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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종주/백두대간자료

화령 구간 지명 해설(추풍령~윤지미산)

by 산엔달 2014. 4. 18.

화령구간 

 대간의 전 구간에서 해발고도가 가장 낮은 지역이다. 최고봉이 793m인 국수봉으로 다른 지역의 고개에 불과한 높이이며, 가장 낮은 곳은 추풍령으로 해발 210m로 매우 낮다. 지대가 낮은 만큼 교통망도 거미줄처럼 얽혀있다.

역사적으로 동서 혹은 남북 정치세력의 상충지역이었으며, 현대에 들어서는 한국전쟁의 격전장이기도 했다.

평야지대가 아니면서도 논농사와 밭농사, 과일농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곳이다. 전통적으로 감이 많이 나고 양잠과 목화농사가 성행했던 곳이기도 하다.

 

-영동군

충북 최남단에 위치해 있으며, 예전부터 교통로로 이용된 북동부의 추풍령과 괘방령은 지금도 고속도로와 지방도가 지나간다.

금강 상류지역으로 곳곳에서 발원한 지류들이 금강에 흘러들고 있는데, 남쪽 석기봉에서 시작, 동부와 북부를 돌아 금강에 합류하는 초강천과 서부의 호탄천, 원당천 등이 있다.

고려 성종 때 계주자사(稽州刺史)를 두었다. 현종 이후에 경상도 상주에 소속되었다가, 조선 태종조에 경상도에서 충청도로 이속시키고 현감을 두었다. 고종에 이르러 영동군이 되었다.

 

-김천시

백두대간의 동남부에 위치한 김천은 당초 산간취락에 불과했으나 조선 초 역마제도가 생긴 후 교역의 요충지로 탈바꿈 되었다.

삼한시대에는 감문국, 주조마국, 문무국, 배산국, 어모국이 감천유역을 중심으로 번성했다. 신라 조분왕 때 장군 석우로가 감문국을 정벌하고 감문군을 설치했으며, 조선조에 김산군으로 이름을 바꿨다. 지금의 김천은 지난 1995년 과거의 금릉군과 통합된 후 시로 운영되고 있다. 금릉이라는 지명은 중국 동진의 수도로서 경관이 빼어났다고 알려진 금릉에서 따온 것으로 전해지면, 김천(金泉)은 옛날에 이 고장에 금이 나는 샘이 있어 김천이라는 이름이 생겼는데 샘에서 나는 금은 나라에서 모두 가져가버려 부역이 두려운 이곳 사람들이 샘을 메워버렸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중화지구]

백두대간을 넘어온 경상도 여섯 고을, 즉 화서, 화북 ,화동, 화남 이 네개 면은 본래 화령현이고, 모동면과 모서면은 옛날의 중모현이다. 중화란 바로 이 상주목을 따르던 화령현과 중모현을 이르는 말이다. 황악산과 속리산 사이, 1,000미터 이상의 산이 없는 대간의 기세가 미약한 곳으로 추풍령에서 화령재까지 약 5-60km에 해당한다. 이 중화지구는 충북 사투리와 경북 사투리가 섞인 형태의 말씨를 쓰고 있으며, 표고가 낮으면서 기온이 3-5도 차이가 나는 고원지대의 특성으로 포도, 배, 사과 등의 과일이 많이 재배되고 있다.

중화 지구가 경상도 땅으로 뻗은 것은 신라와 백제의 마지막 국경에서 연유된 것으로 낮은 산줄기로 이어진 두 곳(화령縣, 중모縣)은 백두대간이 천연의 국경 역할을 상실했기 때문에 힘이 센 어느 한 쪽이 깊숙이 쳐들어 갈 수 있는 유일한 길목이었다.

이러한 분쟁은 최근의 문장대 온천의 개발을 둘러싸고 충북과 경북이 첨예하게 대립한 사건 즉, 돈벌이는 경상도에서 하지만 남한강으로 흘러드는 수질 오염의 대가는 충북에서 치르는 탓에 개발 포기를 한 예가 있다. 이는 백두대간을 따르지 않았던 탓에 일어난 분쟁이었다.

