령 길이 갈리는 인제 재내에서 오른쪽으로 돌면 자동차조차도 숨을 몰아쉬는 가파르고 꾸불꾸불한 한계령 길이 시작된다.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한계령 정상에 도착하면 비로소 ‘산수가 천하의 으뜸(山水甲天下)’이라는 양양에 도착한 것이고, 한계령을 넘어야만 양양을 볼 수 있다.

한계령은 강원도 인제군 북면과 양양군 서면 사이에 있는 고개로 높이가 1004m이다. 백두대간의 설악산(1708m)과 점봉산(點鳳山, 1424m)과의 안부(鞍部: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의 우묵한 곳)에 있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백두대간 강원도 지역의 이름난 령 여섯 개를 손꼽았다. 함경도와 강원도 경계의 "철령", 그 아래의 "추지령", 금강산의 "연수령", 설악산의 "오색령"(현재의 한계령)과 그 아래의 "대관령", "백봉령"이 있다. 이 중에서도 가장 으뜸으로 꼽는 령이 바로 한계령이다.

 

한계령에 서서 보면 좌우로는 동해를 향해 내달리던 바위들이 멈추어 선 채 한계령을 둘러싸고 하늘을 치받듯 우뚝 솟아 있으며, 백두대간의 산줄기와 골 깊은 계곡들과 낮게 깔린 운해들이 어우러져 만드는 풍경은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의 진수를 느낄 수 있게 한다.

“아, 한계령 정상은 참으로 장엄하였다. 어느 날에도 거기 으레 저 아래 두고 온 풍진 사바가 한낱 티끌처럼 사람의 정한을 추억하여 무엇하겠는가. 하늘도 땅도 때로는 저렇게 경계를 허물어 본래 세상의 모든 있음과 없음이 다 거짓임을 법문하는구나. 생각해 보면, ‘나’를 버리고 ‘너’를 따라 헤매던 날들 도무지 부질없어라. 이제 알았다고 ‘나’는 또 저 눈보라 속에 던져두고 빈 그림자 ‘너’를 따라 슬금슬금 집으로 돌아가는 ‘나’의 한계령아!” - 김하돈 시인의 글 중

 

 

 

◆[끝청]1604m

끝청봉은 설악산 중청봉 서쪽에서 이어지는 서북주릉상에 위치한 봉우리이다. 동쪽으로 대청봉과 중청봉, 소청봉으로 이어지는 주봉을 조망할 수 있고 서쪽으로는 끊임없이 길게 이어지는 서북주릉을 바라볼 수 있다. 서북주릉의 능선이 완만하게 이어지다가 끝청봉 직전에서 가파른 경사가 시작되는데 이곳만 지나면 중청봉까지는 완만한 경사로 이어진다.

 

 

 

◆[중청] 1676m

설악산의 제2봉으로 지리적으로는 북쪽으로는 주봉인 대청봉, 남쪽으로는 소청봉, 서쪽으로는 끝청봉과 각각 이어지고, 동쪽으로는 동해를 마주보고 있다. 대청봉과 중청봉 사이에 현재 중청대피소가 있다.

 

 

◆[대청봉] 大靑峰 1707.9m

강원도 양양군 서면 오색리에 있는 설악산의 최고봉. 남한에서는 한라산, 지리산에 이어 세번째로 높은 봉우리다. 정상은 심한 기온차와, 낮은 온도를 비롯해 강한 바람이 불기 때문에 눈잣나무 군락이 낮게 자라 있어 설악산국립공원과 동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태백산맥에서 가장 높고 남한에서는 한라산(1,950m), 지리산(1,915m)에 이어 세번째로 높다. 예전에는 청봉(靑峰)·봉정(鳳頂)이라 했는데, 청봉은 창산(昌山) 성해응(成海應)이 지은 《동국명산기(東國名山記)》에서 유래되었다고도 하고, 봉우리가 푸르게 보인다는 데에서 유래되었다고도 한다. 공룡릉·화채릉·서북릉 등 설악산의 주요 능선의 출발점으로 내설악·외설악의 분기점이 되며, 천불동계곡·가야동계곡 등 설악산에 있는 대부분의 계곡이 이 곳에서 발원한다. 인근에 중청봉·소청봉이 있다.

정상은 일출과 낙조로 유명하며, 기상 변화가 심하고 강한 바람과 낮은 온도 때문에 눈잣나무 군락이 융단처럼 낮게 자라 국립공원 전체와 동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늦가을부터 늦봄까지 눈으로 덮여 있고, 6, 7월이면 진달래·철쭉·벚꽃으로 뒤덮이며, '요산요수'라는 글귀가 새겨진 바위와 대청봉 표지석이 있다.

 

이전에는 정상에 제단이 설치되어 제단 가운데에 설악상봉국사천왕불신지위(雪嶽上峰國司天王佛神之位), 좌측에 팔도산신중도신령(八道山神中道神靈), 우측에 설악산신령(雪嶽山神靈), 위패를 모셨으나 지금은 사라지고 대청봉이라 음각된 자연석표시석만 남아있다.

 

 

 

- 봉정암 鳳頂庵

한국에서 가장 높은 곳(1,244m)에 위치하는 암자로서 신라 선덕여왕 12년에 자장율사가 창건했다. 봉정암은 조계종 신흥사의 말사인 백담사 부속암자로 대표적 불교성지인 五大寂滅寶宮 가운데 하나로 불교도들의 순례지로 유명하다. 해발 1,244m에 봉황이 알을 품은 듯한 형국의 산세에 정좌하고 있는 암자로 거대한 바위를 중심으로 가섭봉·아난봉·기린봉·할미봉·독성봉·나한봉·산신봉이 감싸고 있다. 현존하는 전당은 법당과 요사뿐이다. 법당 옆 바위 위에는 강원도유형문화재 31인 봉정암석가사리탑이 있다. 고려시대 양식을 따른 이 오층석탑은 부처의 뇌사리를 봉안하였다고 하여 ‘불뇌보탑’이라고도 부른다. 643년(선덕여왕12) 慈藏이 唐나라에서 가져온 부처의 진신사리와 금란가사를 봉안하여 창건하였다.

 

 

 

◆[설악산] 1708m

신성하고 숭고한 산이라는 뜻에서 예로부터 설산(雪山)·설봉산(雪峰山)·설화산(雪華山)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렸고, 금강산(1,638m)을 서리뫼[霜嶽]라고 한 것과 관련해 우리말로 설뫼[雪嶽]라고도 하였다. 남한에서는 한라산(1,950m)·지리산(1,915m)에 이어 세 번째로 높은 산이다. 백두대간의 중심부에 있으며, 북쪽으로는 향로봉·금강산, 남쪽으로는 점봉산·오대산과 마주한다. 최고봉은 대청봉이다. 대청봉 남쪽에 한계령, 북쪽에 마등령·미시령 등의 고개가 있다.

백두대간의 한계령-공룡능선-미시령을 중심으로 서쪽 인제군에 속하는 지역을 내설악, 동쪽 속초지역을 외설악으로 나누는데, 남설악이라 하여 오색지구를 추가하기도 한다. 내설악에는 미시령·대청봉·한계령을 수원지로 하여 소양강·북한강으로 이어지는 계곡이 발달했다.

내설악의 명승지로는 647년(신라 진덕여왕 1)에 창건된 고찰 백담사(百潭寺)를 비롯해 대승(大勝)·와룡(臥龍)·유달·쌍폭(雙瀑) 등의 폭포, 수렴동(水簾洞)·가야동(伽倻洞)·구곡담(九曲潭) 등의 계곡과 옥녀탕(玉女湯) 등 이름난 곳이 많다. 외설악은 대청봉에서 동쪽으로 뻗은 능선을 경계로 북외설악과 남외설악으로 나뉜다. 관모산(冠帽山:874m)·천불동계곡·울산바위·권금성(權金城)·금강굴 외에 비룡폭포·토왕성폭포·귀면암(鬼面巖)·와선대(臥仙臺)·비선대(飛仙臺) 등 기암괴석과 계곡이 절경을 이룬다.

식생 분포도 다양해 온대 중부지방의 대표적인 원시림 지역으로 꼽힌다. 특히 대청봉에 군락을 이루어 자라는 눈잣나무와 눈주목은 남한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북방계 고산식물이다.

그 밖에 소나무·벚나무·개박달나무·신갈나무·굴참나무·떡갈나무·눈측백·금강초롱꽃·금강분취 등 총 882종의 관다발식물이 분포하며 이 가운데 65종이 특산식물, 56종이 희귀식물이다.

동물은 사향노루·산양·곰·하늘다람쥐·여우·수달 등 희귀종을 포함하여 총 39종의 포유류와 62종의 조류 및 각종 파충류·양서류·어류·곤충 등이 서식한다. 1965년 천연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다가 1970년 3월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한국에서는 처음으로 1982년 8월 유네스코의 '생물권보존지역'으로 지정되는 등 한국뿐 아니라 세계적인 보존지역·관광지로 이름이 높다.

