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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종주/백두대간자료

월악산 구간 지명 해설(버리미기재~옥녀봉)

by 산엔달 2014. 4. 18.

◆[버리미기재] 450m

버리미기재는 불란치재의 역할을 넘겨받아 새로 닦은 2차선이 잘 포장돼 있는데, 경상도와 충청도를 잇는 고갯마루다.

1. ‘벌의 목 고개’라는 뜻으로 밀치, 밀재, 밀목치, 밀목재, 밀항 등과 같은 말이다. 일반적으로 고갯길의 경우 벌, 노루, 소, 돼지, 닭 같은 짐승의 목 부분에 빗대어 이름을 붙이는 경우가 많다.

2. ‘빌어먹다’라는 말에서 나왔다는 설

3. ‘보리먹이’의 경상도 사투리 ‘버리미기’에서 나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장성봉] 915.3m

이름 그대로 ‘긴 성’을 뜻하는데 멀리서 보면 성이 길게 뻗어 있는 모습이라 한다.

장성봉은 백두대간상의 명산으로 대부분이 경북 문경시 가은읍 완장리에 속한 산이다. 백두대간을 따라 문경지역은 대다수가 마루금 좌우로 경북과 충북이 맞닿아 있지만 대야산에서부터 불란치재, 곰넘이봉, 버리미기재, 장성봉과 막장봉 일대까지도 마루금 좌우는 문경시 가은읍 완장리에 속해 있다.

장성봉은 백두대간 이 일대 지역의 전망대라 불러도 좋을 만큼 조망이 시원하다. 북쪽으로는 악희봉을 거쳐 백화산, 조령산으로 산태극을 그리며 흘러간 백두대간의 모습과 월악산, 주흘산, 대미산의 모습이 펼쳐지며 바위가 멋들어진 희양산의 전모를 볼 수 있다. 남쪽으로는 대야산과 조항산, 멀리 바위성채를 이룬 속리산까지 볼 수가 있다.

산 이름이 그러하듯 마치 거대한 만리장성의 일부를 보는 듯하다. 주위에 명산들이 둘러싸고 있어 제법 심산유곡에 들어선 것처럼 느껴지는 산이다.

 

장성봉은 문경새재에서 속리산 쪽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줄기를 가은읍 서쪽에서 떠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주위로 악희봉(843m), 구왕봉(898m), 희양산(999m), 애기암봉(731m), 둔덕산(970m), 대야산(930.7m), 군자산(910m) 등이 둘러싸고 있다. 희양산과의 사이에 자리한 북쪽 계곡은 봉암사가 있는 봉암용곡으로, 희귀식물인 솜다리(에델바이스)가 서식하는 등 자연이 잘 보존되어 있다. 능선 아래에는 예전에 수정을 캐내는 수정광산으로 쓰던 석굴 4∼5개가 있다.

산행은 완장리 벌바위에서 북서쪽으로 약 3㎞ 떨어진 불란치재 직전의 삼거리를 기점으로 하며, 옻나무골 능선과 정상을 거쳐 불란치재로 다시 내려오는 데 4시간 걸린다. 장성봉 정상에 오르기 바로 전에 연결되는 애기암봉이나 희양산 앞산인 원통봉(668m)과 연계하여 종주하는 코스도 있다. 정상 부근은 2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는데 북쪽 봉우리가 정상이다. 정상에서는 서남쪽으로 계곡이 내려다보이고, 오른쪽으로 쌍곡계곡과 군자산이 보이며, 북으로는 백두대간 주능선 너머로 장성봉을 둘러싼 산들이 바라보인다.

 

 

[막장봉] 전망대

막장은 땅 속을 파고 들어가는 광산의 갱도 막다른 곳을 말한다. 이는 절말에서 시작되는 골짜기가 시묘살이골로 파고 들어 막장처럼 되어 있으며 그 끝에 봉우리가 솟아 있기 때문에 막장봉이라 부른다. 돌을 직사각형으로 잘라서 만든 정상 표지석에는 ‘막장봉 868m’라고 적혀 있으며, 정상에는 큰 나무가 있어 쉬어 가기에 적당한 장소다. 지나온 능선과 앞으로 가야할 장성봉 길이 훤하게 보인다.

막장봉은 최근에 보기 드물 만큼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고스란히 잘 간직하고 있는 산이다. 충북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막장봉은 백두대간의 마루금 위에 솟아 있는 장성봉의 서쪽 가까이 서로 마주하고 있는 산이다. 또한 살구나무골과 시묘살이골을 사이에 두고 북으로는 칠보산과 마주보고 있으며, 남으로는 관평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대야산과 마주보고 있기도 하다. 장성봉과 산줄기가 이어져 있으나 산세는 대야산과 칠보산과 비슷하다. 산등성이 곳곳에는 기암괴봉이 많아 그 이름도 이빨바위, 삼형제바위, 달팽이바위, 백두산천지바위, 코끼리바위 등 천태만상이다. 특히 삼형제바위와 달팽이바위(백두산천지바위) 일대는 너른 암반도 있고 기암괴봉의 전시장 같은 모습에 탄성이 절로 터지고 만다.

 

 

 

◆[악희봉] 845m

제1봉부터 제5봉까지 5개의 봉우리가 나란히 서 있으며, 제4봉이 주봉(主峰)이다. 백두대간의 본 줄기에서 약간 벗어난 산으로, 전체적으로 갖가지 모양의 바위와 노송군락이 많아 경관이 뛰어나며 각 봉우리의 아름다움도 빼어나다. 특히 정상 부근은 기암괴석과 노송, 고사목이 어우러져 매우 아름답다. 제3봉과 제4봉 사이의 벼랑 위에는 4m 높이의 입석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데, 일명 ‘선바위’다. 그래서 마을 이름도 立石이라 부른다.

악희봉의 정상부근은 온통 기암괴석과 노송, 고사목으로 이루어져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케하는데 인근의 희양산에 비하여 바위의 덩치가 작을 뿐 모양이나 기묘한 형상은 더 없이 아기자기하며 아름답다. 장바우 다리에서 10분쯤 가면 잘생긴 소나무 한그루가 아주 점잖게 서 있는데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를 가리켜 관송이라 부른다. 벼슬아치들의 관모를 닮았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 옆에는 입석마을에 골골이 전해오는 얘기를 기록해 놓은 마을 자랑비가 자상하다.

 

 

◆[은티고개]

은티재는 악희봉과 구왕봉 사이의 고개로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와 충북 괴산군 연풍면 주진리를 나누고 있다. 이 은티재에서는 봉암사로 내려가는 길이 있으나 봉암사 산문이 폐쇄되어 통행하지 못하도록 하였으며, 고갯마루에 출입을 통제하는 안내문이 서 있다. 이 고개에서 주진리 은티마을쪽으로도 길이 잘 나 있으며, 산행길로 이용되고 있다.

 

은티마을에는 민박과 식당이 있어 오가는 길에 이용하기에 편리하다. 은티마을에서는 정월에 고갯마루의 서낭당에 동제를 지내고 있다. 은티는 본래 충북 괴산군 연풍면 주진리(周榛里)의 한 마을 이름이다. 마을에서는 백두대간의 고개인 은티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옛 지도에 은티재는 주현(周峴)으로 나오는데 옛날에는 은티마을을 주티동 또는 주치동으로 불렀다고 한다. 주진리는 주치동(周峙洞)과 진촌(榛村)에서 각각 한 글자씩 따온 이름이다.

 

은티마을 입구에 세워놓은 은티마을 유래비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은티마을은 연풍면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약 4㎞ 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東은 중리부락, 北은 심풍리, 南은 경북 가은에 접하고 있고, 마을이 형성된 시기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연풍현 당시 현내면 인지동에 속해 있었으며, 1812년 작성된 동절목(洞節目)에는 인지동 의인촌리(義人村里)로 기록,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후 왜인들이 義人은 한국의 민족정신이 함유되었다 하여 은티(銀峙)로 개칭,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周峙洞, 榛村, 鷹岩, 鳥峰, 中里를 병합, 주치와 진촌의 이름을 따서 주진리라 하였으며, 8.15 광복 후 행정구역 세분화에 따라 주진리를 3개 마을로 나눠 그중 우리마을을 은티라 칭했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은티는 女宮穴에 자리하고 있어 동구에 남근(男根)을 상징하는 물체를 세워야 마을이 번창하고 주민들이 아들을 많이 낳을 수 있다고 하여 동구 송림안에 남근석(男根石)을 세워놓고 매년 정월 초 이튿날을 정제일로 마을의 평안과 동민가족 모두의 안녕을 기원하는燒紙를 올리며 祭가 끝나면 한자리에 모여 음복하고 제물을 나눠먹는 동고사를 지내고 있다. 서기 1996년 6월 20일. 은티마을 동민일동

 

[은티마을]

은티 마을은 여느 산골 마을처럼 계곡을 중심으로 발달했다. 그래서 그 형세가 마치 여성의 성기와 같은 여근곡(女根谷)이다. 이를 여궁혈(女宮穴)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 기를 죽이기 위해서 마을 초입의 가겟집 앞 노목 아래에 남근석을 세워 놓았다. 여근과 남근을 합체시킴으로써 음양의 조화를 꾀할 수 있는 인식 때문이다. 물론 아들을 많이 낳을 수 있다고 한 것은 또 다른 의미를 담고 있다. 이 남근석은 하나의 선돌을 세운 것이 아니다. 약 120㎝짜리 남근석을 가운데 세우고 그 옆으로 조그만 돌들을 세워서 아기자기한 모습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지난 마을 제의 때 쳐놓은 금줄이 아직도 남아 있다. 이 주위에는 아름드리 전나무가 세워져 있는데 300∼400년 정도 된 것이라고 한다.