 

 ◆[추풍령] 221m

충북 영동군 추풍령면과 경북 김천시 봉산면의 경계에 있는 고개. 경부선 중의 최고점으로 낙동강과 금강의 분수령이자 한국의 중부와 남부의 경계를 이룸. 높이 221m. 낮고 완만한 고개지만 전략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옛날부터 나라에 전쟁이 있을 때마다 이 고개에서 피 터지는 싸움이 벌어지곤 했다고 한다.

 

금강과 낙동강의 분수령이며, 예로부터 영남지방과 중부지방을 잇는 중요한 교통로였다. 지금도 경부선 철도의 추풍령역이 있고, 4번 국도가 통하며, 경부고속도로의 중간점으로 추풍령휴게소가 있다. 추풍령에서 갈재구간 산행기점인 당마루 새마을 앞에 추풍령 표석이 있다. 추풍령 표석은 88올림픽 성화봉송로를 기념으로 88년 9월 5일 영동군에서 세운 것으로, '구름도 자고 가는 바람도 쉬어 가는' 가수 남상규님의 노래 구절을 적어 놓았다.

그 옛날 남쪽지방 사람들은 한양으로 과거를 치르기 위해 또는 장사를 하려고 말을 타거나 걸어서, 또는 등짐을 짊어지고 달구지를 끌며 이 산등성이를 넘어 다녔을 것이다. 한국전쟁이 터졌을 때도 많은 사람들이 언 발을 절룩거리며 이 고개를 넘어 남으로 한 많은 피난길을 떠났을 것이다.

원래는 추풍령 일대가 분지이다 보니 인근의 지역보다 가을 물이 일찍 들고, 고개치고는 발달한 분지 덕에 가을걷이가 풍성하다 하여, 秋豊이라 했으나, 오늘날에는 대체로 秋風으로 불리고 있다.

 

- 군사적 요충지

임진왜란 때에는 군사적 요충이 되어, 의병장 장지현(張智賢)이 추풍령 오룡동에서 의병 2천명을 이끌고 왜장 구로다 나까마사(黑田長政)가 이끄는 왜군 2만 명을 맞아 분전 끝에 물리쳤고(1차 전투), 다시 밀려온 4만 명의 왜군에게 패하여 장렬히 전사한 곳이다. 장지현은 영동의 매천리에서 태어나 한때 관서의 변방에서 신립의 부장으로 공을 세운 사람이다. 왜군의 선봉 고니시 유끼나가(小西行長)가 이미 한양의 성문을 열어젖히던 임진년 5월 2일의 일이었다.

 

- 영남과 호서의 접경, 당마루

추풍령 면소재지가 있는 작은 산읍이다. 본래는 경상도의 금산군(김천)을 따르던 마을인데 1906년에 충북의 황간군이 되었다가 훗날 황금면으로 이름을 바꾸어 영동군이 되었다. 오늘날엔 지방 자치가 되어 황금면보다는 추풍령면이 두루 소문을 얻기에 이롭다고 그렇게 바꾼 것이다. 백두대간의 분수령이 으레 그렇듯 물이 적어 불편하고 낮과 밤의 일교차가 심하여 곡식보다는 과수가 잘 된다. 물이 적고 토지가 메마르던 옛날에는 그저 메밀 농사가 고작이었다. 고갯마루가 온통 새 하얀 메밀꽃이었으니 추풍령의 다른 이름 백령(白嶺)은 그리하여 생겨났다. 일제 강점기 사기점 골짜기에 저수지를 파 겨우 논농사를 지었으나 이제는 너나없이 작파하고 밭이란 밭은 모두 포도가 주업이다.

명색이야 백두대간의 고개지만 추풍령은 그리 높지 않은 탓에 가다보면 어느 틈에 그만 평지처럼 슬그머니 재를 넘는다. 소문난 고개치고는 별 볼거리가 마뜩찮고 흔한 당집이나 당목 한 그루도 없는데 웬 일인지 마을의 이름만은 예로부터 당마루라 불렀다. 마을을 둘로 쪼개어 경상도와 충청도가 나뉘었으니 당마루 역시 경북의 당마루와 충북의 당마루가 서로 생겨났다. 반쪽은 김천 시민이요, 반쪽은 영동 군민이다.