 

 

- 50년대 말부터 주목받기 시작한 산

동국여지승람의 양양도호부편에 "설악은 부의 서북쪽 50리에 있는 진산이며 매우 높고 가파르다. 8월에 눈이 내리기시작하며 여름이 되어야 녹는 까닭으로 이렇게 이름 지었다."라고 짤막하게 기록되어 있다. 조선조 때에는 거의 주목받지 못한 산이었다. 인제현편에는 오늘의 장수대 부근을 묘사한 것으로 보이는 글귀가 수록되어 있다. "한계산. 현의 동쪽 50리에 있다. 산위에 성이 있다(한계고성을 말함). 냇물이 성안으로부터 흘러나와서 곧 폭포를 이루어 내려가니 흐름이 수백척의 높이에 달려있으므로 바라보면 흰무지개가 하늘에서 드리워진 것 같다.(대승폭을 말하는듯) 원통역으로부터 동쪽은 좌우쪽이 다 큰 산이어서(서북릉과 가리봉을 말함) 동부가 깊숙하고 산골물은 가로세로 흘러서 건너는 것이 무려 36번이나 된다(한계천과 자양천을 말함). 소나무와 잣나무가 모두 높아서 그 꼭대기를 볼 수 없다. (오늘날에도 이런 나무들이 많이 남아있다). 또 그 남쪽에는 봉우리가 절벽을 이루었는데 그 높이가 천길이나 되어서 기괴하기가 형언할 수 없다(하늘벽을 말함)"는 기록이 보인다.

이와같이 금강산에 비해 알려진 것이 별로 없는 설악산이 우리의 레저문화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50년대 말부터이다. 지금 설악산은 국내등산과 레저를 운위할 때면 필수적으로 등장하는 키워드이며 연간 수백만명이 계곡과 능선, 암벽과 빙폭을 누비는 레저활동의 메카가 되었다. 레저를 알며 즐기는 연령층의 대부분은 일출이라면 대청봉, 빙폭이라면 토왕성, 암릉종주라면 공룡과 용아장성, 능선종주라면 미시령에서 한계령에 이르는 백두대간, 안산에서 대청에 이르는 서북능선을 떠올린다. 폭포와 소라면 대승폭과 12선녀탕, 계곡산행이라면 내설악 구곡담, 가야동, 암벽산행이라면 천화대, 눈사태라면 설악을 떠올린다. 4계절 어느 때 찾아도 찾는 이에게 깔끔하면서도 장중한, 그러면서도 때로는 무자비한 설악산의 얼굴은 다양하기만 하다.

 

- 설악의 8기

 

* 천후지동(天侯地動) - 하절기면 비가 많이 내려 뇌성이 일어나고 번갯불이 번쩍거리며 하늘이 온통 찢어지듯 울부짖고 땅이 갈라지듯 지축이 흔들리는 소리의 신비와 울림의 기이로움.

 

* 거암동석(巨岩動石) - 흔들바위와 같은 거암괴석이 움직이는 신기로움

 

* 백두구혈(百斗毆穴) - 북면 용대리 외가평에서 백담사로 가는 백담계곡에 하식작용에 의해 구휼을 형성하고 있어 학이 날아간 흔적이라 불리우기도 하는 구휼의 기이함

 

* 전석동혈(轉石洞穴) - 외설악의 계조암은 대표적인 전석동혈로 바위와 바위가 서로 맞대고 있어 하나의 자연동굴을 이루고 있는 신비로움

 

* 수직절리(垂稙節理) - 암질과 구조의 차이에 의한 차별침식의 결과로 이루어져 내설악의 12선녀탕, 하늘벽과 같이 험준한 지형과 외설악의 천불동계곡등, 모두 신비롭고 다양한 절리에 천태만상의 형상

 

* 유다탕폭(有多湯瀑) - 12선녀탕과 같이 쏟아지는 물에 반석이 패여 큰 바위획이된 탕의 기이함

 

* 금강유혈(金剛有穴) - 비로봉의 금강굴과 큰석산에 구멍이 생긴 기이함

 

* 동계설경(冬季雪景) - 겨울철에 눈이 많이 내리면 쌓이고 쌓여 11월부터 3월까지 백설이 만연하다.  

 

- 설악의 8경

 

* 용비승천(龍飛昇天)

한국 3대폭포의 하나이며 최장인 대승폭포를 비롯하여 쌍폭, 소승폭포,비룡폭포, 토왕성폭포, 육담폭포, 오련폭포, 천당폭,독주폭포등은 설악산의 대표적인 폭포로 물줄기가 낙하하고 무지개가 발생하니 마치 용이 승천하는것 같이 황홀하며 낙하하는 것이 아니라 역승하는 듯한 선경이 장관이다.

 

* 설악무해(雪嶽霧海)

하절기이면 산봉우리마다 구름에 덮이고 안개에 쌓여 구름위에 솟아있는 대청봉의 풍경은 참으로 장관이며 또한 안개속에 잠겨있는 설악의 골짝은 무해로 변하니 산봉우리에 앉으면 구름의 흐름이 선경을 방불케해 그 조화는 8경중 제일이다.

 

* 칠색유홍(七色有紅)

겨울철에 쉬지 않고 낙하하는 폭포수에 햇살이 반사되어 비수에는 영롱한 무지개가 발생하고 또한 바람이 불면 하늘거리며 이동하는 모습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장관이다.

 

* 홍해황엽(紅海黃葉)

만산에 단풍이 들고 나뭇가지마다 누런 잎에 쌓여 골짜기마다 금수강산이며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는 선경이다.

 

* 춘만척촉(春滿擲蜀)

대청봉 남측에 발달한 진달래와 철쭉군락을 비롯하여 백화가 온 산을 덮어서 4월에서 7월이면 꽃들이 만발하여 가득하니 상상 할 수 없는 진경이며 비길때 없는 풍경이고 행인의 눈을 어리게 한다.

 

* 월야선봉(月夜仙峰)

가을 밤하늘이 밝을때 둥근달이 중천에 뜨면 기암괴석의 모습이 난무하는 선녀같이 보이는 절경은 설악팔경에 빼놓을 수 없는 야경이다.

 

* 만산향훈(滿山香薰)

춘삼월부터 산천초목이 소생하면 그윽한 향기가 산에 충만하며 바람이 불면 향긋한 냄새가 가슴속 깊이 스며들며 코를 찌르는데 특히 대청봉, 화채봉, 오색계곡에 발생하는 눈향나무 숲을 지나면 눈으로 보는 풍경도 좋고 여흥을 돋구어 준다.

 

* 개화설경(開花雪景)

겨울철이 오면 온산이 흰색으로 물드는데 나무나 기암절벽에 눈이 쌓이면 온갖 형태의 눈꽃이 피어 절경을 이룬다.

 

 

◆[소청봉] 1,633m

설악산의 주봉인 대청봉과 중청봉의 남쪽에 위치한 봉우리로 실제로는 봉우리가 아닌 중청봉이 끝나는 지점의 언덕이다. 속초시 설악동쪽에서 시작되는 천불동계곡 등산로와 인제군 용대리에서 시작되는 백담계곡 등산로가 만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용아장성] 龍牙長城

봉정암 사리탑을 기점으로, 동으로는 가야동 계곡과 만경대, 공룡능선을 거느리고 서로는 수렴동, 구곡담 계곡을 끼고 서북 주릉이 장대하게 펼쳐져 있다. 내설악의 그 중심에 자리한 용아장성은 20여 개의 크고 작은 암봉들이 용의 송곳니처럼 솟아 있다.

용아란, 용의 이빨처럼 날카로운 암봉들이 연이어 성처럼 길게 둘러쳐있다는 뜻이다. 이처럼 용아장성은 험하고 날카로운 산세로 인해 숙련된 클라이머들만이 만끽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계절에 관계없이 위험지역으로 분류되어 항상 출입금지구역이다.

 

 

 

[희운각]喜雲閣

양폭산장에서 대청봉으로 오르는 길의 중간지점이자, 무너미고개 바로 위에 위치한다. 원래는 고작 30명이 묵을 수 있는 조그마한 대피소였으며 그후 신관을 지어 70명까지 수용할 수 있었다. 내설악과 외설악을 연결하는 지점에 있으므로 설악을 등반하는 애호가들에게 매우 중요한 시설이다. 옛 희운각 산장은 산악인 희운 김태묵 씨가 사재를 털어 지은 곳이었는데, 지금은 국립공원에서 현대식 시설로 다시 지었다.

 

 

◆[무너미고개] 1060m

무너미고개는 ‘물 나눌 고개’의 우리말이라 한다. 물을 나누다, 물을 가르다.

물이 산을 넘지 못한다는 산자분수령에 의해 청봉에서 같은 빗물로 태어났지만, 이들의 운명은 정반대의 길을 간다. 용아장성을 감싸든 가야동 계곡과, 천불동 계곡을 나누는 무너미고개. 각자 서해와 동해로 흘러간다.

 

 

◆[공룡능선] 1708m

나한봉-큰새령-1275봉-범봉(천화대)-신선대까지의 구간을 말한다.

공룡능선은 외설악과 내설악을 남북으로 가르는 설악산의 대표적인 능선으로, 그 생긴 모습이 공룡이 용솟음치는 것처럼 힘차고 장쾌하게 보인다 하여 공룡릉(恐龍稜)이라 불린다. 공룡릉은 보통 마등령에서부터 희운각대피소 앞 무너미고개까지의 능선구간을 가리킨다. 속초시와 인제군의 경계이기도 하다.