이 남근석에 대한 제의가 매년 섣달 20일에 행해지며, 이를 ‘동구제(洞口祭)’라고 부른다. 아마 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기 때문에 붙인 명칭인 듯하다. 음식을 장만하는 주판집과 지관, 축관 등 4명을 선출해서 제사를 올린다. 대개 농사가 잘되고 동네가 화목하기를 기원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현재 거주하는 28가구의 대주(大主·바깥주인)를 위한 소지를 올려주는 것으로 끝난다.

 

- 삼국유사 여근곡 이야기

여근곡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에도 나타난다. 신라 선덕여왕은 세 가지의 일을 미리 알아냈는데, 그 중 하나가 여근곡에 숨어 있던 백제 병사를 찾아낸 일이다. 즉 겨울인데도 영묘사 옥문지(玉門池)에서 개구리가 울었다고 한다. 이것을 들은 여왕이 군사를 여근곡에 보냈다. 그곳에는 경주를 습격하기 위해 백제 병사들이 숨어 있다가 전멸됐다. 게다가 이들의 후미에 있던 병사까지 몰살됐다고 한다.

개구리가 우는 것은 남자가 성냄을 뜻하는 것이요, 옥문은 여성을 의미한다. 그래서 여근곡에 병사가 숨어 있음을 알아내고 이들을 쉽게 제압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를 선덕여왕은 ‘남자의 성기가 여성의 성기로 들어가면 필경 죽는다(男根入於女根則必死矣)’라고 하는 설명으로 대신했다. 매우 탁월한 표현법이 아닐 수 없다.

 

 

 

◆[주치봉]

구왕봉과 악희봉 사이에 있으며, 구슬(珠구슬주)처럼 동그랗게 생겼다. 은티(치)마을의 뒷산이라고 하여 은치봉으로도 부른다.

 

 

◆[오봉정 고개]

주진리 은티마을에서 백두대간을 넘어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오봉정마을로 가는 고개이다.

 

 

◆[구왕봉] 877m

희양산에서 서쪽으로 1.6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은티마을의 남쪽이자 봉안용곡의 북쪽에 있는 봉우리다. 월악산과 속리산의 중간에 위치하여 양방향으로의 조망이 뛰어나다.

산자락에 있는 봉암사는 선종구산의 종문 중의 하나이므로 ‘9왕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구왕봉을 바로 ‘제9법왕’의 주처로 본 것이다.

동쪽의 희양산(999m)에 가려 비교적 덜 알려진 산. 아기자기한 등산코스를 자랑하며 희양산과 함께 동서로 나란히 위치한 암산이다. 백두대간 구간 중에서도 급경사와 암릉이 많아 난코스에 속한다. 산자락에는 신라 헌강왕 5년(879년), 지증대사가 심충이라는 사람의 권유로 봉암사 자리를 정하고 그 자리에 있던 큰 못을 메울 때 대사가 신통력을 이용하여 못에 살고 있던 용을 구룡봉으로 쫓았는데 그 곳이 바로 구왕봉이다. 봉암사에서는 이 산을 날개봉이라고도 하는 창건 설화가 전해져 오며 매년 소금단지를 묻어 기를 눌러준다고 한다. 이 산에서 인상적인 것은 정상에서 은티마을 쪽으로 뻗은 대단애이다. 높이도 꽤 높고 길이도 200~300m 정도 된다. 또 하나의 특징은 지름티재의 가을 단풍인데, 풍부한 영양과 충분한 습도로 다른 지역보다 색깔이 곱고 다양하다.

 

 

◆[지름티재]

지름티재는 구왕봉과 희양산 사이에 위치하며, 경북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와 충북 괴산군 연풍면 주진리의 경계를 이룬다. 주진리 은티마을에서 오르는 등산로는 잘 나 있으나 봉암사쪽은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고갯마루에는 서낭당이 있으며 은티마을에서는 매년 정월에 제사를 지내고 관리를 하고 있다. 지름티재는 은티마을에서 봉암사로 갈 때 질러가는 고개라는 뜻에서 생긴 이름인데, 전혀 의미가 다른 유치(油峙)로 변천되어 쓰이기도 한다. 이 고개 역시 봉암사의 산문폐쇄로 봉암사로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으며, 서낭당은 서낭나무를 중심으로 둥글게 돌담을 쌓아올린 제단으로 돌담 높이는 30~50㎝이다.

 

 

[희양산] 999m

희양산(曦陽山)은 동·서·남 3면이 화강암 암벽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돌산으로, 암봉들이 마치 열두판 꽃잎처럼 펼쳐져 있다. 옛날 사람들은 희양산을 보고 ‘갑옷을 입은 무사가 말을 타고 앞으로 나오는 형상’이라고 했다. 봉암사를 창건한 신라 헌강왕 때의 고승 지증대사가 전국 명산을 둘러본 뒤 희양산 한 복판 계곡으로 들어가 지세를 살펴보니 "산은 사방에 병풍처럼 둘러처져 있으니 마치 봉황의 날개가 구름을 치며 올라가는 듯하고 계곡물은 백겹으로 띠처럼 되었으니 용의 허리가 돌에 엎드려 있는 듯 하다"고 지세를 평하며 감탄한 산이라고 전한다. 그래서 봉황과 같은 바위산에 용과 같은 계곡이 흐르고 있어 ‘봉암용곡(鳳巖龍谷)’이라 하였다.

희양산은 문경시 가은읍과 충북 괴산군 연풍면의 경계를 이루고 문경새재에서 속리산 쪽으로 흐르는 백두대간의 줄기에 우뚝 솟은 신령스러운 암봉이다. 그 자태가 우뚝하고 산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바위처럼 보이는 데다 바위 낭떠러지들이 하얗게 드러나 있어 주변의 산에서 뿐만 아니라 먼 산에서도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산이다.

 

- 봉암사 스님들에 의한 출입 통제

경북 문경시 가은읍에서 들어가는 봉암사 코스는 일반관광 및 산악인들의 출입을 철저하게 금지하고 있다. 1982년 6월 봉암사 스님들이 전국 사찰이 관광지가 되고 훼손되는 것을 어떻게 해서든지 막아야 한다는 운동을 전개, 특히 희양산 봉암사 주변의 등산 및 관광코스를 철저하게 폐쇄하고 난 다음부터이다. 봉암사는 조계종 특별수도원으로 지정돼 있으며, 봉암사에서 백두대간 마루금까지 사이에 있는 임야의 대다수가 봉암사 소유이기도 하며, 지름티재와 은티마을 위쪽의 등산로, 희양산 정상부 등지에 봉암사 스님들이 지키고 서서 산에 오르는 것을 막고 있다.

봉암사는 평소에는 일반인들의 출입을 금하고 있으나 일년에 단 하루, 사월초파일에만 문을 개방해 사찰과 사찰내의 문화재를 구경하기 위한 전국에서 찾아온 인파로 매년 북새통을 이룬다.

 

[봉암사]

봉암사(鳳岩寺)는 신라 헌강왕 5년(879)에 지증대사(智證大師)가 창건한 천년 고찰로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이다. 신라시대 고찰로 지정문화재만도 10점에 이르는데, 그 중 보물이 5점, 지방유형문화재 2점, 문화재자료 3점 등 귀중한 문화재의 보고라 할 수 있다.

 

봉암사는 처음 지증대사가 심충(沈忠)이란 사람의 권유로 현 봉암사 자리를 결정하고 그 자리에 있던 큰 못을 매몰하려 하는데 큰 용이 서식하고 있는지라, 지증대사는 신통력을 발휘하여 그 용을 구룡봉(九龍峰)으로 쫓고 연못을 메워 그 자리에 봉암사를 세웠다고 한다.

백운곡(白雲谷)에 계암(鷄岩)이라는 바위가 있는데 봉암사를 창건할 당시 날마다 그 바위 위에서 닭 한 마리가 새벽을 알렸다고 한다. 그래서 절 이름을 봉암사(鳳岩寺)라고 이른다고 한다. 그 후 지증국사의 문손들이 국사의 뒤를 이어 중수하였는데 웅장하고 예술의 극치를 다한 건물이 즐비했다고 한다. 중창 80년 후에 극락전 한 동만 남기고 전소되고 말았다. 그 후 고려 초에 정진국사(靜眞國師)가 주석하게 되어 중창하여 옛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극락전은 목탑형으로 건조된 건물로서 경순왕이 피난 때 원당(願堂)으로 세운 유서 깊은 전각이라고 전한다.

 

 

◆[희양산성]

동국여지승람과 증보문헌비고에는 ‘희양고성은 가은현 북쪽 15리에 옛 성이 있으니 삼면이 모두 석벽(石壁)이며 옛 군창(軍倉)이 있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약 1300m가 되는 이 산성은 신라와 후백제가 국경을 다투던 접전지로 929년 경순왕 3년에 쌓은 성터로 전해진다.

 

 

[시루봉] 876.2m

시루봉은 어디에서 보아도 금방 알아볼 수 있는 산이다. 멀리서도 떡시루를 거꾸로 엎어 놓은 것처럼 정상부의 바위지대가 금방 눈에 띈다.

천연기념물 제 292호로 지정된 반송이 있는 문경시 농암면 화산 2리에 위치한 시루봉은 높이가 876.2m로 여느 높은 산에 비해 그리 높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정상은 장엄한 암벽으로 되어 있어 조망이 좋고 가슴까지 탁 트이는 전망대로 이 산의 가치를 톡톡히 한 몫 해내고 있다. 특히 시루봉에서 서쪽 방향으로는 신라의 전통사찰인 원적사와 백두대간의 명산으로 사람이 살기에 가장 좋다는 우복동이 있다는 청화산으로 능선이 이어지고 있으며, 동편으로는 연엽산과 능선이 이어지고 있다.

시루봉은 가뭄이 들었을 때 기우제를 지내던 기우단(祈雨壇)이 있던 곳으로 문경현지 등 옛 문헌에는 불일산(佛日山)이라 기록하고 있는데『불일산은 가은현 서남 20리에 있고 화산(華山, 즉 청화산)에서 뻗어 왔으며 기우단이 있다』고 되어 있다. 기우단이 있던 곳은 지금의 쌍룡터널 위 봉에 그 터가 남아 있다.