고갯마루에 배나무를 심은 작은 언덕 밭이 옛날 주막이 있던 자리다. 배나무 밭이 끝나는 밭둑에 도계를 알리는 경계석이 서 있는데 그 기둥돌을 사이에 두고 한때는 경상도 주막과 충청도 주막이 나란히 있었다.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 밤이 아쉬운 경북의 술꾼들이 당마루에 올라와 경상도 주막에서 술을 마시다가 자정이 되면 통행금지가 없는 충청도 주막으로 건너오곤 했다는 일화는 두루 알려진 유명한 이야기다.

추풍령은 언제나 그렇게 구름이 모여들고 바람이 술렁대는 고개였다. 조선 시대에는 역과 원으로 이어진 관로(官路)였으며 일제 강점기에는 경부선을 오가는 기차가 으레 빠짐없이 쉬어가는 곳이었다. 까닭이야 숨가쁘게 고갯길을 넘은 증기기관차가 물을 보충하기 위함이었지만 구름도 쉬어가고 바람도 자고 가는 곳이니 기차인들 그 냥 갈 수 없었을 터이다. 마땅히 역은 번창하고 많은 일본인이 모여 살았던 탓에 유곽의 규모 또한 매우 컸다고 한다. 흙먼지 고갯길을 힘겹게 올라온 목탄차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도저히 그냥은 지나칠 수 없는 곳이 바로 추풍령이었다.

 

- 내륙 한양길의 절반, 반고개

『신증동국여지승람』 금산군 편에 실린 조위(曹偉 1454-1503)의 글에는, “경상도와 충청도가 갈리는 곳에 있어, 일본의 사신과 우리 나라의 사신이 청주를 경유할 때에는 반드시 이 곳을 지나감으로 관에서 접대하는 번거로움이 상주와 맞먹는 실로 왕래의 요충”이라 하였다. 오늘날에 이른바 영남대로라 부르는 문경 새재 길에 견줄 만큼 추풍령 길의 통행이 많았다는 얘기다. 그러나 조위의 글은 그 목적이 금산군 동헌의 중수기였던 탓에 일정한 지역에 대한 부풀림의 한계를 안고 있다. 실제로 추풍령 길은 영남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문경 새재에 비하면 턱없이 한가로운 길이었다.

가령, 한양을 중심으로 한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9개 국도는 모두 추풍령과는 무관하게 이어진다. 다만 문경 새재를 넘어 유곡역에서 제 4로(영남대로)와 갈려 상주를 지나 통영으로 가는 제 5로와, 천안, 공주로 이어지는 제 6로에서 각각 지로 (支路, 굳이 비교하자면 오늘날의 지방도로이다)를 내어 추풍령을 다스렸다. 그것은 추풍령이 다만 지역과 지역을 연결하는 고개였음을 의미한다. ‘청주를 경유할 때’라는 단서에도 불구하고 추풍령은 결코 부산과 한양을 연결하는 일반적인 역로는 아니었다. 다시 말해, 조선과 일본의 사신은 물론 영남과 한양을 오가는 나그네에게 있어 추풍령은 그저 하나의 사잇길에 불과하였고, 그것은 언제나 특별한 목적이나 형편에 따른 선택의 문제였다.

추풍령에서 북쪽으로 10리 남짓한 신안리에는 반고개란 이름의 고개가 있다. 추풍령에서 모동으로 넘는 고개인데 오랫동안 발길이 드물다가 최근에 포장길을 내어 두 지역 사람들의 왕래가 부쩍 늘었다. 신안리 사람들은 지금도 반고개가 한양과 부산길의 절반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믿는다. 마을이란 으레 저마다의 유래와 신앙을 갖추기 마련이니 이는 반드시 깊이 따져 시비를 가릴 일은 아니다. 또한, 지금이야 경부선을 중심으로 대전과 대구, 경주를 연결하는 4번 국도가 추풍령에서 황간과 영동을 지나 대전으로 통하지만, 옛길은 분명 추풍령에서 북쪽으로 반고개를 넘어 보은과 청주로 올라갔다. 어떤 경로이건 추풍령을 넘었다면 그 길이 한양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었기 때문이다.