옛 문헌을 보면 지금의 대청봉이 있는 양양, 속초의 산만을 `설악'이라 제한하였고 귀때기청봉이 있는 인제쪽의 산을 `한계산'이라 따로 지칭했다. 그 예로 안산 남쪽 장수대 부근에 있는 한계산성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진부령에서 대청봉까지 이어지는 북주능의 백미는 뭐니뭐니 해도 수많은 암봉들로 구성된 공룡능선인데 이 코스가 바로 북주능의 등뼈 역할을 하는 공룡능선을 가장 짧은 시간에 주파할 수 있는 길이다. 이 능선은 1963년 겨울, 당시 한국의 암벽등반 선구자이던 선우증옥, 정규현, 채태웅씨 등이 처음으로 완등한 이후 산악인들로부터 각광을 받다가 최근엔 일반인들도 쉽게 할 수 있을 만큼 등산로가 잘 닦여있다.

 

-설악산 동식물

설악산 일원의 생물상은 기후와 특성에 따라 내설악과 외설악이 각기 다른 생태계를 이루고 있다. 내설악은 내륙성 기후로 완만한 경사와 두터운 토양층으로 이뤄져 숲이 무성하고 동물의 서식이 풍부한 반면 외설악은 해양성 기후로 지세가 급경사를 이루고 탐방 객의 발길이 찾아 동물의 서식이 적은 편이다. 동물은 총 1,562종의 동물이 서식하고 있으며 이중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것은 다음과 같다.

 

반달 가슴곰(329호), 황조롱이(323호), 사향노루(216호), 붉은배새매(323호), 하늘다람쥐(328호), 산양(217호), 수달(330호), 크낙새(197호), 어름치(259호)

 

* 양서류 - 설악산에는 2목 5과 10종의 양서류가 서식하고 있다. 도룡, 꼬리 치레 도롱뇽,두꺼비, 물두꺼비, 무당개구리, 청개구리, 산개구리, 아무르산 개구리, 옴개구리 등

 

* 파충류 - 설악산에는 도마뱀류가 1과 1속 3종, 뱀류가 2목 4과 8속 10종이 서식하고 있다. 줄장지뱀, 장지뱀, 아무르장지뱀, 대륙유혈목이, 유혈목이, 구렁이, 누룩뱀, 능구렁이, 실뱀, 무자치, 살모사, 까치살모사, 쇠살모사 등

 

* 담수어류 - 설악산 수계에는 총 61종 및 아종이 확인되고 잇다.

 

* 곤충류 - 설악산은 북방계와 남방계의 교차지점으로 1,400여 종의 풍부한 곤충상과 희귀종,특산종 등이 서식하는 것으로 기록되었다.

 

* 식물 분포종은 총 1,013종으로 신갈나무, 소나무, 단풍나무가 가장 많이 분포하며 희귀식물56종, 특산식물 65종이 서식하고 있다.

 

* 희귀식물 - 노란 만병초, 눈측백, 흰싸리 등

 

* 특산식물 - 설악눈무목, 금강초롱, 솜다리 등

 

* 모데미풀 - 미나리 아제비 과에 속하는 한국특산 식물로 5월에 흰색 꽃이 피는 다년초이며 오색약수터에서 점봉산으로 향하는 계곡에서 자라지만 수가 적다.

 

* 연잎꿩의 다리 - 미나리 아제비 과에 속하는 다년초로 잎자루가 잎 뒷면에 붙어 연꽃의 잎 같이 방패모양을 하는 한국식물이다. 화채봉 능선을 따라 바위틈에서 자라고 있다.

* 한계령풀 - 매자나무과에 속하는 2년초로 뿌리가 땅 속 깊이 곧추 들어가고 5월에 황색 꽃이 피며 꽃밑에 사마귀처럼 생긴 포엽이 있는 것이 특색이다. 6월에 구슬같이 열매를 맺으며 월동 준비에 들어가는 조춘식물이다. 점봉산, 한계령에 분포하는 북방인자이다.

 

* 설악눈 주목 - 주목과에 속하는 고산성인 상록관목으로 주목에 유사하나 옆으로 비스듬히 자라고 땅에 닿은 가지에서 뿌리를 내려 포기를 만드는 점이 다르다. 대청봉과 중청봉 사이의 눈잣나무 군락 속에 섞여 산다.

 

* 금강애기나리 - 백함과에 속하는 다년초로 강원도 이남의 심산 정상 가까운 숲속에 나는 한국특산 식물이다. 잎밑이 줄기를 싸고 잎 가장자리에 잔 톱니가 있으며 꽃은 황록색 바탕에 자색 반점이 있고 7~8월에 핀다.

 

 

◆[나한봉]

공룡능선이 시작되는 첫 봉우리다. 정상부는 남북으로 길쭉하게 암릉을 이룬다. 등산로는 누운 향나무의 뿌리들로 빼곡하다. 나한봉 정상에 서면 1275봉과 천화대가 바로 앞에 펼쳐지며 멀리 대청봉과 서북릉이 검푸른 모습으로 하늘과 경계선을 긋는다. 서북릉 앞으로 한줄기 험악한 산자락이 길게 늘어지는데 이것이 용아장성릉이다. 안개에 잠긴 내설악 백담계곡이 거대한 호수가 되어 숨죽이며 출렁인다. 외설악 화채능선의 끄트머리에 암봉군으로 형성된 집선봉을 관찰하기에 가장 좋은 위치다. ‘나한’은 불교용어로 ‘오백나한(五百羅漢)’의 준말이다. 나한봉은 뽀쪽뽀쪽한 모양으로 하늘을 향해 솟은 수많은 (약 500개로 헤아려짐) 봉우리가 좁게는 서쪽 아래에 세워진 오세암을, 넓게는 마귀로부터 사바세계를 지켜준다는 의미로 붙여졌다.

 

 

[금강굴]

미륵봉 금강굴은 자연동굴로 1300여년 전, 원효대사가 수행기도하셨던 곳으로 민중교화승인 원효대사의 대표적인 금강삼매경론의 머리를 따라 금강굴이라 한다. 설악8기중의 하나인 이 곳 금강굴에서는 우리나라의 가장 아름다운 외설악 비경으로 공룡능선과 천화대능선 및 화채능선 사이로 계곡이 펼쳐 보이며, 계곡 양쪽으로 솟은 봉우리들은 각기 모습이 다른 천 분의 부처님 형상을 새겨놓은 듯하여 천불동이라 부른다. 그 외에도 설악의 산악미를 한데 모은 듯한 경승지인 토막골, 만경대, 죽음의 계곡, 칠형제봉, 형제폭포, 유선대, 소청봉, 중천봉, 대청봉이 한눈에 보이며 봉우리 곳곳에 부처님 형상이 펼쳐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예로부터 금강굴에서 부처님께 일념으로 기도드리면 한 가지 소원이 이루어진다 하여 각지각처에서 많은 불자들이 다녀가는 성지다.

 

마고선녀(麻姑仙女)가 하늘로 승천한 곳이라는 비선대 앞에 있는 장군봉(혹은 미륵봉) 중턱 해발 600m 지점의 암벽 한 가운데 있다. 경사가 급해서 굴까지는 곳곳에 설치된 부교와 콘크리트 계단을 이용해야 갈 수 있다. 굴의 크기는 7평쯤 되며, 굴 속의 토기 등 생활용구와 석불좌상으로 보아 고승이 도를 닦던 곳으로 짐작된다. 굴까지 오르면서 내려다 보이는 천불동계곡이 매우 아름답다. 설악 8기중의 하나다.

 

- 금강굴 유래

1. 원효대사가 금강굴에서 수도를 했는데 금강경을 만들었다. 금강경 원문 속에 금강이란 말이 있기 때문에 이 굴을 금강굴이라 했다는 설이 있으나, 금강경을 알기 쉽게 금강소를 지었을 뿐이다.

 

2. 이와 달리 금강(金剛)이란 것을 불교적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금강이란, 이 세상에서 가장 단단하고 진짜 완전한 것이다."

불교에서는 제석천(帝釋天, 관음보살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자기 응신술을 갖는데, 동자 대장의 모습 등 서른 세가지가 있다고 한다)이라는 부처가 짚고 다니는 지팡이를 금강이라 한다. 결국은 관음보살이다. 지팡이는 모든 사악한 잡귀들이 범접하지 못하도록 막아주는 일종의 무기다. 금강굴은 높고 아주 험한 곳에 있어 다른 것들이 접근하기 어려우니, 누가 범접할 수 없는 곳, 진수 중에 진수. 그래서 이곳에서 도를 닦으면 도통할 수 있다 하여 금강이라 한다는 설이 있다.