 

 

◆[이만봉] 989m

이만봉(二萬峰)은 옛날 임진왜란 때 이곳 산골짜기로 2만여 가구가 피난을 들어와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과, 옛날 만호라는 벼슬을 한 이씨가 이곳에 살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두가지 설이 있다. 이만호골이 시작되는 도막은 임진왜란 당시 도원수 권율이 군막을 쳤다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충북과 경북을 가르는 경계선에 있으며 괴산군에서 최고봉인 백화산과 희양산의 중간에 위치한다. 독립된 산이기보다는 황학산, 백화산, 시루봉, 희양산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거대한 능선으로 표시된다.

 

 

◆[곰틀재]

꿈틀꿈틀이라 꿈틀→곰틀이 되었다는 설과, 옛날에 곰을 잡던 틀을 놓던 봉이라 곰틀봉으로 불린다는 설이 있으나 확실한 증거는 없다.

 

 

◆[사다리재]

괴산 분지리와 가은 원북리를 연결하는 오솔길과 교차한다. 능선의 양편이 너무 가파라서 마치 성벽 위를 걷는 것 같이 아슬아슬하다. 암릉은 아니다. 분지리 사다리골의 뒤편 고개다. 오르내리는 경사가 급하여 마치 사다리를 타는 것과 같아서 붙여졌다.

미전치(薇田峙)라고도 하며, ‘고사리밭등’으로 부르는 고개다. 이곳을 넘나들던 연풍 분적골 사람들이 고사리가 많다 하여 ‘고비 미(薇)’자를 써서 미전치라 한다.

 

 

◆[평전치]

남쪽 사면은 벼랑에 가까운 경사를 보인다. 지형적인 영향으로 사철 바람이 강하게 분다. 분지리로 하산하는 등산로가 오른쪽으로 내려간다. ‘평평한 산밭’이라는 뜻인데 실제의 지형은 전혀 딴판이다.

平田峙. 마을 사람들이 쓰는 이름은 ‘평밭등’이다. 이름의 유래는 알 수 없으나, 이곳은 연풍 분적골 사람들이 마성면 상내리 쪽으로 내려가던 고개였으나 지금은 폐로가 되어 등산로로 이용되고 있다. 이곳 상내리의 한신마을은 마원리, 중평리, 여우목마을, 연풍지역과 더불어 천주교 성지로서 백화산 일대 대간 능선을 넘나들며 선교활동을 펼쳤던 곳으로, 1866년 병인박해 당시 대원군의 박해를 피해 허기진 몸을 숨겼던 첩첩산중 천혜의 은신처였다 한다.

 

 

◆[백화산] 1064m

백화산은 이화령에서 잠시 숨을 죽인 백두대간이 속리산을 향해 치달리기 전에 솟구친 산이다. 백두대간이 문경쪽으로 한참을 치고 들어갔다 빠지는 말굽새 모양을 하고 있고, 백화산은 그 정점에 위치해 있어 흔히들 봉황이 나는 형국에 비교하곤 한다. 특히 문경쪽으로 바라보는 정상부는 암릉으로 되어 있어 부리 구실을 하고 정상은 새가 하늘을 날며 땅을 굽어보듯이 천지간의 산과 들이 한눈에 내려다 뵈는 조망의 명당이다. 백화산은 봉황이다. 성인을 따라 세상에 나타난다는 봉황의 수컷이다. 그 발치에 봉생(鳳笙), 왼쪽에 봉황이 울었다는 봉명산(鳳鳴山),오른쪽에 신라시대 고찰인 봉암사(鳳岩寺)를 두고 뒤로 이화령과 시루봉으로 날개를 펼친 거대한 새다. 4단으로 된 정상남벽에는 근동 사람들이 명당자리로 꼽는 기도터가 있다. 깎은 듯한 절벽, 보면 볼수록 하늘이 다가오는 듯한 벼랑 아래 눈비 가릴 만한 감실이 마련되었다.

 

 

◆[황학산] 912.8m

조망이 뛰어난 산이다. 새재길이 통과하는 상초리계곡과 주흘산, 부봉, 마폐봉, 조령산, 멀리 월악영봉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동쪽으로는 조령천을 따라 조성된 농경지와 문경의 단출해 보이는 시가지가 펼쳐진다. ‘황두루미’가 둥지를 틀은 산이다.

경북 문경시 문경읍과 충북 괴산군 연풍면의 경계에 있고 북으로는 조령산과 남으로는 백화산을 두고 있다. 백두대간의 중추를 이루는 황학산은 제3번 국도인 이화령 남쪽 6km 거리에 솟아있고 바로 옆에 덩치 큰 백화산(1,064m)이 있기에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고 이 때문에 호젓한 산길과 산마루에 펼쳐진 큰 억새밭과 참나무 숲길은 어느 산과도 비교해 보아도 뛰어나다. 밑에서 보기에는 밋밋한 산세가 무척 수월해 보이지만 경사가 예상외로 급하고 또 정상에서 백화산으로 잇는 능선은 수많은 암봉과 가득한 수림으로 덮여 있어 고산다운 면모를 제대로 느낄 수 있기도 하다. 억새가 좋은 곳은 정상 바로 밑 수만평 정도의 억새밭이다. 특별한 길이 없는 정상부의 억새밭은 이리저리 발길 닿는 대로 갈 수 있고 백두대간을 따라 펼쳐지는 억새밭을 감상할 수 있다.

 

 

◆[조봉] 673m

이화령의 옛이름인 ‘(큰)새재’의 뒷산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낙영산과 이웃해 있는 조봉산은 충북 괴산군 청천면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각종 기암괴석으로 조각된 듯한 바위만물상들이 마치 새의 입부리처럼 뾰족한 형태를 이루고 있다 하여 산 이름을 조봉산이라 지었다.

 

 

◆[이화령] 이우릿재 529m

이화령은 경북 문경과 충북 괴산을 잇는 고개이다. 이화현으로 불리던, 사람통행이 적은 조그만 고갯길이었다. 그 고갯길이 1925년 일제에 의해 신작로로 개설되면서부터 중부와 영남을 잇는 새로운 동맥으로 급부상하였다. 당시 한국민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던 영남대로의 기(氣)를 꺾기 위해 일제가 의도적으로 조령 근처에 신작로를 만든 것이라 한다. 실제 이화령이 개설된 후 양조장과 시장이 설 정도로 번성했던 조령의 풍요는 마감됐고, 이후 조령 근처 상초리 사람들은 화전(火田)으로 먹고 살아야 했다 한다.

하늘재가 신라와 고려 시대에, 조령이 조선시대에 고개로서의 역할을 담당했다면, 이화령은 근대에 그 역할을 담당했던 곳이다. 해방 이후에는 3번 국도가 쉬었다 넘는 고갯마루로 번성하였으나, 1998년 고갯길 아래로 이화령터널이 뚫려, 점차 잊혀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다 2004년에는 중부내륙고속도로에 터널 길을 또 내어주고, 이제는 등산객들 아니면 찾는 이 없는 쓸쓸한 길로 전락했다..

2012년 11월 백두대간 훼손지 복원사업으로 이화령 옛길 위로 터널형태로 대간길을 복원했다.

 

- 梨花, 伊火

추풍령과 죽령 사이에 위치하며 중부 내륙을 남북으로 관통한다. 조령의 대체도로로 이용된다. 원래는 ‘이우리고개’였던 것을 지난 1925년에 신작로 형태로 개통하면서 이화령으로 개명했다. 고갯길 연변의 배꽃이 아름답다고 해서 당시 총독부에서 붙인 이름이다. 한때는 조령과 구분하는 말로 ‘큰새재’라고도 불렀다.

조령산 남쪽에 위치한 이화령 속칭 이우릿재는 조선세종실록 지리지 문경조 및 동국여지승람·대동지지등의 역대 지리지 문경조 기록에 의하면, 조선시대에는 이화현(伊火峴)으로 표기하던 고개 이름인데, 그 의미는 분명치 않다.

현재의 ‘梨花嶺’ 표기는 조선총독부에서 1914~1918년에 걸쳐 조사 제작한 근세한국오만분지일지형도에서 잘못 표기한 것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으로, 본래의 의미가 변질된 표기다. 1929년에 김유동이 저술 간행한 팔도명승고적 문경군조에도 伊火峴으로 표기하고 있음을 살 필수 있다.

이화령은 증보문헌비고 권119 병고(兵考)에 보이는, 조선 숙종 31년(1705)조 기사에 의하면, 이오령(伊吾嶺)으로도 표기하고 있다. 이는 아마도 방언 상에서 이화령→아와령→이오령으로 전음되어 일컬어지던 것을 소리 나는 그대로 표기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화령의 속칭 이우릿재도 이화령 부근의 동리 이름을 따서 이화리의 고개란 뜻으로 이화릿재라 일컫던 말이 이와릿재→이우릿재로 전음된 것이거나, 또는 이화(伊火)의 음과 훈(訓)이 혼용된 이불(벌)재, 이부릿재→이우릿재로 전음된 것이 아닐까 한다. 음과 훈이 혼용되어 일컬어지는 땅이름 용례는 우리 땅이름에 흔히 보이는 것으로, 예컨대 하늘재 동남쪽 문경읍 갈평리의 갈평(葛坪)도 속칭 갈벌이라 일컫기도 하는 것과 같은 예이다.

 

또는 이화령은 아득하다, 희미하다의 옛말 ‘입다’의 고형태인 ‘이블다(이울다)’에서 ‘이블’을 취하여 아득한 고개라는 뜻으로 이블재[伊火峴]라 일컫던 것이 전음되어 이울재→이우릿재라 일컫던 고개 이름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 문경시청이 최근 ‘이화령’이란 지명을 폐기하고 ‘이우릿재’라는 전래명칭을 되살렸다. 일제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을 버리고 오랜 세월 우리 조상들이 걸어 넘던 오솔길일 때의 이름을 선택한 것이라고 했다.