 

- 경부고속도로의 으뜸 쉼터

추풍령을 두고 흔히 말하기를, 부산을 비롯한 영남에서 서울로 통하는 중요한 관문이라 하는 것은 다만 오늘날의 이야기다. 그 길이 그만한 대접을 받게 된 까닭은 올곧게 경부선 철길과 경부고속도로 덕택이다. 역마의 시대가 문명의 시대로 바뀌면서 전에는 볼품없던 고을이 번성하고, 전에는 번거롭던 고을이 그저 한적한 시골로 변하였다. 충주와 청주가 서로 그 운명을 바꾸었고 공주와 대전이 또한 그러하였다.

추풍령은 서울과 부산의 중간 지점이라는 이유와 경부고속도로가 넘는 가장 큰 고개(사실은 작은 언덕이라 해야 옳지만)라는 까닭이 뭉쳐 바야흐로 오늘날 가장 부산한 고갯마루가 되었다. 그 분수령은 변함없이 백두대간이다. 옛날엔 영남대로로 백두대간을 넘어가던 문경 새재가 조선 팔도 고개의 맏형이었다면, 오늘날엔 경부 고속도로가 백두대간을 넘어가는 추풍령이 당연히 전국 고갯길의 으뜸이 되는 셈이다. 인물의 역사가 반드시 그 됨됨이의 깊이와 넓이만으로 전승되지 않듯, 고갯길의 역사 또한 꼭 그 높이와 크기로만 규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하여 예나 지금이나 한반도 고갯길의 역사를 따질 적에 가장 중요한 잣대는 오로지 백두대간이다.

반도 이남의 동서가 만나는 고개, 추풍령 고갯마루는 그렇게 오늘도 인파로 출렁거린다. 한국 사람이라면 아마도 한 번쯤 그 고갯마루에 들러 쉬어가지 않은 이가 드물 것이다. 온갖 종류의 교통 수단들이 줄지어 늘어서고, 온갖 차림의 나그네들이 끊임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불과 해발 200미터의 고개. 저 쟁쟁한 백두대간의 여느 고갯길에 견주면 그저 작은 구릉에나 불과하지만 추풍령은 이미 그 모 든 고개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추풍령은 ‘국토의 대동맥’(경부고속도로)이 ‘국토의 척량’(백두대간)을 넘어가는 단 하나뿐인 고개이기 때문이다.

 

- 추풍령과 괘방령

옛날 과거길 보러갈 때 괘방령으로 넘어가면 장원급제 방이 내걸렸고 추풍령으로 넘어간 벼슬아치는 추풍낙엽처럼 벼슬자리 떨어졌다는 설이 전해져 오는 괘방령과 추풍령.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추풍령으로 쳐들어갔다가 괘방령으로 쫓겨났고, 한국내전 때는 북한군이 추풍령으로 남진했다가 괘방령으로 퇴각했다는 역사가 전해져 오는 이 두 고개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한순간에 수많은 차량들이 고속도로를 질주하는가 하면 괘방령은 한적하다. 진군과 퇴각, 번다함과 적막함.

 

◆[금산] 370m

채석장 개발로 대간 자락의 북사면 절반이 사라진 산으로, 자병산과 더불어 대표적인 백두대간 훼손 지역으로 꼽힌다. 일제 때부터 석재를 파기 시작하다 해방 후 중단되었으나 국내 굴지의 철도용 궤도자갈 생산업체인 삼동흥산이 지난 68년부터 경북 김천시와 영동군이 경계를 맞댄 추풍령 자락 금산에 채석장을 내고, 산 정상을 중심으로 영동군쪽 절반을 폭약으로 날려버렸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경부선 철도용 자갈 공급, 그 다음에는 고속 전철용 자갈 공급을 위해 깎아졌다.

채석을 중단한지는오래 되었고 사태 방지 등의 정리 공사한 후 방치 되고 있다.

 

*. 참고자료

[백두대간] 곳곳 채석장...폭약에 추풍령 허리 날아가

충북 영동군 추풍령(해발 221m). 설악산과 태백산, 소백산을 거치며 숨가쁘게 내달려온 백두대간은 추풍령에서 잠시 숨을 고른 뒤, 다시 덕유산(1594m)과 지리산(1915m)으로 달려나간다.