 

[권금성] 權金城

옛날에 설악산에 權氏와 金氏의 천하장사가 살고 있었다. 그런데 전쟁이 나서 오랑캐들이 쳐들어 왔다. 피난갈 곳을 찾아보니 산속이라 산 위밖에 없어, 산 위로 달아나니 더 이상 갈 데가 없었다. 결국 둘이 의논한 끝에 성을 쌓기로 했다. 그러나 주위에는 큰 돌이 없고 산 아래 강가에 있었다. 그래서 권장사는 밑에서 돌을 던지고 김장사는 위에서 돌을 받기로 하여 며칠만에 성을 쌓았다는 전설이 전한다. 권·김 두 장사가 쌓은 성이라고 해서 그 이름이 권금성이 되었다고 한다. 이 곳에 오르면 외설악의 절경과 동해의 끝없는 바다가 펼쳐져 보인다

설악산의 대표적인 관광지인 권금성이 내성과 외성으로 이뤄진 고려시대 산성인 것으로 확인됐다. 시에 따르면 설악산 케이블카 종착지인 봉화대 주변에 성곽의 일부분만 남은 것으로 알려졌던 권금성 일대가 내성과 외성을 겸비한 총 연장 4,990여m의 대규모 연곽식산성(連郭式山城)인 것이 2008년 7월부터 12월까지 벌인 권금성 학술조사 결과 확인됐다.

권금성의 특징은 산성으로 접근하는 적의 통래를 파악하는데 용이하게 내성의 북벽과 외성의 동·서벽에 작은 망대를 세운 것으로 원주 영원산성, 춘천 삼악산성, 충주 대림산성 등과 유사한 형태를 띠고 있다. 또 축성 시기는 양양 진전사와 낙산사에서 출토된 물고기 문양 기와류 및 비슷한 유물이 다량 발견돼 몽고와 왜구의 침입이 빈번하던 시기에 외적의 약탈을 피하기 위해 축조된 뒤 조선 초기 외적의 침입이 수그러들면서 효용성이 사라져 폐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낙산사 승려였던 익장의 낙산사기에 기록된 고려 고종 40년(1253) 축조설과 일맥상통한다는 것이 시의 설명이다.

 

 

- 권금성과 달맞이꽃 구비 전설

지금으로부터 1,300년 전에 삼국시대 때 고구려 보장왕을 왕으로 올려 놓고 연개소문이 정권을 손아귀에 놓고 정권을 해 가는 무렵이었어요.

그때 당시에 그 권씨, 김씨 양 장군을 역적으로 몰아서 역적으로 몰은 적이 있어 가지고 그럼 그분들이 고구려 역적으로 몰았으니 붙잡히면 죽을 꺼고 그러믄 신라로 도피를 해 가지고 신라에 와서 저 권금성이라고 하는 저 산 꼭대기 해발 860m 정상에 올라 가서 거기서 인제 그 권, 김 양 장군이 두 아들을 데리고 난세를 피하기 위하여 성을 축소하고 난을 피하고, 난세를 피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부하들을 시켜 가지고 저 정구평을 지나면 촛대바위라고 있습니다. 촛대바위라고 하는데 거기는 봉화대, 그 봉화대를 일러서,

"이 골을 수상한 사람이 들어오면 봉화불을 올려라."

그게 전화보담 빠르지요. 그래서 거기 봉화대로 한 때는 불려 오고 그 군량장이라고 하는 데는 군량미를 갖다 저장하고 군량미를 저장해 가지고 그게 인제 권금성으로 쭈욱 올라가고 금강굴에도 그 금강굴이 결과적으로 마적굴이라고 마적굴이야. 마적단이 있는 굴.

그 양양고을 원 이도은씨가 그 원을 할 때 양양 고을을 털어다가 군량미를 갖다 저장해서 권금성을 올리고 금강굴로 옮기고 그러면서 난세를 피하고 그 난을 우리나라에 들어와, 권금성에서 난을 피했다고들 합니다.

그때 당시에 그 내려오는 전설이지만 그 권장군이라는 그 장군은 그 부근에 그 막사 부근에 어느 여인이 나타나서 낮에는 나타나지 않고 밤에만 나타나서 이렇게 뱅뱅 돌고 돌아댕겨. 권금성으로 돌아 댕기면서 그 사랑을, 마음의 사랑을 하면서 돌아 댕기는데. 그 낮에는 어디 풀 속에 숨었다가 밤에는 저녁마다 그렇게 아주 쉴새없이 매일 빠짐없이 비가 오나 그저 언제든지 이래 돌아 댕기다가 결과적으로 지쳐 가지고 그래 그 이튿날 아침에 그 부하들이 와서 대장한테 문안 드릴려고 와 보니 웬 여인이 하나 죽었거든. 그 여인은, 대장이 하는 말이, "그 여인은 저 풀 속에다 갖다 묻어라." 그 여인을 풀 속에다 갖다 묻었는데 그 묻은 자리에서 웬 풀씨가 나와 거름이 되어 잘 커 올라오더니 꽃이 밤에 피었다가 낮에는 지며 노란 꽃이었습니다. 그것이 오늘날에 와서 달맞이꽃이라고 해서 달맞이 꽃은 낮에는 피지 않고 밤에 피어가지고 밤새도록 반기다가 낮에는 시들어지는 게 달맞이 꽃이, 그래서 달맞이 꽃이 생겼다고 합니다.

 

 

 

[비선대]飛仙臺

설악산을 가장 대표하는 곳이라면 서슴지 않고, 천불동계곡을 꼽을 수 있다. 설악의 모든 절경이 이 천불동 안에 모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천불동계곡은 설악동에서 와선대, 비선대, 양폭산장을 거쳐서 죽음의 계곡 직전에 이르는 계곡을 말한다. 일천의 부처가 늘어서 있다는 이름의 이 계곡에는 선녀들이 내려와 놀았다는 와선대를 비롯해 비선대, 금강굴, 장군봉, 귀면암, 오련폭포, 양폭, 천당폭 등 어느 곳이든 절경이 아닌 곳이 없다.

특히 와선대는 천불동계곡을 찾아드는 입구, 신흥사 서쪽 4km 지점에 있으며 소나무가 울창한 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천연의 암반대석으로 옛날 신선이 놀던 곳이라 한다. 신선이란 것은 급한 여울의 이름으로, 이 와선대의 반석은 높이가 약 3척, 폭이 약 10여간이 되므로 여기서 70~80명의 사람들이 앉아 놀 수 있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에 이 바위 위에 손톱이 긴 늙은 선녀인 마고선이 신선들과 함께 석대 위에서 바둑을 두고 거문고를 타면서 동천의 아름다움을 즐겼다 하여 와선대라고 불리운다.

와선대에서 계류를 따라 약 300m 정도 올라가면 비선대에 이르며, 경치가 매우 아름답고 비가 많이 내리면 비선대 반석 위로 흘러 몇 번이나 꺽이는 폭포를 이룬다. 연속된 바위에 폭포를 이루는 광경은 흡사 우의 자락이 펄럭이는 것 같으며, 마고선녀가 이곳에서 하늘로 승천하였다고 하는 설에 의해 비선대라 한다. 설악산의 가장 대표적 명승지로서 설악의 8경 중 하나에 속한다.

기암절벽 사이에 한 장의 넓은 바위가 못을 이루고 있는 곳으로, 계곡쪽에서는 미륵봉(일명 장군봉), 형제봉, 선녀봉이 보이며 미륵봉 등 허리에 금강굴이 보인다. 와선대에 누워서 주변경관을 감상하던 마고선이 이곳에서 하늘로 올라갔다 하여 비선대라고 부른다. 이 곳에서 남쪽으로 천불동계곡을 지나 대청봉으로 이어지고 서쪽으로는 금강굴을 지나 마등령으로 이어지는 본격적인 등산로가 있다.

 

 

◆[마등령] 馬等嶺 1320m

강원 인제군 북면(北面)과 속초시 경계에 있는 고개. 마치 말의 등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5만 지도에도 馬等嶺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옛 기록에는 모두 麻登嶺으로 속초의 [설악산뿌리]에도 마등령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산이 너무 험준하여 손으로 기어서 올라야 오를 수 있다 하여 유래.

설악산 대청봉까지 공룡능선이라 부르는 암릉의 기점이다. 북쪽의 미시령, 남쪽의 한계령과 함께 태백산령을 가로지르는 주요 통로였다. 지금은 북한강의 지류인 북천 백담계곡과 동해로 흐르는 천불동계곡의 비선대를 잇는 대표적 등산로이다. 설악산국립공원의 중심부이며 이곳에서 바라보는 대청봉의 조망이 일품이다.

 

 

 

◆[저항령]

북주능선(北主綾線)에 있는 고개 중의 하나. 동쪽으로는 정고평(丁庫坪)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길골(路洞)을 거쳐 백담사(百潭寺)에 이른다. 다른 말로 늘목령이라고도 하는데, 저항령(低項領), 늘목령 모두 노루목고개, 목우(牧牛)재와 마찬가지로 길게 늘어진 고개라는 의미의 늘으목, 늘목에서 유래하였다. 즉 늘목령은 늘목에 다시 고개 령(領)자가 합쳐져서 늘목령이 된 것이고, 저항령(低項領)은 늘목이 노루목으로 변하고, 이것을 한자(漢字)로 장항(獐項)이라고 표기하여, 거기에 다시 고개 령(領)자가 합쳐져서 장항령(獐項領)이라고 하던 것이 발음상 저항령으로 변하고, 이것을 한자(漢字)로 의미와는 관계없이 저항령(低項領)이라고 표기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으로 볼 때 저항령(低項領)도 마등령(馬登領)처럼 옛날부터 이용된 길인 것을 알 수 있다.