 

 

 

◆[조령산] 1025m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과 경북 문경시 문경읍과의 경계선상에 자리잡은 명산으로, 예전에는 공정산(公正山)으로 불리웠다.

전체적으로는 산림이 울창하며 대암벽지대가 많고 기암괴봉이 노송과 어울려 마치 그림 같다. 능선 남쪽 백화산과의 경계에는 이화령이 있고 능선 북쪽 마역봉과의 경계가 되는 구새재에는 조령 제3관문(조령관)이 있으며, 관문 서편에는 조령산 자연휴양림이 조성되어 있다. 제3관문이 위치한 곳은 해발 642m로서 예로부터 문경새재라 일컬어지고 있다. 이를 통해 영남지방과 중부지방이 연결되어 교통의 요지였을 뿐 아니라, 험난한 지세를 이용할 수 있어 군사상의 요충지이기도 하였다. 주능선 상에는 정상 북쪽으로 신선봉과 치마바위봉을 비롯하여 대소 암봉과 암벽지대가 많다. 능선 서편으로는 수옥폭포와 용송골, 절골, 심기골 등 아름다운 계곡이 발달되어 있다. 능선 동쪽을 흐르는 조령천 곁을 따라 만들어진 길은 조선조 제3대 태종이 국도로 지정한 간선도로였으며, 주흘관(제1관문), 조곡관(제2관문), 원터, 교구정터 등의 사적지가 있고 완만하게 흐르는 계곡에는 와폭과 담이 산재하여 있다. 현재 이 일대는 문경새재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수안보온천, 월악산국립공원과 가깝다.

 

[故지 현옥 추모비]

조령산 산정에는 정상임을 알리는 팻말과 더불어 안나푸르나에서 짧은 생을 마감한 여성 산악인 지현옥을 기리는 추모팻말이 서 있다.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만 해도 산에 문외한이었던 지현옥은 이곳에서 암벽등반에 빠진 뒤 산악인이 됐다고 한다. 그녀는 에베레스트 등정과 가셔브럼Ⅱ봉(8035m) 무산소 단독 등반 등, 여성으로는 믿지 못할 기록을 남긴 채 1999년 4월 히말라야 안나푸르나에서 짧은 생을 마감했다.

지현옥이 활발하게 활동하던 1990년대는 여성이 전문 산악인으로 활동하는 것이 매우 어려웠다. ‘여자가 무슨 산이야!’하는 곱지 않은 시선이 남성 산악인은 물론 사회 전반적으로 팽배해 있었다. 게다가 여성 산악인을 후원하려는 업체가 없어 원정 비용을 조달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실제로 지현옥은 대학 후배들과 텐트와 유자차 등을 팔아 원정 비용을 마련했다.

1993년 한국 여성 에베레스트원정대의 대장으로 뽑힌 지현옥은 일부 남성 산악인들의 도를 넘는 간섭과 우월의식 속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차별과 좌절을 겪는다. 그렇지만 지현옥은 보란 듯이 여성 원정대를 이끌고 세계 최고봉 등정에 성공해 후배 여성 산악인들이 활동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다. 훗날 지현옥은 당시의 힘들었던 상황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기도 했다. “에베레스트는 또 다른 나를 발견하는 시험무대였다. 온몸을 갈기갈기 찢을 것 같던 육체적 고통을 첫 원정에서 체험했다면 에베레스트에서는 넘을 수 없는 사회적 편견을 넘어가야만 했다. 여성 등반가를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 앞에서 좌절의 고통과 서러움을 이겨내고서야 에베레스트로 가는 길은 열렸다. 그런 사회적 냉소와 질시에 비하면 시체가 나뒹구는 에베레스트 사우스콜의 죽음의 공기도 견딜만했다. 여자끼리 만의 오기로 뭉쳐진 팀을 이끌었고, 나는 그 모든 고통으로부터 자신을 견뎌내게 하는 데 성공했다.”

 

 

지현옥(1959년-1999년)은 대한민국 논산 출신의 여성 산악인이다.등반 경력 1988년과 1993년에 대한민국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매킨리 산와 에베레스트 산 등정에 성공했다. 1999년 엄홍길과 함께 안나푸르나 등정한 후에, 하산 중 실종되었다.

 

 

 

◆[신선 암봉] 937m

신선암봉과 깃대봉은 조령산 주능선상의 북쪽 방향에 있는 바위층이 많은 산이며, 조령산 구간 중에서 어려운 암릉 코스에 속한다. 그리고 깃대봉은 조령 제3관문의 서남방향의 능선에 가까이 보이는 봉우리로 그 모습이 깃대처럼 뾰족하게 솟아 올라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깃대봉의 정상 남서면은 치마바위봉이라 부르기도 한다.

신선암봉은 조령산과 새재(조령 제3관문)의 중간정도에 위치해 있으며 능선상의 암봉에 불과하지만 괴산군에서는 "괴산의 명산"이라고 하면서 별도 소개하고 있기도 하다.

 

 

[깃대봉(치마바위)]

산 이름은 정상 일대에 있는 화강암 절벽이 치마를 펼친 듯하다하여 생겨났으며, 산 모습이 깃대처럼 뾰족하다 하여 깃대봉이라고도 한다. 조령산 정상 북쪽 능선에 있다.

 

 

◆[조령] 650m

조령은 다른 이름으로 새재라고도 불리는데,

 

1.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들어 쉬어 가는 험하고 높은 고개

 

2. 새(억새)가 우거진 고개(草岾)-고려사 기록(초점)

새재 골짜기 마을 이름을 살펴보면 조선시대 초곡방(草谷坊)으로 정했고, 현재까지도 상초리(上草理) 하초리(下草理)로 불리는 것을 보면 이 지역에 새(억새)가 많았던 모양이다.

 

3. 하늘재와 이우리재(이화령) 사이(새)의 고개

 

4. ‘새로 생긴(新) 고개’라는 뜻이다.

일찍이 신라 때부터 영로가 개통된 계립령과 죽령이 옛 고개, 묵은 고개임에 비해 늦게 생긴 고개, 새로 생긴 고개라는 것. 조선시대부터 영남에서 한양으로 통하는 가장 큰 대로(영남대로)로서 '영남'이란 명칭도 조령의 남쪽지방이란 뜻이다.

 

5. 비지재, 비조령(飛鳥嶺)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영산골에서 평천리로 넘어가는 주흘산 중턱에 위치한 고개로 옛날에 비조룡(飛鳥嶺)이라고 하는 전설상의 새가 영산골에서 평천으로 넘어가려고 날아가다 주흘산에 가로막혀 단숨에 넘지 못하고 정상에서 쉬어 넘었다고 하여 비조령이라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또한 1700년경에는 최완룡이라는 사람이 이곳에 정착하여 생활하면서 이 재를 비지재라고 불렀다 한다.

 

6. 문인들이 좀더 멋스럽게 표현하는 과정에서 조령이라는 이름을 얻은 듯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조령(鳥嶺)으로 표기되어 있다.

 

 

[조령 관문]

1. 주흘관(主屹關)-영남제1관

남쪽의 적을 막기 위해 숙종 34년(1708)에 설관하였다. 개울물을 흘러 보내는 수구문이 있으며 3개의 관문 중 옛 모습을 가장 잘 지니고 있다.

 

2. 조곡관(鳥谷關)-영남제2관

선조 27년(1594)에 충주인 신충원이 축성한 곳으로 중성(中城) 이라고도 한다. 숙종조에 관방을 설치할 때 옛 성을 개축하였으나 관(關)은 영성(嶺城 : 3관문)과 초곡성(草谷城 : 1관문)에만 설치하고 이곳에는 조동문(鳥東門) 또는 주서문(主西門)을 설치하였다. 그후 1907년에 훼손되어 1975년에 복원하였다. 이렇게 복원한 문루를 옛 이름 조동문(鳥東門)이라 하지 않고 조곡관(鳥谷關)이라 개칭하였다.

 

3. 조령관(鳥嶺關)-영남제3관

새재 정상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쪽의 적을 막기 위하여 선조 초에 쌓고 숙종(숙종 34년 : 1708) 때 중창하였다. 1907년에 훼손되어 육축(陸築)만 남고 불탄 것을 1976년도에 홍예문및 석성 135m와 누각을 복원했다.

 

조령관문은 조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왜장 고니시 유끼나가가 경주에서 북상해 오는 카토오 키요마사의 군사와 합류했던 곳으로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점이었다. 이 때 조정에서는 이곳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신립 장군은 이미 때가 늦었다고 판단하여 충주로 후퇴하였다. 충주로 후퇴한 신립은 탄금대에 배수진을 치고 왜적을 막았으나 전멸하고 만다. 그 후 선조 30년(1597) 2월 충주에서 일어난 의병장 신충원이 파수관으로 임명되어 응암의 일자성(一字城)을 쌓고 가운데 문을 세워 고개 밑을 내려다보게 하는 축성이 끝났다. 이것이 오늘날의 제2관문이다. 신충원은 훈련원 주부(主簿)로 승진하고 조령은 중요 관방(關防)으로 방어책임이 분담되었으나, 임란이 끝나자 조령 수어에도 관심이 없다가 인조 16년 왜구의 동란이 심상치 않아 비국당상에서 조령 등 남관 요충의 수호계책이 논의된 적이 있다.

축성공사는 문경현감 이중창과 손명대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그러나 숙종 38년 5월에 축성상태가 부실하여 무너졌다는 서종태의 보고에 의하여 현감과 영비는 삭탈 당하고 논죄됐었다. 그 규모는 기록에 따라 다르나 남북 18리 18,509보인가 하면, 남북 8리에 둘레 18,509보로도 기록되고 있다.