그러나 추풍령 고개에는 구비구비 이어지는 산줄기 대신, 산 절반이 톱으로 썬 듯 잘려나간 절벽만 가파르게 서 있다. 국내 굴지의 철도용 궤도자갈 생산업체인 삼동흥산이 지난 68년부터 경북 김천시와 영동군이 경계를 맞댄 추풍령 자락 금산에 채석장을 내고, 산 정상을 중심으로 영동군쪽 절반을 폭약으로 날려버렸기 때문이다.

추풍령 금산 채석장은 온종일 산을 부수는 발파음과 크러쉬어(crusher· 암석을 자갈로 잘게 부수는 기계) 굉음으로 두 귀가 멍멍했다. 아찔한 벼랑으로 변해버린 산 정상에는 어느새 인적이 뜸해진 백두대간 종주로가 벼랑과 평행선을 그리며 아슬아슬하게 뻗어있다.

이곳에서 나고 자랐다는 추풍령면 이한욱(57) 면장은 『소음과 먼지는 물론, 마을 뒷산 절반이 날아가 경관 파괴가 엄청나다』며 『애초에 경운기라도 몰고나가 산을 파지 못하도록 막지 못한 것이 후회막급』이라고 했다. 노모(47)씨는 『장마철마다 반쪽 밖에 안 남은 산이 무너질까봐 걱정된다』고 했다.

그러나 사무소 측은 오히려 현재 작업장에서 50여 떨어진 곳에 채석장을 하나 더 낼 준비를 하고 있다. 68년부터 30여년째 현장 지휘감독을 맡고있는 조규태(54) 소장은 『경부고속철에 자갈을 납품하고 있어, 고속철 보수 연한이 끝날 때까지 채석작업을 계속할 것』이라고 했다. 사무소 측은 『채석이 끝나면 공사중 나온 폐석과 모래, 토사를 절벽 앞에 계단식으로 쌓고 그 위에 흙을 덮어 산을 복구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들이 지난 4월 채석장 동북 사면에 시범적으로 심어놓았다는 묘목들은 대부분 푸슬푸슬한 모래땅에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한채 고사 직전이다.

 

백두대간보전회 충남지부장 유재호(47)씨는 『백두대간 마룻금을 잇는 금산이 이미 절반 이상 파괴돼 백두대간 줄기가 끊기기 일보직전』이라며 『새 채석장까지 들어서서 맥이 완전히 끊기기 전에 개발을 중지하고 복구대책을 세워야한다』고 주장했다.

추풍령을 지나 높고 넓게 치솟은 덕유산 산줄기가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육십령(734m) 고개 역시 채석장으로 무참하게 훼손되고 있다. 경남 함양군과 전북 장수군이 경계를 맞댄 육십령은 『산을 넘는 동안 산적 60명을 만난다』는 전설이 내려올만큼 숲이 울창하던 곳. 동사면에는 남강 최상류 계곡이, 서사면에는 금강 최상류 계곡이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하늘에서 내려다본 육십령은 태을산업과 함양석재 등 골재회사들이 낸 대형 채석장으로 흉칙하게 망가지고 있었다. 태을산업과 함양석재는 각각 지난 90년과 89년부터 육십령 정상부위에 6만1886㎡(1만8720평), 2만8568㎡(8640평) 규모의 채석장을 내고 도로공사용 골재와 건축용 석재를 채굴하고 있다.

폭약으로 산을 쪼개는 발파음과 크러쉬어 굉음, 주변 산야를 뒤덮는 먼지는 육십령도 추풍령 금산과 마찬가지였다. 채석장이 생긴 직후부터 태을산업 채석장 바로 앞에 자리잡은 서상면 황남리 주민들로부터 『덤프트럭이 비포장 진입로를 달리면서 생기는 먼지 때문에 하우스 농사에 피해가 막심하다』는 민원이 그치지 않았지만, 태을산업은 지난 97년에야 진입로를 포장했다.

지난해 환경부는 백두대간 마룻금을 중심으로 양쪽 700 를 「생태축」으로 지정했다. 백두대간이 훼손되고 있다는 환경단체 원성에 밀려 정부가 「이것만큼은 지켜야한다」고 내세운 「최소」 범위다. 그러나 아예 산 정상에 버젓이 자리잡은 육십령 채석장에 대해 함양군청은 『허가 당시엔 「백두대간」 개념 자체가 없었다』며 『법대로 해서 절차상으로는 하자가 없다』고 말했다.