 

 

◆[황철봉] 1381m

설악산국립공원의 가장 북쪽 봉우리라고 해서 미시령과 함께 ‘북설악’이라고도 한다. 정상에 천연보호구역 지정비가 세워져 있다. 정상에서 바라보는 설악의 조망은 가히 절경이라는 말로 표현할 만하다. 공룡능선과 집선봉, 화채봉이 건너편 풍경으로 다가오고, 멀리 대청봉과 중청봉, 용아장성릉, 서북능선의 위용과 내설악의 첩첩산릉도 한눈에 들어온다. 황철봉의 남쪽 사면은 바위를 드러낸 거대한 단애(斷崖) 벼랑이다. 중간의 수많은 바위들은 장승처럼 버티고 서서 하계를 내려다 본다. 쓰러지고 넘어진 바위는 산산조각 나서 폭포수 같은 너덜을 만들어놓았다. 황철봉이라는 이름은 바위의 색에 따라 붙여진 듯하다. 바위마다 푸른 회색의 이끼 옷을 입고 있는데 예전에는 모르겠지만 지금의 색은 누렇지 않다.

 

 

 

[너덜지대(암괴원)]

암괴원은 기반암에서 분리된 각이 진 큰 바위 덩어리들이 완만한 사면에 넓게 나타나는 지형으로 보통 너덜지대라고 부른다. 주로 고위도 지방이나 교목한계선 위의 고산에 나타난다. 암괴원은 신생대 제4기 빙하시대에 빙하 주변의 한랭한 주 빙하 기후 지역에서 기반암이 얼고 녹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암석이 갈라지고 부셔져 생긴 것으로 날카로운 모서리를 지닌 바위 덩어리로 이루어져 있다. 국내에서 가장 넓은 암괴원은 설악산국립공원의 황철봉(1381m) 일대이며, 월악산국립공원의 대미산 능선에 작은 규모가 분포하고 있다. 암괴원은 과거 산지에서 있었던 기후 변화와 자연 환경 변천사를 알려주는 지형 경관이다.

 

 

[울산바위안부]

외설악 신흥사 앞에서 서북계곡으로 따라 올라가 내원암을 지나 산마루에 올라서면 엄청난 바위산이 가로막고 있다. 이 산이 바로 울산 바위다. 한 덩어리 바위로는 동양에서 가장 크다. 높이 950m이고 사방이 절벽으로 이뤄져 있으나, 808계단의 쇠다리가 가설되어 있어 누구나 쉽게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아찔한 철계단은 이제 더 이상 오를 수 없다.

2012년 11월 국립공원에서 우회 등산로를 설치하였다.

 

 

- 울산바위 전설

1. 울산(鬱山)바위의 울(鬱)은 울타리를 뜻하는 말로 울산(蔚山)의 울(蔚)자와는 완전히 글자가 다르다. 다만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울산에서 왔기에 울산바위라는 말이 붙은 것이다. 울산바위는 울타리처럼 생겼다는 의미에서 울산바위라고 한다는 이야기가 현실성 있다.

 

2. 조물주가 강원도 땅에 천하의 이름난 산 하나를 만들되 산봉우리의 수를 꼭 1만2천으로 할 계획을 세우고, 각 지방의 산봉 중에서 웅대하기로나 남의 눈을 끌만한 산에 명령을 내려 모월 모일 모시를 기한으로 금강산 쪽으로 오면 심사하여 합격한 산에 대하여는 용모에 알맞은 자리를 내어 주겠다고 했다. 이에 전국 각처의 수많은 산들이 좋은 기회를 놓칠세라 모두 모여들었다.

이때 경상도 울산(蔚山) 땅에 둘레가 10리나 되며 웅장한 바위인 ‘울산바위’도 금강산으로 떠나왔다. 그러나 태백산령을 걸어오는데 워낙 몸집이 육중해 빨리 걸을 수 없어 온 힘을 다해 걸었으나 설악산, 지금의 울산바위 있는 근처까지 와 기진맥진해 있었다. 이곳에서 하루를 쉰 뒤에 다음날 다시 육중한 몸을 끌며, 금강산에 가서 조물주를 만나기로 했다.

그러나 다음날 울산바위가 금강산 어귀에 들어섰을 때는 이미 1만2천봉이 다 정해졌기에 자리가 없다는 소리를 듣고 다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돌아가는 길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면 주위의 웃음거리가 될 것으로 생각한 바위는 어젯밤 쉬던 곳을 생각했다. 어차피 금강산에서 단역을 하느니, 외설악에서 주역 노릇을 하자는 생각으로 울산바위는 현재 외설악 중턱에 자리 잡았다.

 

3. 동자승의 재치가 빛나는 울산바위 전설이다. 울산바위가 울산에서 왔다는 전설을 들은 조선왕조 때 한 울산부사가 설악산에 탐승을 왔다. 이곳에서 울산바위의 전설을 듣고 승려들을 골탕 먹여 치부(致富)해 볼 꾀를 냈다. 부사는 신흥사에 들러 주지를 불러 ‘너는 어찌하여 내 고을에 있던 울산바위가 너의 사찰에 와 있는데도 지세(地稅)를 이제까지 물지 않느냐? 몇 해를 기다려도 지세를 가지고 오는 낌새가 없기에 오늘은 직접 지세를 받으러 왔다’고 호통을 쳤다. 이에 유생들 횡포에 기가 죽어 있던 신흥사 주지는 그해부터 울산부사에게 울산바위의 지세를 물기로 그 자리에서 승낙하고 말았다. 그해부터 막대한 지세를 물다보니 신흥사의 재정은 말이 아니었다. 주지승의 근심은 날이 갈수록 커져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주지승의 근심을 곁에서 지켜본 동자승이 ‘앞으로 울산에서 울산바위 지세를 받으러 오거든 저에게 맡겨주십시오. 제가 해결 하겠습니다’라고 자신했다. 얼마 뒤 울산에서 사람이 오자 동자승은 ‘지금까지 억울한 지세를 물어왔으나 이미 문 것은 어쩔 수 없으나 금년부터는 물어줄 수 없으니 돌아가라’고 말했다.

동자승은 ‘울산바위에는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나지 않아 우리에게는 큰 손해일 뿐이니 울산바위를 도로 울산으로 옮겨가든지 하라’고 말했다. 울산에서 온 사람도 도리가 궁해 ‘네 말대로 울산바위를 울산으로 옮겨 가겠는데, 타고 남은 재로 새끼를 꼬아 울산바위를 묶어주면 바위를 옮기겠다’고 요구했다. 이에 동자승은 마을사람들과 절간 승려들을 동원해 며칠동안 새끼를 꼬게 해 울산바위를 칭칭 감았다. 그리고 광솔에 불을 붙여 새끼를 다 태워버리니 울산바위는 재로 된 새끼로 얽혀지게 되었다. 그리고는 울산사람에게 약속대로 했으니 바위를 가져가라고 했다. 그러자 울산사람은 아무 소리도 하지 못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미시령] 彌矢嶺 826m

강원도 인제군 북면과 고성군 토성면 경계에 있는 고개. 예로부터 진부령·대관령·한계령 등과 함께 태백산령을 넘는 주요 교통로였다. 현재 미시령은 태백산령 북부의 횡단로로 설악산 북부를 넘어 인제∼속초를 연결한다. 도로는 6·25전쟁 당시 개설된 진부령에 이어 1960년대에 개통하였으며, 인제∼속초의 거리를 많이 단축시켰다. 도로 연변에는 영서 쪽으로 백담사(百潭寺)·십이옥녀탕(十二玉女湯)·도적소(盜賊沼), 영동 쪽에 선인재[仙人峙]·신선바위[神仙岩]·혜바위[?岩]·화암사(禾岩寺)·울산바위[鬱山岩] 등의 명소가 있다. 1970년 3월 설악산 일대가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관광도로의 통로로서 더욱 중요시되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이 고개를 미시파령(彌時坡嶺)으로 소개하고 있다.

지형이 험하나 계곡과 산세가 수려하며, 서쪽 사면에서는 북한강의 지류인 북천이 발원한다. 이 하천을 따라 나 있는 인제-속초 간 도로는 주요관광도로이다. 일대에 있는 울산바위·흔들바위·십이탕곡·신선대·내원암·신흥사·백담사 등과 함께 설악산국립공원을 이룬다.

 

 

 

◆[상봉] 1241m

진부령과 미시령 사이에 있는 봉우리 중에서 가장 높다. 옆에 있는 신선봉과 비교되는 말이다. 이름대로 높이나 모양새, 조망이 뛰어난 상급의 봉우리다. 이곳에서는 설악산군의 여러 능선과 봉우리가 한눈에 들어오고 북쪽 멀리로 향로봉능선이 펼쳐진다. 동쪽으로 바다와 연하여 속초 시가지가 그림처럼 들어와 박힌다. 동쪽계곡 아래 넓은 들판에 세계잼버리대회가 열렸던 ‘강원 청소년수련장’이 있다.

북설악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로 북녘을 바라보며 통일을 염원하는 잘 쌓은 돌탑이 있는 곳이다. 주변은 돌을 쌓아 만든 군 참호들이 있다.