 

 

[조령 약수]

조령 약수는 조선 숙종 34년[1708년] 조령성을 쌓을 때 새재 정상에서 발견된 것이다. 이 샘은 조선조 선비들이 청운의 꿈을 안고 한양길을 넘나들 때 타는 목을 적셔 주는 역사 속의 명약수로 사시사철 마르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예로부터 이 샘의 물을 많이 마시면 장수를 한다는 백수영천[百壽靈泉]이라고 전해 온다.

 

 

◆[마역봉] 마패봉 927m

馬驛, 馬牌峰. 암행어사 박문수가 이 산을 넘을 때 조령 제3관문에서 쉬었을 때 마패를 관문 위의 봉우리에 걸어놓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지도에는 마역봉으로 되어 있으나 현지에서는 마패봉으로 불린다. 일제 때 지도를 만들 때 오식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부봉] 917m

능선이 대체로 서진해오다가 약간 남쪽으로 치우치면서 만들어낸 봉우리다. 조령산이 건너편으로 마주하고 조령계곡의 ‘꽃밭서들’이 발아래 펼쳐진다. 정산 북쪽에 옛 산성이 있다. 정상은 대간에서 서쪽으로 100m쯤 비켜나 있다. 정상부위가 솥뚜껑처럼 볼록하고 생겼다고 해서 부르게 되었다. 서쪽 능선으로 비슷한 모양의 봉우리가 한 개 더 있다.

 

백두대간 줄기에서 약간 비껴난 부봉은 문경새재 제2관문인 조곡관 뒤에 우뚝 솟아 있는 바위산으로, 모두 6개봉으로 이루어졌고 제2봉이 제일 높다. 조령산에서 동쪽으로 보이며, 주흘산의 북서쪽에 바위벽으로 솟아 있다. 부봉(釜峰)은 멀리서 볼 때 가마솥을 얹어 놓은 형국이라는 뜻에서 붙은 이름이다. 이 일대는 물박달나무·자란초·미치광이풀·냉초 등 희귀 동식물이 많아 지방기념물로 지정되었고, 문경시는 1987년부터 10만 그루 이상의 묘목을 심어 박달나무 군락지로서의 명성을 지켜나가고 있다.

 

 

◆[평천재] 월항재

조령에서 북쪽 마패봉을 경유하여 동쪽 백두대간을 따라가면 현재 월항삼봉(月項三峯·857m)이라 일컫는 탄항산(炭項山)이 자리하고 있다. 탄항산은 ‘項’자가 유사자형인 ‘頂(정)’자로도 잘못 표기되어 동국여지승람 문경조 등에는 ‘탄정산(炭頂山)’으로 표기되기도 했으나, 이보다 앞서 이미 세종실록지리지 문경조에 탄항산으로 일컬어져 왔으며, 조선 후기의 여지도서·대동지지 등에도 이를 탄항산으로 바로잡아 놓아 현재까지도 탄항산이란 산 이름이 그대로 전하여 온다. 다만 현대에 이르러 발간된 각종 지도상에 월항 마을 부근의 세 봉우리라는 의미로 누군가가 ‘월항삼봉’으로 잘못 표기한 이래 이 산이름으로 잘못 왜곡되어 많이 불리어지고 있다.

 

 

[주흘산] 1106m

조령산, 포암산, 월악산 등과 더불어 소백산맥의 중심을 이루며 산세가 아름답고 문경새재 등의 역사적 전설이 담겨 있다. 산의 북쪽과 동쪽은 깎아지른 듯한 암벽으로 이어져 있기 때문에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 또 동쪽과 서쪽에서 물줄기가 발원하여 신북천과 조령천으로 흘러드는데, 이 물줄기들은 곳곳에 폭포를 형성한다. 그중 유명한 것이 발원높이 10m의 여궁폭포와 파랑폭포이다. 산기슭에는 혜국사(惠國寺)가 있고, 주흘산과 조령산 가운데에 난 계곡을 따라서는 문경관문(聞慶關門)이 세워져 있다.

해발 520m에 위치하는 혜국사는 신라 문성왕 8년(846) 보조국사 체징(體澄)이 개창한 고찰인데, 고려 말 홍건적이 쳐들어왔을 때 공민왕이 난을 피해 이곳에 머물렀다고 해서 더욱 유명해진 절이다. 역사의 애환과 수많은 사연을 지닌 문경관문은 사적 제147호로 지정되어 있다. 제1 ·제2 ·제3 관문 및 부속 성벽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제1 ·제2 ·제3 관문은 양쪽 산의 골짜기에 위치하며 관문 좌우의 성벽은 능선을 따라 우회한다.

산 정상에 올라서면 운달산과 그 왼쪽으로 멀리 소백산 등이 이어진다. 남쪽에 백화산, 서쪽에 조령산, 북쪽으로는 1,107고지인 주봉이 보인다.

 

 

[성황당]

영남 제1관문이라고 하는 주흘관에서 오른쪽으로 보면 성황당이 있는데, 이곳은 여신을 모신다. 수많은 전설이 소개되고 있는데 그 중 하나인 최명길(崔鳴吉)의 전설을 소개한다.

 

최명길은 조선 인조 때 영의정을 지냈다. 최명길이 어렸을 때 안동부사로 있는 외숙께 문후차 안동으로 갈 때 새재를 넘게 되었다. 그때 용모가 단정하고 자색이 아리따운 젊은 여인이 뒤를 따라오면서 “험한 산길이라 여자 혼자 무서워 갈 수 없으니 동행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을 건넸다. 최명길은 성격이 호방한데다가 젊은 여인이 동행을 원하는지라 쾌히 승낙하고 동행하면서 그 여인의 정체를 살피고 있었다. 앞서가던 여자도 그 눈치를 차렸는지 뒤를 돌아보고 방긋 웃으며 “공이 저를 의심하는 모양이니 내 정체를 말씀하리다. 저는 사람이 아니고 새재 성황신인데 안동사는 좌수(左首) 모씨가 서울 갔다 오는 길에 성황당을 지나면서 성황당에 걸려 있는 치마를 훔쳐 제 딸에게 주었으니 이런 고약한 자가 어디 있습니까? 지금 좌수딸을 죽이러 가는 길인데 우연히 공과 동행하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최명길의 눈치를 살핀다.

최명길은 마음속으로 놀랐으나 태연자약하게 “인명은 재천인데, 죽일 것까지야 없지 않소라고”라고 하며 용서할 수 없느냐고 물었다. 그 여자는 한참 후에 공은 미구(未久)에 정사 공신으로 영의정에 오를 몸이요, 병자호란이 일어나는데 공은 큰 공을 세우실 것입니다. 그러나 명나라는 망하고 청나라는 흥할 것이니 부디 청과 화친하여 이 나라 사직(社稷)을 보전하여야 합니다”라 일렀다.

“오늘 좌수의 딸을 죽일 것이되, 공의 체면을 봐서 징벌(懲罰)을 할 것이니 공은 이렇게 하여 제 체면을 세워주시요”라고 한 뒤 간 곳이 없었다. 최명길은 서둘러 안동 모 좌수의 집을 찾으니 좌수딸이 급사하여 집안이 발끈 뒤집혀 경황이 없었다. 최명길은 주인을 찾아 인사를 나눈 후 “딸은 내가 회생시킬 수 있으니 딸 있는 방으로 안내하시오”하니 주인은 죽은 딸을 살리겠다고 감사히 여겨 최명길을 딸방으로 인도하였다. 새재에서 본 성황신이 좌수 딸의 목을 누르고 있다가 일어나며 “이제야 오십니까?” 하고 인사한다. 성황신과 최명길의 대화는 다른 사람에게 들리나 성황신이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문경새재 성황당에서 가져온 치마를 빨리 불사르고 깨끗한 음식으로 제사 지내면 딸이 회생할 것이니 염려마시오” 라고 말하자 좌수는 백배사례하고 시킨대로 하니 딸이 다시 살아났다. 그 후 과연 최명길은 벼슬이 차츰 올라 영상이 되고 병자호란 때 중의를 물리치고 당시 정세를 잘 파악하여 치욕을 참고 화청정책을 채택하여 국난을 수습한 사실은 성황신과의 인연이었다는 사화가 구전되고 있다.

 

 

 

 

[문경새재]

문경(聞慶)이 과거 보러 한양으로 갔던 선비들이 급제했다는 경사스런 소식을 제일 먼저 듣는 곳이라는 데서 유래했다는 말도 있을 만큼, 이 고개는 영남의 선비들이 청운의 꿈을 품고 과거 보러 가기 위해 넘던 고개였다. 황간의 추풍령을 넘으면 추풍낙엽처럼 과거에 떨어지고, 풍기의 죽령을 넘으면 대나무처럼 죽죽 미끄러진다 하여 문경새재를 넘는다는 속설이 떠돌았다. 그러나 여지승람과 대동지지 등의 문경조 연혁에 의하면, 이미 고려 태조 때부터 이 고을 이름을 문희군(聞喜郡)이라 불러왔고, 고려 현종 이후 조선조 이전 시기에 ‘聞喜’의 기쁠 희(喜) 자와 유사 의미를 지닌 ‘慶’자로 고쳐 문경이라 불러온 것을 보면, 위의 지명유래는 아마도 부회되어 생겨난 속설일 것이라 추측된다.

 

당시의 교통여건으로는 낙동강과 한강을 잇는 가장 짧은 고갯길이었던 새재는 영남의 선비를 비롯한 보부상, 영남의 세곡(稅穀)과 궁중 진상품 등 각종 영남의 산물이 새재길을 통해 충주의 남한강 뱃길과 연결되어 서울 한강 나루터에 닿았으니 한강과 낙동강의 수운(水運)을 활발하게 연결시켰던 교통의 요충이었고 또 조령산성 조령원터를 비롯하여 수많은 문화유적들이 남아있는 역사의 현장이며 '신립장군과 새재 여귀', '산신령과 호랑이' 등등 숱한 사연이 전해져 오고 있는 곳이다.