(조선일보2000.05.25/최순호기자)

 

 

[은편리(銀片里)]

이 마을은 본래 지금으로부터 약 250여년전 영·정조 연간에 형성되어 음변(陰邊)리라 불렸고, 1759년 경상도 금산군 황금소면에 속했다가 1914년에 충북 영동군에 편입되면서 마을 이름도 은편(銀片)으로 개칭하였다. 1991년에는 황금면을 추풍령면으로 변경하여 현재의 행정구역은 충북 영동군 추풍령면 은편리로서 50여호의 부락으로 오늘에 이른다. 마을 뒤쪽에는 느름산이 높이 솟아 거센 한풍을 막아주고 겨울에 흰눈이 마치 은가루를 덮은 듯하다 하여 음변리를 은편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한다.

마을 우측의 당산 위에는 수령 500년을 넘는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고 느름산 정상에는 통신수단으로 사용했던 봉화대 옛터가 남아 있어 애환과 오욕 속에 흘러간 마을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으니 이 고장의 자랑으로 손꼽을 만하다. 예나 지금이나 이 마을 사람들은 씩씩하고 단합이 잘 되기로 소문이 나 있다.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이곳 사람들의 인심은 변함없이 넉넉하고 순박하여 사철 마르지 않는 느름산 물이 좋아 장수하는 마을로도 이름이 높다.

 

◆[매봉재]

 

◆[사기점 고개] 390m

고개 남쪽의 김천시 봉산면 사기점리는 옛날 사기를 구워 팔던 마을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고개 이름이 사기점고개다. 이 고개 북쪽 너머는 영동군 추풍령면의 작점리다.

 

[난함산] 733.4m

대간길에서 살짝 비켜나 있는 난함산(卵含山)은, 다수의 백두대간 종주 자료에 묘함산(卯含山)으로 표기돼 있다. 국토지리정보원의 1:50,000 지도에 '卯含山'이라 표기돼 있기 때문이 빚어진 일이다. 그러나 현지명은 분명 난함산이다.

현재 난함산 정상에는 한국통신의 무선통신 중계소가 있는데, 그 이름도 난함산 중계소였다. 지도를 만들 때 난(卵)자가 묘(卯)로 오식된 게 확실해 보인다. 산의 형국이 알을 품고 있다 해서 명명된 것일 텐데, 십이지(十二支)의 넷째이자 동쪽을 가리키는 말인 묘(卯) 자가 쓰였을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작점 고개] 능치재 340m

성황뎅이 고개, 여덟마지기 고개라는 별칭도 있다 하며, 김천 어모면에서 추풍령으로 넘어가는 한적한 고개다. 작점고개란, 고개 너머 서쪽(영동군) 마을인 작점리에서 딴 것이며, 여덟마지기 고개란, 충북 사람들이 이 고개를 넘어 여덟 마지기 농사를 지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고갯마루 근처에 성황당이 있는 고개라 하여 성황뎅이 고개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러나 정작 고갯마루 약간 아래 김천시쪽 정자에는 ‘능치쉼터’라는 현판이 달려 있다. 고갯마루 아래 능치마을의 이름을 딴 것이다.

대간 종주 자료에 대부분 작점고개라 적혀 있는 것은, 초창기 대간 종주 취재팀들이 고개 너머 서쪽(영동군) 마을인 작점리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다. 작점리 마을은 충북 최남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금으로부터 300여년 전부터 유씨가 자리잡은 마을로 소백산 줄기이며 마을 뒷편에는 난함산 상단에 국영통신 시설이 위치하고 있다. 이 마을의 유래는 200여년전 전국에 제일가는 유기 생산 공장이 작점리 전 지역과 김천시 봉산면 태화동 일대까지 공장이 분포되어 있어 유기점포 판매상인도 많이 있었다고 한다. 새들이 많이 살고 있어서 새‘작’자의 "雀"과 유기점포가 많아 "店"자를 따서 작점이라 마을 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 장수하는 마을로 손꼽혀 있다.

영동쪽의 작점 마을이 김천쪽의 능치 마을보다 가깝긴 하나 이 고개를 살뜰히 보살피는 곳은 영동이 아니라 김천 사람인 것 같다.