 

 

 

◆[화암재] 1050m

고성군 신평리와 소간령으로 넘나드는 고개. 속초 영랑호 주변과, 동해안 일대가 환히 잘 조망된다. 신선봉과 상봉을 연결하는 산허리 지점이다. 이 구간은 대부분 암릉으로 대간답사의 재미를 더하게 한다. 적설기에는 안전에 유의해야 한다. 노루목의 이름도 ‘화려한 모습의(華) 바위들(岩)로 가득한 고개’라는 뜻으로 붙여졌다. ‘화암(華巖)’으로 표기한 지도도 있다. 동쪽계곡 아래에 이 고개의 이름을 본뜬 사찰 ‘화암사’가 있지만 등산로가 분명치 않아 바로 내려서기는 곤란하다. 화암재에서 서쪽의 계곡을 따라 1시간 30분쯤 내려가면 심산유곡인 마장터에 닿게 된다.

 

 

◆[신선봉] 1204m

대간령과 상봉 사이에 위치한 봉우리로 정상 부분은 크고 험한 바위지대다. 특히 북쪽 사면은 수십 미터의 절벽으로 너덜이 폭포수처럼 내려져 있다. 해발 1204m이며, 정상에 천연보호구역 지정비가 있고, 옆에 너른 공터도 있다. 정상에서 돌아보는 조망이 경쾌한 곳이다. 신선봉 자체를 관찰하기에는 5분 거리에 있는 큰 바위가 제격이다. 신선이 살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봉우리 자체가 신선처럼 보이기도 한다. 정상 직전에 화암재로 바로 연결되는 등산로가 있어 그냥 지나치기 쉬우므로 챙겨서 올라보는 것이 좋다.

흔히 금강산을 ‘1만2000봉’이라고 하는데 그 중 5개 봉우리는 휴전선 남쪽에 있다. 5개 가운데 향로봉이 가장 북쪽에 있고 그 밑으로 삼봉, 둥글봉, 칠절봉, 신선봉이 있다. 만일 금강산보다 설악산에서 더 가까운 신선봉까지 금강산에 포함시킨다면, 금강산과 설악산의 경계지점은 미시령까지 후퇴할 수 있다. 하지만 남쪽에서는 흔히 향로봉까지를 설악산의 범위로 본다. 신선봉은 전망대로 불릴 만큼 설악의 봉우리들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대청 중청 소청은 물론이고 희운각산장과 죽음의 계곡도 보인다.

 

 

◆[대간령] 큰새이령 660m

지금은 남교, 가평, 용대를 한데 모아 그저 용대리로 부르지만 본래의 용대는 미시령과 진부령의 갈림길에 놓인 마을이다. 용대에서 오른쪽이면 미시령이요, 왼쪽이면 진부령이다. 금강산에서 무산과 마기라산 (麻耆羅山)으로 달려온 백두대간이 진부령과 미시령을 건너면 바투 설악산이다. 진부령과 미시령 사이에는 지금은 풀숲에 가려 등산꾼들도 여간해서 잘 다니지 않는 옛길 대간령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소양강 상류 미륵천의 근원 가운데 하나로 운운하는 ‘소파령의 물길’이란 바로 대간령의 물길을 두고 하는 말이다.

소파령은 택당 이식의 『수성지』에 “석파령이라고도 하고, 한때 사자원(獅子院)이 있었기에 원기령이라고도 한다” 했고, 그 밖의 옛글에도 거의 빠짐없이 등장하는 고개인데 무슨 까닭인지 오늘날은 대간령이란 낯선 이름으로 통한다. 소간령은 진부령 아래서 대간령을 향해 골짜기를 거스르다 만나는 고개인데 그 역시 대간령과 함께 새로 생긴 이름이다.

 

- 소간령과 마장터

대간령 서쪽으로 내려가면 평원인 듯한 분지가 형성되어 있고 옛 집터자리들이 있다. 문헌에 동으로 고성군 토성면 도원리요, 서쪽으로 인제군 북면 마장터, 소간령이며 용대리로 간다. 고성과 인제의 경계다. 마장터 부근에는 주막이 있었다 한다. 상봉에서 서쪽으로 뻗으며 46번국도 용대리 자연 휴양림 있는 곳까지 뻗은 산줄기가로 대간령에서 창암으로 넘나드는 고개가 소간령이다.

 

 

◆[병풍바위]

병풍 모양의 바위. 향로봉등이 조망 된다.

 

 

◆[마산봉] 1052m

흘리 마을을 감싸고 있는 산으로, 말 등 형상을 하고 있다 하여 마산봉이라 한다. 금강산의 끝 줄기이다. 겨울이면 눈질(스키 타는데) 좋은 눈이4-5m씩 쌓이며, 또 다른 연고로 1958년 육군 산악스키부대 훈련장이 생겼고 이를 계기로 스키장으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1975 - 1979까지 5회에 걸 전국체전동계스키대회 각종 경기가 열렸으며 1992년에는 제2회 아세아 주니어 알파인 대회도 개최, 이 스키장은 천혜의 산세로 바다와 금강산도 관조할 수 있다. 지금은 알프스리조트가 계속 발전 시켜나가고 있다.

흘리 마을은 민족의 비극이었던 6.25전쟁의 수복지 입니다. 전쟁 이후 한 동안은 통제구역으로 묶어 지역 주민들 조차 통행이 제한 되기도 하였으나, 이후 고장 주민들과 실향민들이 이 곳에 정착 하며, 산을 갈아 밭으로 만들어 가며 마을을 일구 었다고 합니다. 지역 자체가 추운 지역이라 5월까지 눈이 내리는 일도 허다했으며, 초기에는 흉년과 추위에 많은 고생을 하였다 합니다. 하지만 현재의 흘리의 모습은 예전의 그런 아픔의 흔적이란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마을 주민들의 일치 단결되어진 힘과 새 농촌으로 거듭나고자 하는 노력의 결과 2000년 환경우수마을, 2001년 새 농촌 건설운동 등의 활동과 아울러 현재는 지역 내에서도 인정 받고 잘 사는 마을로 그 이름을 알리고 있습니다.

 

 

 

◆[진부령] 陳富嶺 529m

강원 인제군 북면과 고성군 간성읍을 잇는 고개. 소양강(昭陽江)의 지류인 북천(北川)과 간성읍으로 흐르는 같은 이름의 소하천, 즉 북천의 분수계가 되어 있다. 간성~한계리 국도가 지나는 이 고개는 태백의 여러 고개 중에서는 높이가 가장 낮다. 그러나 잿마루에 올라 서면 동해와 태백산지 사면의 수해(樹海)가 눈 아래에 펼쳐지고, 구곡양장의 고갯길이 장장 16km에 걸쳐 이어진다. 인제쪽에 원통리, 간성쪽에 진부리가 있어 각각 영하취락(嶺下聚落)을 이룬다

『수성지』에 보면, 간성에서 영서로 통하는 고갯길이 매우 좁고 험하여 인조 10년(1632)에 관에서 역승(役僧)을 모집하여 처음 개설했다고 한다. 1632년은 『수성지』의 저자 택당 이식이 간성현감으로 재직할 무렵이다. 당시의 노동의 주체가 역승이라 했으니 이는 진부령 아래의 큰절 건봉사 승려들이 대부분을 이루었을 것이다.

이후 1930년 차량이 통행하게끔 보수하였고, 1981년 지방도에서 46번 국도로 승격 87년~89년 확장공사 후 오늘에 이르며 표시석과 향로봉전적비는 확포장 공사 당시 지금 이곳에 이전 설치하였고 2005년 대형표시석이 길가에 자리 잡고 있다.

한계령, 미시령과 더불어 설악의 준령으로 손꼽히지만 진부령길은 여느 고개와는 견줄 바 없이 녹록하고 수더분하다. 높지 않으니 가파르지 않고, 가파르지 않으니 험하지 않다. 길도 슬슬 몇 구비 돌다 보면 어느새 고갯마루에 닿고, 고갯마루에는 버스가 서는 차부가 있는가 하면 이런 저런 가게들이 마을을 이루어 백두 대간의 고갯마루로는 통 믿기질 않는다. 고갯마루가 이미 마을을 이루었으니 예로부터 부르기를 ‘조쟁이’라 하였다. 지난 날, 영동의 해산물과 영서의 곡물이 마주 올라와 ‘이른 아침부터 장이 선다’는 내력으로 얻은 이름이다.

요즘 부르는 이름으로 조쟁이는 흘3리다. 현주소는 고성군 간성읍을 따른다. 본래 금강산 아래 아름다운 바닷가 고을이던 고성과 간성이 분단선을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나뉘었다. 고성은 북녘 땅이 되고 간성은 남녘 땅이 되고. 남녘 땅에 붙여진 고성군의 명칭은 다만 창졸한 사이에 코앞의 고향을 잃은 실향민들의 향수를 다독이는 이름이다. 백두대간의 고갯마루, 하늘 아래 첫 동네 흘리는 비록 간성읍을 따르지만 워낙 외진 곳이라 따로 흘리출장소를 두었다. 간성이래도 흘리는 품 밖의 간성이다.

 

 

 

- 진부령유별시비

1633년 1월 이식 선생이 한양으로 승차되어 가는 길에 선생을 배웅하기 위해 눈 덮인 진부령 고갯마루까지 배를 주리며 따라온 군민들의 인정에 대하여 이별의 아쉬움을 표현하며 남긴 시라고 한다.