 

-영남대로

영남대로는, 조선시대에 들어와 우리나라 전역을 잇는 간선 도로체계가 완비되면서부터 불려지기 시작한 도로 이름이다. 조선 초, 한양을 중심으로 아홉 개의 간선도로가 확정되었는데 그 중 백두대간을 넘는 고갯길은 대충 이렇다.

백두대간 철령 넘어 함흥, 경흥을 지나는 제2로, 원주지나 대관령 넘어 삼척, 평해에 이르는 제3로, 충주에서 문경새재 넘어 점촌에서 대구, 부산에 이르는 제4로, 문경새재 넘어 점촌에서 상주, 통영에 이르는 제5로가 그것이다.

결국 새재는 한반도에서 가장 번성한 두 문화권이었던 백두대간 동남쪽 낙동강유역과 서북쪽의 한강유역을 묶는 매듭과도 같은 고갯마루인 것이다.

 

-새재와 신립(申砬) 장군

신립 장군은 1546년에 태어나 자는 입지(立之)이고 시호는 충장(忠壯)이고 본관은 평산(平山)이며 생원(生員) 화국(華國)의 아들로 22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 도총 도사 경력 진주판관을 거쳐 은성부사가 됐다. 육진을 괴롭힌 니탕개를 두만강 건너 소굴까지 가서 소탕하고 함경북도 병사로 승진했으며 니탕개를 잡아죽이는 등 전공이 혁혁하여 평안병사를 거쳐 한성부판윤이 되었다. 임란이 일어나자 삼도도순변사로 임명되어 선조가 친히 검을 하사하며 격려하였다. 같이 간 김여물이 조령에 진지를 구축하고자 건의했으나 적이 이미 고개 밑에 당도하였으니 고개에서 부딪치면 위험하고 우리 병정은 아무 훈련 없는 장정들이라 사지(死地)에 갖다 놓지 않으면 용기를 내지 않을 것으로 알고 천험의 요새인 새재를 버리고 달천(達川)에 배수진을 쳐서 장열한 전사를 하였는데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임란을 당하여 영남의 패보가 서울에 도달하자 조정에서는 대경실색하였다. 선조대왕께서는 신립 장군으로 하여금 모병 대적하게 하고 일방 순변사 이일 장군을 상주에 급파하여 방어케 하였다.

대치중인 왜장 소서행장은 임진 4월 24일 상주를 포위 공격하자 중과부적으로 이 장군은 대패하여 문경 조령으로 진지를 옮기게 되었다. 이때 중도인 당교에서 남하하는 신 장군과 만나 대패한 사실을 전하고 신 장군과 함께 문경으로 회군하여 방어대책을 강구하기 위해 제장을 소집하여 작전 회의를 개최하였다. 이때 회의를 주제하는 신 장군 앞에 한 도승이 나타나 천험의 요새인 조령에 포진반격을 가하면 왜적을 격퇴할 수 있다고 간곡히 진언하였다. 그러나 신 장군이 인솔한 병사는 충청도 태생으로 산악전에 익숙하지 않을 뿐더러 사기가 저하되어 평야인 충청도 지대에서 적을 격퇴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는 주장이 많으므로 신 장군도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유예미결하고 있었다. 그 때에 신 장군의 소식에 장군을 사모하다가 함원자결한 처녀의 원귀가 장군앞에 나타나 "신 장군은 대명을 받아 왜적을 격멸하는데 있어 어찌 이와 같이 협착한 새재에 포진하여 후세의 조소거리가 되게 하시나이까 충청도 달천의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싸우면 크게 대승하리라" 말하니 새재에서 싸울 마음이 없던 충청도 출신 장병들이 떠들고 일어나는지라 신 장군은 요사스런 원귀의 말을 믿고 부장 김여물 등은 회군의 불가함을 극간하고 조령방어책을 주장하였으나 신 장군은 그 계략을 묵살하고 충주 탄금대에 포진하였다. 왜적과 대진한 신 장군과 전 장병은 순사 대패하고 말았으니 조령을 사수하였던들 임란의 양상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월악산 국립공원]

17번째로 우리나라 국립공원으로 지정(1984. 12. 31)되었다. 제천시, 충주시, 단양군, 문경시 4개 시, 군에 걸쳐 있으며 북으로 충주호반과 청풍호반이 월악산을 휘감고 동으로 단양8경과 소백산국립공원, 남으로 문경새재와 속리산 국립공원과 같은 아름다운 자연경관으로 둘러싸여 있다. 월악산 영봉은 국사봉(1,094m)이라고도 하며 가파르기로 이름 나 있고, 암벽 높이가 150m, 둘레가 4km나 되는 거대한 암반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대간길인 포암산과 마주하고 있다. 황장산 대미산 포암산이 월악산 곡립공원에 속하며 대간 능선이다.

 

월악산 정상은 대간에 포함되지 않지만 그 자체로 하나의 웅장한 사뇌를 만들어 금수산, 황정산, 도락산, 용두산, 문수봉, 매두막, 하설산, 만수봉, 주흘산, 뇌정산 등 수많은 고산준봉을 거느린다. 월악산은 ‘달 모양으로 생긴 바위산’이라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다. ‘산경표’에는 ‘月岳’으로, ‘동국여지승람’에는 ‘月嶽’으로 나와 있는데 모두 ‘달뫼’라는 뜻이다.

월악산 언저리는 신라의 마지막 태자, 마의태자의 행적이 묻어있는 곳이다. 신라 경순왕 9년, 신라가 고려에 항복하기로 결정하자 마의태자는 ‘천년 사직을 그리 쉽게 내줄 수 있느냐’며 누이인 덕주공주 등 측근을 대동하고 서라벌을 등졌다. 마의태자는 문경과 중원의 경계인 하늘재를 넘어와 미륵사에 머물렀다. 이곳에서 마의태자는 나라 되찾기를 염원하면서 내세불인 미륵불 석불입상과 5층석탑을 만들었고, 덕주공주는 덕주골에 덕주사를 짓고 자신의 모습을 닮은 마애불을 만들었다. 마의태자는 금강산으로 가기 위해 덕주공주와 이별하고 국사봉(월악 영봉 정상)에 올라 ‘국사봉이 물에 비치고 뱃재에 재가 오갈 때에 나라를 구하는 시기가 되리라’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러나 그 시기는 결국 오지 않았다. 다만 오늘날 월악산 아래에 충주호가 생겨 국사봉의 그림자가 물에 비추고 뱃재는 충주와 단양을 오가는 나루터가 되었다. 월악산을 떠난 마의 태자는 오대산을 거쳐 금강산의 입구인 단발령에서 머리를 깎고 금강산에 들어갔다.(마의태자가 오대산에서 들른 곳은 아마도 청학동 소금강 지역이었던 것 같다. 험한 산새를 이용해 축조한 아니산성을 비롯해 그 주변에 있는 연병장, 사형대, 수양대, 망군대, 식당암 등은 옛날의 군사시설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오랜 역사에서 오대산 청학동지역이 국가 사이의 격전장이 되었던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광복의 뜻을 품었던 마의태자가 재기의 칼날을 갈았던 곳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만수봉] 983m

월악산 국립공원권에 속해 있으며, 백두대간 주능선에서 월악산 쪽을 살짝 비켜 앉아 만수계곡 건너편에 있는 포암산과 마치 오누이처럼 다정스런 모습을 하고 있는 산이다. 또한 포암산과 함께 암산으로 이루어졌고 포암산과 산행코스도 비슷하다.

만수봉(萬壽峰) 정상에서 북서쪽으로 가지를 치는 능선상에 용암봉이 솟아 있다. 만수교와 만수골의 이름을 빌어 만수봉으로 불려지고 있다.

 

 

◆[탄항산(월항삼봉)]

탄항산의 탄항(炭項)은 아마도 변방·국경 등을 지킨다는 의미의 수자리 ‘수(戍)’자와 지키기에 알맞은 ‘목’이라는 의미의 ‘항(項)’ 자가 합성되어 ‘수항’이라 일컫던 것이 숫항→숯항으로 전음되어 숯 탄(炭) 자의 훈을 빌리어 뜻옮김 하여 불리어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세종실록지리지 등에 의하면, 이미 조선 초기부터 이 산정에 봉수대가 시설되어 있었던 군사적 요충지였다는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월항삼봉의 월항(月項)도 여지도서 문경조의 조령산성 기록에 의하면, 조선시대에는 음과 훈이 혼용된 달항(達項)으로 불리었음을 살 필 수 있다. 달항은 다시 달목→달매기로 전음되어 속칭되다가 현대에 이르러 다시 뜻옮김하여 월항이라고도 칭하게 된 것이다.

이의 본래 이름 달항은 아마도 ‘큰 목’이라는 의미에서 일컫던 큰 고개의 목이 되는 곳, 곧 평천재(월항재) 부근 959m 안부에서 한 줄기는 백두대간 줄기로서 서쪽으로 뻗어가고, 또 한 줄기는 남쪽으로 뻗어가 주흘산 줄기를 형성하고 있는 크고 중요한 산줄기의 목을 지칭하던 땅이름으로 추측된다.

 

 

◆[하늘재]

경북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에서 충북 충주시 상모면 미륵리 사이를 이어주는 도의 경계로, 하늘과 맞닿아 있다고 해서 이름 지어진 ‘하늘재'는 525미터로 이름처럼 높지는 않지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고갯길이다. 겨릅산, 계립령, 대원령으로도 불리는 하늘재는 우리나라 최초로 뚫린 고갯길. 신라시대부터 북방의 문화를 영남지방에 전해주던 관문으로, 지금도 성벽이 남아 있다.