 

◆[무좌골산]

전에는 474m 삼각점봉이었다.

 

◆[갈현]

용문산 자락을 완전히 내려와서 만나는 노루목이다. 죽전리와 능치리를 연결하는 소로가 교차한다. 이름은 ‘칡고개’라는 의미다.

 

◆[용문산] 710m

1800년 무렵 박생이란 유생이 산세를 보고 龍門山이라 했다는 설이 있으나 확실치 않다.

1940년경 나운몽 목사가 입산하여 근처에 기도원(애향숙)을 세운 뒤, 일명 용문산 운동을 전개해 나갔던 곳이다. 서울과 부산 사이 바로 중간에 위치하고, 영남과 호남의 분계선이며, 서북쪽으로 낙동강이 흘러 남북 양대 강의 분수령이 되는 산의 특성으로, 남한 중신에 위치한 소위 “성산”으로 파악한 것이다.

초창기 애향숙은 신앙적인 목적보다 일제하의 설움에서 오는 계몽운동의 일환으로서 출발하였다가 이후 애향숙이 재건되는 과정에서 기도원 운동으로 면모를 바꾼 것이라 한다. 현재 전국 3만여 명의 신도가 연중행사로 기도대집회를 열고 있다.

 

◆[국수봉] 763m

충북 영동, 경북 상주의 경계를 이루며 백두대간중 추풍령 - 큰재구간에 속해있으며 큰재에서 남쪽방향으로 약 4km 지점의 능선상에 솟은 산이다. 국수봉에 서면 상주의 너른 평야와 백학산. 서산, 기양산, 갑장산, 묘함산, 황악산, 민주지산등 주변의 산들이 전개되고 날씨가 좋은날이면 백두대간 상주, 문경, 김천구간과 소백산까지도 조망된다. 국수봉은 웅산(熊山), 용문산(龍文山), 웅이산(熊耳算) 또는 곰산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어 지고 있다. 정상은 충북과 경북의 경계이고 아울러 낙동. 금강의 분수령이므로 국수(菊水)라 한 듯 하고 웅신당(일명 용문당)이라는 대가 있어 천제와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전해내려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중국의 웅이산과 같이 시초(蓍草)가 난다고 하여 웅이산이라고 하며, 상주의 젖줄인 남천(이천)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 水(움켜쥘 국)와 菊水(국화 국)가 정상에는 혼용되어 쓰이고 있으나, 의미상 정상석의 국수(水)가 맞는 듯함.

 

 

◆[큰재] 320m

해발 300m가 겨우 되는 영동군 모동면에서 상주시 공성면으로 넘어가는 2차선 아스팔트 고갯길이다. 공성면의 3번 국도와 모동면의 977번 지방도로를 연결하는 920번 지방도로가 백두대간의 주능선을 가로지르는 곳이다. 예전에 고갯마루에는 금강과 낙동강의 분수령을 알리는 안내판이 있었고 폐교(옥산초등학교 인성분교)와 민가 한 채가 마주보고 있었다.

지금은백두대간 숲생태원이 들어서 백두대간 생태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회룡재] 340m

마을 뒤의 회룡산이 풍수지리적으로 볼 때, 마치 용이 뒤돌아보는 듯한 형상이라 하여 回龍 재라고 한다.

 

 

◆[개터재] 380m

유용하게 식량을 제공한 날짐승들이 많아 개터재란 이름이 붙여졌다는 설과, 산세가 마치 개들이 모여 살고 있는 형국이라 하여 붙여졌다는 설이 있다. 또한 부근의 봉산마을, 효곡마을, 왕실마을 사람들이 농사를 짓기 위해 넘나들던 고개라 해서 봉산재, 효곡재, 왕실재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윗왕실재] 400m

산세가 왕이 기거하는 왕궁과 같다 하여 ‘왕재’라 하였으나, 민초들이 함부로 왕을 입에 올리지 못하던 시절이라 뒤에 ‘실’자를 붙여 왕실재가 되었다 한다.