 

 

[칠섭로와 향로로]

원래, 현 위치에서부터 칠절봉(1172m)의 구간을 '칠절로'로 불러왔는데 2004년 11월 새벽 짙은 안개속에서 고압선에 감전된 부하의 생명을 구하고 장렬히 산화한 을지부대 향로봉대대 고 김칠섭 중령의 숭고한 넋을 기리고 투철한 군인정신을 본받기 위해 구 '칠절로' 구간을 고 김칠섭 중령이 산화한 지점까지 '칠섭로'로 명명하게 되었다고 한다.

칠섭로가 끝나는 지점부터 향로봉까지는 향로로다.

 

 

 

◆[칠절봉] 1172m

진부령에서 서쪽으로 높이 솟은 봉우리다. 향로봉과는 직선거리로 7.5Km 떨어져 있다. ‘일곱 마디 봉’ 혹은 ‘일곱 번 꺾인(곳에 있는 산’이라는 뜻인데, 아마도 이곳이 옛날 금강산의 일부였으므로 비로봉에서 크게 일곱 번 꺾인 곳으로 본 듯하다. 행로봉과 함께 우리 군대가 주둔해 있다.

칠절봉은 ‘일곱 매디봉’이라고도 부른다. 굴곡이 심한 산자락이 갈라지는 지점에 서 있기는 하지만, 봉우리 자체가 일곱 마디로 꺾인 것이 아니라, 어느 봉우리 혹은 어느 고개로부터 일곱 번째로 꺾이는 능선상에 솟은 봉우리라는 뜻인 것 같다. 그것은 아마도 금강산이 아닐까? 금강산 일만이천봉 중에서 다섯 개의 봉우리가 남한 땅에 있는데, 향로봉, 둥글봉, 칠절봉, 삼봉, 신선봉이 그것이다. 칠절봉에서 금강산 비로봉까지는 100㎞도 안되고, 지도를 이어놓고 꺾어지는 지점을 헤아려보니 비슷하게 맞아 떨어진다.

칠절봉에서 향로봉 분기점까지는 계속 방향이 북진한다. 분수령마루금을 중심으로 왼쪽은 인제군, 오른쪽은 고성군이다.

 

 

◆[둥글봉]

둥글봉 아래 초소를 기점으로 관할부대가 다르고, 보안상 단체별로 집결, 인원파악 후 향로봉으로 이동할 수 있다. 빨리 도착했다고 먼저 갈 수 없다. 이곳에서 향로봉까지 약 40분 정도 소요된다.

칠절봉을 지나 1166.2봉은 무명봉으로 삼각점이 있다. 이 봉우리를 지나 1240봉에서는 능선이 왼쪽으로 틀어져 1245봉 무명봉에 이르다가 다시 오른쪽인 북쪽으로 꺾여서 1312봉에 닿게 된다. 이 1312봉을 흔히들 둥글봉으로 잘못 알고 있는데 진짜 둥글봉은 1312봉에서 오른쪽인 동쪽으로 1㎞쯤 뻗어나간 능선상에 솟아 있는 독립된 봉우리다. 둥글봉은 1150m로서 모습이 둥그스름해서 두리봉 또는 원봉으로도 부른다. 국립지리원 지형도의 ‘둥굴봉’은 잘못 표기된 것이다.

둥글봉 분기점에서 향로봉 분기점까지는 능선이 뚜렷하게 나 있다. 1310봉에서는 산머리곡산(1023.9m)쪽으로 빠지는 능선을 타지 않도록 한다. 1270봉의 향로봉 분기점에서는 동북 방향의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뚜렷하다. 이곳에서 600m쯤 가면 향로봉(香爐峰,1296.3m) 정상이다.

 

 

◆[향로봉] 香爐峰 1296.3m

강원 인제군·고성군의 경계에 있는 산. 높고 험준한 산머리에 늘 향로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처럼 구름이 걸쳐 있어 향로봉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지만, 신라시대에는 가리라봉(迦里羅峰),조선시대에는 마기라산(磨耆羅山)으로도 불리었다.

6 ·25전쟁 중 격전지의 하나로 수복지구이며 산의 북쪽 사면에 휴전선이 지난다. 겨울에는 적설량이 많으며, 민통선에 인접하여 희귀생물대가 형성되어 있다.

해발 500m부터 서어나무군락, 700m부터 사스래나무와 함박꽃나무 군락, 정상은 미역줄나무와 다래덩굴 등이 자생하고 있다.

진부령에서 향로봉까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군사작전도로를 따라 향로봉까지 갔다 되돌아 오는 코스이기 때문에 지루하고 산행의 묘미는 전혀 느낄 수 없다. 하지만 향로봉 정상에 서면 북녁 산하와, 남쪽의 설악산, 서쪽으로는 한북정맥과 대암산, 동쪽으로는 간성의 들판과 동해바다가 어렴풋이 보인다.

 

향로봉의 유래 : 향로봉은 금강산 1만 2천 봉우리 중 하나이며 인제, 고성, 간성의 3군 경계지역에 위치한 1293m의 높은 고지로서 구름이 덮인 날이면 향로에 향불을 피워놓은 형상으로 보인다하여 향로봉이라 불린다. 맑게 개인 날에는 금강산 비로봉과 고성 절벽강이 흐르는 모습이 보이고 동해 해금강의 만경창파가 넘실거리는 모습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명산이다. (향로봉 유래 안내판)

 

- 마기라산

대동여지도나 여지도에서는 백두대간에서 약간 비껴나 있는 마기라산이 지금의 향로봉인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산경표상에는 금강산에서 회전령(檜田嶺), 진부령(珍富嶺)을 거쳐 순서가 바껴 마기라산으로 이어간다. 여기서 의문은 왜 마기라산이 진부령보다 뒤에 나오는지와 약간 비껴나 있는 마기라산을 백두대간에 넣었는 가이다.오류인지 다른 이유가 있는지는 분명치 않다.

 

 

 

◆[고성재]

향로봉을 지나 계속 북진하면 건봉산에 이른다. 그러나 백두대간은 향로봉 정상을 거치지 않는다. 백두대간은 향로봉을 거치지 않고 왼쪽인 서북쪽으로 꺾어져서 고성재로 내려서는 능선을 타야 한다. 인제군 서화면의 매봉산에서 칠절봉~향로봉~건봉산을 잇는 능선을 향로봉산맥이라 하지만 우리 고유의 산경 개념에서는 한참 비켜 앉은 이름일 뿐이다.

향로봉 분기점에서 고성재(740m) 쪽으로 내려설 때는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면서 천천히 진행을 해야 한다. 특히 200m쯤 내려간 지점에서 오른쪽으로 뻗은 지능선으로 들어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 1070봉에서 고성재까지는 오른쪽인 북쪽은 가파르고 왼쪽은 비교적 평탄한 지형이다. 특히 고성재 전의 950봉은 펑퍼짐해서 능선을 가늠하기 어려우므로 남쪽으로 잘못 내려서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고성재 표고는 750m, 고성재에서 1052.8봉까지는 고성재 옆의 850봉을 올라섰다 내려설 때 방향을 정확하게 잡고 진행해야 할 것이다.

 

 

 

◆[삼재령]

진부령 이후 백두대간은 칠절봉 둥글봉 향로봉 고성재에 이어 남한 구역의 끝인 삼재령으로 이어진다. 삼칠령이라고도 부른다. 진부령에서 삼재령까지 도상거리는 26㎞ 남짓, 남한 쪽 백두대간인 지리산 천왕봉으로부터는 도상 662㎞, 실제 900㎞가량 떨어져 있다. 삼재령은 인제와 고성이 걸쳐있는데 고개로 동쪽으로는 외금강, 북쪽으로는 내금강으로 통한다.

삼재령에는 재미있는 전설이 있다. 태봉의 궁예가 과거 북원의 양길을 떠나 강릉으로 갔다가 개성으로 향한 대장정중 삼재령을 넘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미 전문가들은 태백 고개 중 가장 낮은 해발 450m가량의 삼재령을 거쳐 철원으로 향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삼재령을 넘어 인제를 거쳐 양구와 화천 등을 지나 철원에 도착했다면 궁예의 흔적이 DMZ 대부분의 지역을 거쳤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향로봉·건봉산천연보호구역

강원도 고성군(高城郡)과 인제군(麟蹄郡)에 걸쳐 있는 향로봉·건봉산·칠절봉(七節峰) 일대의 천연보호구역. 면적 8330만 6160㎡. 편마암을 기반암으로 하고 있어 산세가 장년기적 양상을 띠며, 식물구계(植物區系)는 북부 온대림 특성을 보인다. 해발고도 600m 이상 고지대에 발달한 낙엽활엽수 교목림은 원시림에 가까우며 주목-신갈나무나 주목-자작나무와 전나무-신갈나무가 주군집을 이루고 참나무속 군집과 단풍나무군집이 우세하다. 활엽수림 그늘에 많은 종류의 버섯이 생육하고, 조수류와 곤충이 풍부하다. 특히 건봉산 동남부 계곡에는 해양성기후 의 영향으로 매우 양호한 수목과 초본이 보존되어 있으며 한국 특산의 금강초롱·갈잎용담이 대군집을 이루며, 체꽃·꽃쥐손이·산오이풀·산부추·노랑제비꽃·구절초 등의 고산식물군집도 발달하였다. 이 지역은 식물분포상 금강산(金剛山)과 설악산(雪岳山)을 연결하는 중간지대이며 태백산맥 동쪽의 식생 특성을 지녀 학술적 연구자원으로서의 가치와 다양한 생물보존 측면에서 높이 평가된다. 천연기념물 제247호.