신라 제 8대 아달라(阿達羅)왕이 재위 3년(156년)에 북진을 위해 길을 열었다. 하늘재는 남한강의 수운을 이용, 한강 하류까지 일사천리로 뻗어나갈 수 있는 지리적 요충지이다. 신라는 일찍이 하늘재를 교두보로 한강으로 진출했고 백제와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했다. 이처럼 중요한 전략 거점이다 보니 하늘재는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곳이기도 하다. 고구려 온달과 연개소문은 하늘재를 되찾기 위해 끊임없이 전쟁을 시도했으며, 고려시대 ‘홍건적의 난'으로 공민왕이 몽진할 때도 이 길을 이용했다. 신라 망국의 한을 품고 마의태자와 그의 누이 덕주 공주가 금강산으로 향할 때 피눈물을 머금고 이 고개를 넘었다 한다. 충청북도는 자연환경명소 100선의 하나로 선정했고, 월악산국립공원 관리사무소는 하늘재의 역사를 되살리기 위해 고갯길 1.5km 구간을 ‘역사 생태관찰로’ 로 조성했다.

 

또한 불가의 불성이 깃든 관음세계에서 미륵세계로, 현세에서 미래로 가는 희망의 상징. 지명처럼 미륵리에는 마이애미 미륵불상과 문화재급 다수가 있으며 불가의 요람으로 되어 있다.

 

1. 겨릅산, 계립령

겨릅은 겨릅대의 준말로, 껍질을 벗긴 삼대를 일컫는 순 우리말로, 계립(鷄立)은 겨릅을 소리 옮김한 것이다.

하늘재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권2 「신라본기」로 거슬러 오른다. 이 기록에는 아달라 이사금 3년 “여름 4월에 계립령 길을 열었다”고 했다. 아달라왕 3년은 156년이니 죽령 길의 개척보다 2년이 앞선다. 같은 책 권41 「열전」의 김유신 조에 등장하는 이름은 마목현(麻木峴)이다. 고구려에 도움을 청하러 간 김춘추에게 보장왕이 말하기를, “마목현과 죽령은 본래 우리 땅이니 돌려주지 않으면 보내주지 않겠다”고 한 것이 그것이다. 또한 같은 책 권45 「열전」의 온달 조에는 “계립령과 죽령 북쪽의 땅을 되찾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온달의 출사표로 등장한다.

 

2. 대원령(大院嶺)

『고려사』에는 대원령(大院嶺)이란 이름이 보인다. 고려 고종 42년(1255) 10월에 몽고 장수 차라대(車羅大)가 이끄는 “몽고군이 대원령을 넘자 충주에서 정예군을 보내 천여 명을 죽였다”고 기록하였다. 대원령이란 바로 미륵대원에서 시작되는 말이다. 연구가들은 미륵사지의 창건 연대를 대략 10세기로 어림잡고 고려시대의 절 이름을 대원사로 보는 견해에 거의 동의한다. 우리나라의 역참이 전국적으로 체계를 갖추는 것 역시 고려시대이니 본래의 절에 원(院)을 두고 대원, 혹은 미륵대원이라 불렀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하늘재 또한 이 무렵에 대원령이란 이름을 얻는다.

 

3. 마목(痲木) 마골(麻骨岾)

마목이나 마골은 겨릅을 한자로 뜻옮김 한 것이다.

조선시대 『세종실록지리지』는 마골점(麻骨岾) 봉수를 기록에 남기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이르면 비로소 이를 정리하여 “계립령을 사람들은 마골점이라 한다”거 나 “속칭 마골산이라 한다”는 기록으로 발전한다. 한편으로 궁금한 것은 미륵대원에 관한 기록이 사라지는 일이다. 조선시대 초기에 이미 새재 길이 새로 개척되고 하늘재 길은 점점 그 쓰임새를 잃게 되지만 가령, “관음원은 계립령 아래 있다”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처럼 여전히 하늘재 길의 역원이 등장하는 반면 유독 대원과 미륵사지에 대한 기록은 찾을 길이 없다.

 

4. 한원령(限院嶺)

한원령이 음과 훈이 혼용되어, 한원령→한월령→한월재→하늘재로 전음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또한 大院의 院을 훈독하여 에운담, 곧 ‘울’로 읽으면 ‘한울’로 읽을 수도 있으므로, 한울재→하늘재로 전음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계립령 유허비]

...태초에 하늘이 열리고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면서 영남과 기호지방을 연결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맡아 장구한 세월동안 역사의 온갖 풍상과 애환을 고스란히 간직해온 이 고개가 계립령이다.

경북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와 충북 충주시 상모면 미륵리의 분수령을 이루고 있는 이 고개는 속칭 하늘재, 지릅재, 겨릅산, 대원령이라 부르기도 하며 신라가 북진을 위해 아달라왕3년(156년)4월에 죽령과 조령사이의 가장 낮은 곳에 길을 개척한 계립령은 신라의 대로로써 죽령보다 2년 먼저 열렸다. - 중략 -

조선조 태종1년(1414년) 조령로(지금의 문경새재)가 개척되고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조령로가 험준한 지세로 군사적 요충지로 중요시되자 계립령로의 중요성은 상대적으로 점차 떨어지게 되어 그 역할을 조령로에 넘겨주게 되었다. 오랜 세월동안 묵묵히 애환을 간직해 온 계립령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겨 보고 고개를 넘는 길손들에게 지난 역사의 향취를 전하고 그 뜻을 기리고자 이곳에 유허비를 세운다. - 2001. 1 문경시장 -

 

 

◆[포암산] 962m

충청북도 충주시 상모면과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에 걸쳐 있는 산으로 월악산국립공원의 가장 남쪽에 속하는 산이다. 포암산(布巖山)은 거대한 통바위로 이루어져 옛날에는 베바우산이라고 불렀다. 반듯한 암벽이 키대로 늘어서 있어 거대한 베 조각을 이어 붙여놓은 듯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또한 희고 우뚝 솟은 바위가 삼대 즉, 지릅같이 보여서 마골산, 계립산이라고 불렸다는 기록도 전해오고 있다. 만수계곡에서 들어가면 쌍봉의 육산처럼 보이지만 문경시 쪽에서 보면 암봉으로 보인다.

백두대간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고 산세가 험하여 삼국시대부터 군사적 요충지였다.

 

 

◆[관음재]

문경읍 관음리 뒷고개로 미륵리와 연결된다. 미륵리에서 접근하자면 만수골의 끝에 해당된다. 등산객 외에는 이용하지 않는다. 옛날 신라의 망국태자인 마의태자가 지금의 관음리에서 관음보살을 현몽하고 하늘재를 넘어 미륵리에 불상을 조성했다고 한다. 관음리에 사점이라는 지명이 있는데 옛날에는 이곳에 신라 사람들이 세운 절이 있었다고 한다.

 

 

◆[마골치(麻骨峙)]

포암산과 만수봉의 갈림길이다.

 

 

◆[꼭두바위봉] 838m

바위가 마치 꼭지처럼 생겼다 해서 꼭두 바위라고 하였으며, 마을도 바위 이름을 따서 꼭두바위 또는 꼴두바우라고 불리어 졌다고 한다. 그후 1860년경 안동김씨(安東金氏)가 처음으로 이곳에 정착하여 살았다고 한다.

 

경북 문경시 문경읍과 충북 제천시 덕산면 경계를 이루는 백두대간 상에 솟아 있는 꼭두바위봉은 암봉들이 우뚝 솟아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꼭두바위로 올라서는 홈다래골 입구에서부터 뚜렷한 등산로가 있기는 하지만 등산객들의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만큼 알려지지 않은 산이라 능선길마다 태고적 자연미가 남아 있다. 정상은 수림이 무성하여 조망이 좋지 않으나 서쪽으로 조금 가면 확 트인 바위봉을 만날 수 있다. 하늘금을 이룬 운달산과 문필봉이 보이고 발 아래로 신북천 골짜기가 내려다 보이고 평천리 마을에 음영을 내린 주흘산도 바라다 보인다.

 

 

◆[부리기재]

대미산 서쪽에 위치한 노루목으로 제천과 문경을 걸어서 넘나드는 고갯길이다. 지금은 대미산과 용하구곡을 연계하는 등산로의 중요한 경유지이다. 부리기재 이후의 대간 등줄기는 흙 반, 돌 반이 섞인 상태로 관음재까지 이어진다. 구간 내내 무수한 잡목지대를 지난다. 관음재 직전에 위치한 무명봉에서 월악능선이 갈라져 나가 충주호반 가까이에서 월악 영봉을 집어 놓는다.

부리기재는 ‘새의 부리처럼 뾰족하고 날카롭다’는 고개의 모양에서 유래한다. ‘기’는 명사형 어미다. 마침 서북쪽 4Km지점에 꾀꼬리봉이 있어 ‘새의 부리’임에 힘을 싣는다.

 

 

◆[대미산] 1115m

대미산은 문경시를 지나는 백두대간상에 위치한 큰 산으로 문경지역 모든 산의 주맥(主脈)이다. 문경시 문경읍 중평리와 동로면 생달리에 속한 대미산은 조선 영.정조 때 발간된 문경현지(聞慶縣誌)에는 대미산을 문경제산지조(聞慶諸山之祖)라 적고 있다. 대미산에서부터 문경구간의 백두대간이 시작된다는 의미와 함께 문경의 산들 중에서 높이로도 가장 높다는 뜻이다.

「산경표」나 문경현지에 적힌 지명은 黛眉山 즉, ‘검은 눈썹의 산’이다. 어디에서 보거나 크게 두드러져 뽐내는 모양이 아닌 그저 있는 둥 마는 둥 부드러운 능선이 흐른다. 정상부에 꼭 눈썹만큼의 봉우리를 돋아 놓았을 뿐이다. 부드러움으로 대변되는 대미산은 오름길이 가파른 곳도 있지만 험악한 모양을 한 곳은 없다.

 

조선 영·정조 때에 발간된 문경현지에 ‘대미산(黛眉山)은 현의 동북쪽 30리에 있고 소백산에서 뻗어와 본 현 여러 산이 여기서 비롯된다’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 대미산은 한문으로 ‘黛眉山’이라 쓰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현재 본래의 이름외에 ‘大美山’이라고 쓰는 것은 1936년 발간된 조선환여승람(朝鮮?輿勝覽)의 문경군편 산천(山川)조에 ‘대미산은 군의 동북쪽에 있고 순흥 소백산에서 뻗어와 분 군 여러 산의 주맥이 되었다. 퇴계 이황이 대미산(大美山)으로 명명했다’라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퇴계 이황선생께서 애칭으로 뜻을 달리 ‘大美山’으로 부르게 된 것으로 보인다.