 

 

◆[백학산] 615m

산 주위에 백학(白鶴)이 날아와 앉는 모습이 마치 설산처럼 하얗다 하여(산을 하얗게 덮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개머리재(소정재)] 290m

모서면 소정동과 대표동(일명 함박골)을 잇는 도로로, 개의 머리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래서 소정재라고도 부른다. 소정동은 산 중복에 위치하여 식수를 길어 올려야 했기 때문에 우물을 길어 올린다는 뜻의 소정(召井), 대표(大杓)동은 이곳 지세가 북두칠성의 자루인 두 병이 능히 될 수 있다는 뜻에서 부른 것이라 한다.

 

 

◆[지기재] 260m

옛날 동네 뒷산에 도둑이 많이 나왔다 하여 적기(賊起)재 라고 하였으나, 지기 마을의 이름을 따서 다시 지기재로 부르고 있다 한다. 일설에는 적기의 사투리가 지기로 된 것이라는 말도 있다.

 

 

◆[신의터재] 280m

이 고개는 ‘지방의 관리나 귀양중인 옛 벼슬아치들이 나랏님(御)으로부터 승진, 도는 복직 등 좋은 소식(義信)이 오기를 기다리던 고개’였다는 사연이 전해진다. 어산리로 넘어가는 고개라하여 ‘어산재’라고도 불린다.

 

임란 이전에는 ‘신은현’ 이라 불리었고, 임란때 의병장 김준신(金俊臣)이 이곳에서 의병을 모아 최초의 의병장이 되어 상주진에서 많은 왜군을 도륙하고 임란 4월 25일 장렬하게 순절한 후부터 이곳을 신의터재라 불리었다. 왜군들이 김준신 의장의 고향인 화동면 판곡리를 찾아 김씨 일문을 멸하려 하자, 부녀자들이 몸을 던진 곳이 낙화담이라 한다. 이곳에는 고 이은상 선생의 비가 있다. “집은 무너져도 나라는 살아나네.. 꽃은 떨어져도 열매는 맺었다고 오늘의 낙화담 향기. 바람결에 풍기네...”

일제때 민족정기를 말살한다고 “어산재”로 개명되었고 문민정부 수립후 광복50주년을 맞아 옛이름을 되찾고 이곳에 표석과 의사비를 세워져 있다. 화동면 주민들은 화동재라고 부른다.

 

 

[무지개산] 473m

선교리와 어선리 사이에 있는 산으로 대간에서 북동쪽으로 400m쯤 벗어나 있다. 서쪽 사면인 금강수계는 밭농사가 주로 이루어진다. 북, 동, 남쪽은 험악할 정도로 급경사를 이룬다.

 

산이름은 정상 남쪽 골짜기의 폭포에서 유래했다. 무지개산에는 아름다운 무지개폭포가 있으며, 주변에는 낙화담, 철새도래지, 판곡저수지 등이 있다.

 

무지개산은 백두대간 마루금에서 살짝 비켜있는 육산이다. 야트막하면서 빼어난 구석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무지개만큼이나 우리에게 친근감을 주는 그러한 산의 하나다. 밤원고개 북쪽의 발치는 갈령에서 남하한 상주에서 가장 긴 내 이아천이 살짝 핥다가 함창으로 북진한다. 밤원에서 하우산까지의 소위 우산(愚山) 칠리강산(七里江山)의 시작인 것이다. 산이름은 정상 남쪽 골짜기의 폭포에서 유래했다. 무지개산에는 아름다운 무지개폭포가 있으며, 주변에는 낙화담, 철새도래지, 판곡저수지 등이 있다.

 

 

◆[윤지미산] 538m

원래 소머리산이라고 하였으나 언제부터인가 윤지미산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이는 사서삼경 중 대학에 나오는 윤집걸중(允執乞中)이라는 단어에서 나온 말로써 “인생전반을 다 안다, 세상을 포용한다, 세상을 두루 알아맞히다”라는 의미를 가진 산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지장봉으로도 불린다.

 

판곡리 판곡저수지 북쪽에 있는 산이다. 서쪽으로는 경사가 급하지 ?ㄴ아 농경지가 즐비하지만 동쪽은 경사가 급하여 침엽수 등 경제림만 빽빽하게 심겨져 있다. 이 지역은 대간의 등줄기에 묘소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남쪽 아래로 판곡저수지와 제법 너른 들이 펼쳐진다. 대간 종주 중에 드물게 관찰되는 논농사지역이다. ‘아름다운 산’이라는 뜻이다. 특별한 유래는 발견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