 

 

녹슨 철조망은 북녘 땅 대간 가고픈 발길 잡네

진부령∼향로봉∼군사분계선(삼재령) 간 26㎞

 

백두대간은 백두산 장군봉에서 금강산을 지나 설악 태백 소백 속리 덕유 등 나라의 명산을 거쳐서 지리산 천왕봉에 이르기까지 도상으로 총 1,625㎞에 이른다. 도상거리를 삼등분해서 그중 1/3을 더하는 방식으로 산정한 실제거리는 대략 2,166㎞이다. 이를 우리의 이수(里數)로 환산하면 5,416리나 되는 긴 산길이다.

 

이 중 남한 쪽은 지리산 천왕봉에서 진부령을 지나 군사통제지역인 칠절봉, 둥글봉, 향로봉, 고성재를 거쳐 군사분계선 지점의 삼재령까지 총 702㎞정도의 거리다. 북한쪽 대간은 삼재령에서 금강산을 지나 장군봉까지 923㎞에 달한다. 남한쪽보다 221㎞ 정도 더 길다.

삼재령을 거친 백두대간은 무산(1,320m), 금강산 비로봉(1,638.2m), 온정령, 철령(685m), 풍류산, 두류산(1,323m), 재령산, 용풍산, 마유령, 노란봉, 마대산, 금패령, 동점령산(1,925m), 대각산(2,121m), 백사봉(2,098m), 북포대산(2,289m), 소백산(2,173m), 대연지봉(2,359m)을 지나 2,750m의 백두산 장군봉으로 이어져 천지에 닿는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 땅의 대간꾼들은 진부령에서 발걸음을 멈춰야 한다. 진부령 이후 삼재령까지 26㎞구간은 군사통제지역이고 휴전선 이북은 북한구역이기 때문이다.

진부령까지 남한쪽 백두대간을 종주한데 이어 이번 산행에서는 진부령 이후 향로봉과 남방 한계선을 지나 군사분계선이 그어진 삼재령까지 26㎞ 거리를 향로봉군으로 설정, 군 당국의 사전 입산 허가를 받아 이 구간을 부분적으로 답사했다.

향로봉군은 진부령∼칠절봉∼둥글봉∼향로봉∼고성재∼삼재령까지 26㎞. 삼재령까지가 남한구역이다. 백두대간이 동강난 삼재령(三峙嶺)은 현재 비무장지대 안의 군사분계선이다. 이 지점을 중심으로 해 남북으로 2㎞ 떨어진 지점이 남방·북방 한계선으로 설정돼 분단의 흔적인 철조망이 대간에 걸쳐져 있다.

진부령 이후 구간은 군사지역이어서 출입이 불가능한 상태이다. 대간꾼들은 산경표의 실체를 보다 정확하고 올바르게 알기 위해 군 당국으로부터 진부령∼향로봉 구간의 입산허가를 받아 9월 12일 경남지역의 극성스런 대간꾼인 최점석, 박주환, 이수호, 김종대, 조만종, 박명환, 그리고 대관령에서 만난 인연으로 '아빠와 아들이 함께하는 백두대간'의 주인공인 이남기·종인 부자 등과 함께 답사하는 기회를 가졌다. 현재 이 구간은 마루금을 따라 산행은 불가능하고 진부령에서부터 향로봉까지 이어진 군사도로를 따라 도보 또는 자동차편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다. 향로봉군의 들머리인 진부령은 인제와 고성군 간성을 잇는 고개로 표고 520m. 진부령은 81년 국도로 승격돼 포장되기 전만 해도 강원도의 험준한 고개로 명성이 높다.

대간의 동쪽에 있는 고성은 반으로 쪼개진 국토의 끝자락이다. 금강산을 본디 제 땅에 두고 있었는데도 이제는 먼발치서 바라볼 수밖에 없는 비운의 땅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고구려 땅이었으나 진흥왕 때 신라 땅으로 편입됐고 고려시대 들어 간성현과 고성현으로 나누어져 있다가 조선에 이르러 각각 군으로 승격됐다. 1914년 고성군이 간성군에 통합됐다가 1919년 간성군이 고성군으로 개칭됐다.

그후 한국전쟁으로 금강산을 포함한 일부 간성 지역이 북녘 땅이 되어 편의상 남 고성, 북 고성이라 나누어 불리는데, 군청 소재지였던 고성읍은 북쪽에 있고 남한의 고성 군청은 간성읍에 자리잡고 있다. 백두대간 마루금은 진부령 표지석과 향로봉 전적비가 있는 광장 왼쪽으로 이어진다. 이곳에서 고도가 한껏 높아지면서 1,090m봉을 지나 칠절봉에 닿는다. 마루금은 해발 1,172.2m의 칠절봉(七節峰)에서 방향을 90도로 꺾어 북쪽으로 향한다. 일곱 마디 봉으로 풀이되는 칠절봉은 금강산 일만 이천 봉 중 남한쪽에 있는 다섯 봉우리 중 하나다. 그 다섯 봉우리는 향로봉, 둥글봉, 칠절봉, 삼봉, 신선봉이다.

 

칠절봉에서 남쪽으로는 매봉산(1,271m) 줄기로 이어지고 북쪽으로 둥글봉과 향로봉을 거쳐서 건봉산으로 이어진다. 철절봉에서 둥글봉(1,312m)까지는 완만한 산세를 하고 있어 별다른 기복 없이 이어진다. 마루금은 둥글봉에서 1,310m봉을 거쳐 1,270m봉으로 연결된다. 1,270m봉은 향로봉의 한 봉우리로 1,296.3m의 향로봉 정상에서 600m정도 못 미친 곳이다. 여기서 백두대간 마루금은 향로봉 정상을 거치지 않고 북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고성재로 이어진다.

 

정확한 마루금을 밟을 수는 없었으나 진부령에서 지프차를 타고 군사도로를 따라 향로봉(香爐峰) 정상까지 올랐다. 비포장 도로를 따라 가까스로 향로봉 정상에 올랐으나 사방은 짙은 운무 뿐. 꿈에도 그리던 금강과 북녘의 백두대간은 보이질 않는다. 안내를 맡은 장교로부터 도상으로나마 철조망이 걸쳐진 대간이 어디쯤 있는지, 그리고 금강산과 북녘의 대간 마루금이 어디로 이어지는지를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향로봉에서 고성재로 이어져 철조망을 지나 무산을 거쳐 금강산으로 이어지는 대간 줄기를 운무 속에 가늠해 보면서 벅찬 가슴 달랬다.

"아 ! 향로봉 남강은 옛 산 옛 물이로되 눈보라 내리치던 처참한 싸움터에 쓰러진 전우들의 모습은 간 곳이 없도다" 란 글귀가 새겨진 향로봉 정상 표지석과‘국토종주삼천리 5차연도 종착점’이라 새겨진 표목을 부여안고 잠시 눈을 감아본다. 우리를 하나로 묶어 줄 수 있는 백두대간. 그 대간 길을 따라 우리는 이곳까지 왔으나 더 이상 갈 수 없고 오직 그날, 통일이 이루어지는 그날을 기다릴 수밖에 없으니 애달프고 슬프다.

행여 운무가 걷히길 학수고대하며 향로봉 정상을 한동안 떠나지 못하고 소원해 봤으나 철조망이 걸쳐진 대간의 흉물스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려는 듯 백두대간은 남녘의 대간꾼들이 되돌아설 때까지 운무를 붙잡고 보내지 않았다.

향로봉에서 북쪽으로 이어진 능선은 대찰 건봉사가 있는 건봉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다. 건봉산 자락의 건봉사는 한때 설악산의 신흥사, 백담사, 양양의 낙산사를 말사로 거느렸을 정도의 대찰이었다고 전해진다. 진부령에서 칠절봉, 둥글봉을 따라 북진하던 대간 마루금은 향로봉 정상 600m 못미친 1,270m봉에서 방향을 서북쪽으로 바꾸어 고성재로 이어진다. 대간은 1,270m봉에서 고도를 낮추어 고성재로 이어졌다가 다시 방향을 몇차례 바꾸어 비운의 땅, 비무장지대로 이어진다.

삼재령 2㎞ 못미친 지점에 분단의 상징인 남방한계선 철조망이 버티고 서 있다. 백두대간 남한쪽 종착점 삼재령. 이곳 삼재령에는 인제군 서화면과 고성군 신탄리를 잇는 도로가 있었으나 지금은 군사분계선이라는 비극의 선만이 그어져 있을 따름이다. 향로봉 정상에서 운무 속의 대간을 상상으로 답사하고 아쉬운 마음 쓸어 담고 다시 진부령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향로봉군 답사를 마감했다.

(www.gnnews.co.kr/경남일보/2001.09.10/한중기,최창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