 

 

 

[눈물샘]

대미산 정상에서 백두대간을 따라 북쪽으로 1045봉을 향하다가 가장 낮은 안부에서 오른쪽 골짜기로 들어서면 이곳에서 가끔 산삼을 캤다는 소문이 들리는 심마골이다. 심마골로 내려서는 잘록이에서 70m 아래에 산악인들이 샘을 보수하고 ‘눈물샘’이라 이름 붙인 샘이 있다. 10년 전쯤에는 샘이라기보다 그냥 물이 조금 고여 있는 웅덩이로 낙엽에 덮여 있어 식수로 사용이 불가능했던 것인데 주위의 돌을 모아서 샘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눈썹 아래에 위치해 있다 하여 눈물샘이라 한다.

 

 

◆[새목재]

옛날 보부상들이 한양에서 배를 타고 청풍 나루까지 와서 육로로 단양을 넘어가는 통로였다고 한다. 고개의 모양새가 새의 모양을 닮아 붙여진 이름이며, 동산과 작성산을 연결하는 안부지점이기도 하다.

 

 

◆[차갓재] 757.6m

충북 단양 단성면 오전리 차갓마을에서 경북 문경 동로면 생달리 안생달마을까지 넘어가던 고개다. 천왕봉에서 진부령까지 734.65km. 양쪽 모두에서 367.325km 중간 지점이기도 하다.

 

◆[작은 차갓재]

황장산으로 향하는 오름길은 제법 가파르다. 가팔라지던 숨결이 편안해질 즈음, 길은 완만한 내리막을 이루며 호젓해지는데, 내리막이 끝나면 또 한 고개가 나타난다. 그래서 대간꾼들이 작은차갓재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라 한다.

 

 

◆[황장산] 1077.3m

황장산(黃腸山)은 북쪽계곡에 산성이 있어 작성산(鵲城山)이라고도 하며 산들머리에 봉산(封山)표석이 있는 유서깊은 산으로서 계곡과 수려한 암봉이 자랑이다.

이 산은 백두대간이 지나는 산으로서 국립지리원에서 발행한 1/25,000지도에 황정산(黃庭山)으로 표기되어 있으나 정확한 이름은 황장산이라 부르는 것이 옳다. 황장목이 많고 1925년 조선총독부 임시 토지조사국에서 발행한 『조선의 산악 명칭과 소재 높이』에 황장산이라고 표기되어 있으며 현존하는 노인들이 황장산이라고 부르고 있다.

황장산은 동로면 한 가운데에 솟아 있다. 산경표에 기록된 본래의 이름은 작성산(鵲城山)으로 문안골에 있는 고려시대의 산성인 작성산성에서 유래했다. 지금의 황장산(黃腸山)은 이곳에서 질 좋은 소나무인 황장목이 생산돼 궁궐의 용재로 사용했고, 조선조 숙종 때인 1680년 이곳의 벌목을 금지하기 위해 "황장봉산(黃腸封山)"했다고 기록되어 이 후 "황장봉산"을 줄여서 "황장산"으로 불렀을 것으로 생각된다. 황장목은 줄기의 고갱이 부근에 송진이 적절히 베어들어 속살이 누런 소나무를 말하는 것으로, 그 모양이 마치 누런 창자와 같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균열이 적고 단단해 임금의 관이나 대궐을 만드는 데 쓰였다 하며, 封山이란 나라에서 나무 베는 것을 금지하던 산을 말한다.

 

〈여지도서〉에는 경상도 예천군 산천조편에 “작성산”군의 북쪽 칠십리에 있다. 소백산이 북으로부터 와서 이 산이 되었다. 서북으로 충청도 충주의 경계에 이르고 황장산으로 봉했는데 둘레가 40리 이다. 가운데 고성이 있고 석문과 기지가 있다. 문경현 산천조에 “황장봉산, 대미산 부근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 동로면 명전리 옥수동 벌천계곡 하류에 봉산 표석이 남아 있을 뿐, 황장산에 황장목은 없다. 대부분 활엽수림으로 천이가 완성됐기 때문이다. 그나마 정상 앞뒤 암릉 주위에 몇 그루가 우람한 자태로 이름값을 하고 있다.

 

문경시에서 펴낸 <문경의 명산>이라는 책을 보면 ‘봉산으로 정한 곳은 이곳 외에도 32곳이나 되지만 다른 곳에서는 표석을 발견할 수 없고 유독 이곳에서만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전영우 교수(국민대 산림자원학과)가 쓴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소나무>(현암사, 2004)를 보면 경북 울진군 소광리에서도 황장봉표가 발견됐으며, 강진, 순천, 고흥에 하나씩 외에 강원도와 경상도에 걸쳐 총 60곳에 황장봉산이 지정됐다고 한다.

 

 

◆[감투봉]

암릉지대와 황장재를 지나서 만나는 암봉으로 높이 솟아 있다. 주위는 전체가 깎아지른 벼랑이다. 바람이 심하여 정상에 서 있는 낙락장송이 제 가지로 몸을 감싸며 꽈배기를 튼다. 감투는 벼슬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성인 남자들이 머리에 쓰던 탕건을 의미하기도 한다. 봉우리 형상이 감투처럼 생겼다.

 

 

 

 

◆[황장재]

황장재는 감투봉과 치마바위 사이에 위치한 고개로 문경시 동로면 생달리와 동로면 명전리를 잇는 길이다. 이 고개는 생달리의 동로초등학교생달분교(폐교)와 명전리의 문안골로 이어지는 길로 등산로가 잘 나 있다. 문안골쪽으로는 오르는 길에 고려시대에 자연석으로 쌓았다는 작성이 남아 있다. 생달리 토사골쪽은 수리봉이 있으며 지리가 형성돼 암벽훈련 코스로 인기를 얻고 있다.

 

 

◆[폐백이재]

유래에 관한 정확한 문헌은 없지만, 치마바위와 연관있는 듯 보인다. 마을 주민들은 이곳을 지날 때면 귀신이 나온다고 하여 혼자서 길 가는 것을 꺼린다는데, 치마바위와 928봉 사이에 위치한다. 곱게 차려입은 새색시가 시부모에게 폐백을 드리는 광경을 떠올려 폐백이재라 하였다는 설이 있다. 묏등바위와 황장산 사이의 감투봉이 비녀를 꽂아 쪽을 진 것 같아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과도 연관되는 듯하다.

 

 

◆[벌재] 625m

<소백산맥 지역의 교통로와 유적>(박상일, 국사관논총 16, 국사편찬위원회 1990)이라는 논문에 '적성은 바로 벌재의 한역으로 보인다'는 언급이 있다. 벌재의 남쪽 마을이 바로 문경시 동로면의 적성리인데, 한자 표기가 붉을 ‘赤’인 것으로 보아 ‘붉은 재’를 이 고장 말로 벌재라 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뿐만 아니라 단양의 옛 지명인 적성 역시 벌재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고 있는데, 단양읍 벌천리의 속칭이 벌내이고, 벌내는 벌천리 앞을 흐르는 하천의 이름이기도 하다. 고개의 이름도 여기서 유래되어 벌령, 벌치, 벌재라 하였고, 이것이 고개 양쪽 마을(적성리와 단양)의 지명이 된 것으로 보인다.

 

 

◆[들목재]

벌재 도로가 생기기 전 대간을 넘나들던 길이다.

 

 

 

◆[문복대] 1,074m

문복대는 경북 예천군과 문경시, 충북 단양군의 경계지점에 위치한 저수재와 벌재사이에 있는 백두대간상의 산이다. 문복대는 이 산에서 한줄기가 북으로 뻗어 수리봉.신선봉과 단양팔경 중 유명한 상.중.하선암이 있는 도락산을 두고 있다. 이 산 밑에 배나무골,호박골,세작골,성골을 두고 있으며, 이 골짜기들이 모두 동로면 석항리를 이루고 있다. 석항을 돌목이라고 하는데 아직까지 남아있는 예쁜 우리마을 이름이다.

백두대간이 죽령, 도솔봉, 향적봉, 저수령을 지나서 문경시 관내로 들어오면서 처음으로 큰산을 두고 있는데 바로 운봉산이다. 석항리 사람들은 ‘문복대’라고 부르고 있으나 산이름에 ‘대’가 붙어 있어 알아본 결과 옛 이름이 운봉산, 운봉재라 하였다 한다. 운봉재라고 부르는 것은 문복대의 벌재 방향으로 잘록이 부분을 통해 석항리 주민들이 산 너머의 마을로 오가던 길이 있다는 데서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백두대간 산줄기가 소백산을 거쳐 예천군을 지나 문경 땅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지켜 서서 복(福)을 불러오는 문(門)과 같은 첫 산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인 것. 국토지리정보원의 1:50,000 지도에는 문봉재라고 표기돼 있다고 하는데, 1,000m가 넘는 봉우리를 재라고 한 것은 분명한 오식인 것 같다.

정상에서 바라보는 경천호 주변의 붕어 입을 한 천주산과 공덕산이 장관이다. 조망지로서 최적의 장소다.

 

 

◆[옥녀봉]

저수령과 벌재 사이에서 가장 높아 사위가 모두 내려다보인다. 대간은 이곳에서 단양군과 잠시 헤어져 문경시 지경 안으로 진행한다. 남쪽 1Km쯤 떨어진 사면에 삼율광산 작업도로가 올라와 있다. 이 고장에는 옛날에 ‘옥녀’라는 처녀가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간 정혼자를 기다리다가 지쳐서 돌이 되었다는 조금은 흔한 전설이 전해온다. 옥녀가 정혼자를 기다린 곳이 먼 길까지 내려다보이는 지금의 옥녀봉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