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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종주/백두대간자료

속리산 구간 지명 해설(화령재~곰넘이봉)

by 산엔달 2014. 4. 18.

[상주]

상주는 낙동강의 이름이 유래된 도시이다. 낙동강은 상주의 옛 이름인 상락(商洛)과 낙양(洛陽)의 동쪽에 흐르는 강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상주는 고도이며, 삼국시대에는 경주 다음으로 큰 도시였다. 이중환도 ‘팔음지’에서 조선 인재의 절반은 경상도에 있고, 경상도 인재의 절반은 상주와 선산에 있다고 하였다. 경상도의 지명도 경주와 상주의 첫머리를 조합하여 만든 것이라 한다.

 

[보은군]

우리나라 중앙부에 위치한 분지형 지세이다. 대표적인 산으로 속리산, 구병산, 금적산 등이 있으며 군의 북서부에서 시작되는 보청천의 군은 심장부인 보은읍을 가로질러 금강에 합류한다. 보청천 주변은 군내에서 최대 곡창지대를 이룬다.

삼한시대에는 마한의 땅이었으며 삼국 형성기에 신라와 백제 사이에서 치열한 공방전이 일어났던 곳으로 두 나라의 요충지였다. 백제의 침공을 물리친 신라는 470년에 오정산성(지금의 삼년산성)을 쌓았고, 553년에 의신조사가 법주사를 창건하였다. 근대 우리나라 최초의 무저항 시위라 일컬어지는 동학교도의 대규모 보은집회를 비롯해 동학농민전쟁의 중심 무대가 되었다.

신라 지증왕 3년에 삼년산군이었다가 조선조에 보은현으로, 고종32년 이후에 보은군이 되었다.

 

◆[화령재] 320m

백두대간 1,425km 중 상주 구간은 69.5km이며 화령은 고려 때 이곳 일대를 관할하던 화령현(化寧縣)의 지명이다. 택리지에는, “상주 서쪽은 화령(火嶺)이요 고개 서쪽은 충청도 보은인데 화령은 소재 노수(1515-1590)의 고향”이라 하여 소백산맥의 줄기를 타고 북으로 조령, 남으로 추풍령과 연하여 화령으로 불려 왔다고 전한다. 신라 때는 연비군(蓮匕郡), 경덕왕 때에는 화령군(化寧郡), 화령이란 지명은 고개 이름인 火嶺에서 연유된다. 고려 때에는 화령현으로 지금은 화서면이다. 북쪽은 봉황산을 거쳐 속리산 문장대로 남쪽은 국수봉으로 이어지며 낙동강과 금강의 분수령을 이룬다.

화령재는 火嶺으로 표기하는데 옛지명은 化寧이다. 火嶺이란 이름에 대해선 삼국시대부터 삼국이 서로 차지하려고 싸움이 많이 일어난 국경지역이고 김유신 장군이나 후백제의 견훤이 중요시 여겼던 군사 요충지였으며, 6.25때에도 이 지역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하여 불火자를 붙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예전에는 화서면, 화동면, 화북면, 화남면을 합쳐서 화령현이라 했고 그의 소재지가 지금의 화서면 소재지였기에 지금도 화서면을 화령이라 부른다 한다. 그리고 그 부근의 모동면과 모서면을 합쳐 옛날엔 중모현이라 했으며 지금도 상주에서는 옛날의 화령현 지역과 중모현 지역을 합쳐서 중화 (中化)지구라 하여 충북에 인접한 특수지역으로 분류하고 있다.

-중화의 중심 화령(化寧) 5일장

화령은 고개 들머리에 놓인 작은 산읍이다. 신라가 답달비(達匕)라 하다가 화령군(化寧郡)으로 고친 것을 훗날 현으로 바꾸어 상주목 아래 두었다. 오늘날에는 25번 국도가 지나지만 딱히 들어 내세울만한 물산이나 풍습이 없는 탓에 여전히 한적한 시골을 면치 못한 곳이다. 굳이 들자면, 고려 시대부터 내려왔다는 화령 장터가 아직도 소문난 닷새장으로 유명하다.

 

◆[봉황산] 704.8m

봉황산은 말 그대로 봉황이 살았다는 유래로 붙여진 이름이라는데 전설에 의하면 1300년전에 봉황이 한 30년 정도 살았단다. 또한 중종의 태를 묻었다는 전설에 힘입어 마을에서 태봉산(胎封山)이라 부르는 봉황산은 송천을 발원시키는 화령의 진산(鎭山)이다. 일설에는 봉황산 장군이 싸움에 이겨서 봉황산, 반면 싸움에 진 장군이 있는 산은 원통산(596.9m)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

 

-봉황산과 구병산

『증보문헌비고』의 기록에는 “송천은 상주의 구봉산(九峯山)에서 발원하여 화령(化寧) 과 중모현을 지나 황간현에 이른다”고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속리산은 봉우리 아홉이 뾰족하게 일어섰기 때문에 구봉(峰)산이라 한다"는 기록과 함께 고을 동쪽 43리에 또 다른 구봉(九峯)산이 있다고 적었다. 그리고 조선광문회 본 「산경표」(1913)에는 속리산, 구봉(峯)산, 봉황산이 모두 함께 나란히 나온다. 백두대간의 산줄기 가운데 『증보문헌비고』의 기록, 즉 화령과 중모현을 지나 황간현에 이르는 송천의 발원으로 알맞은 산은 오로지 봉황산 뿐이다. 『증보문헌비고』의 기록이 틀리지 않으려면 구봉산을 봉황산으로 바꾸거나 혹은 구봉산이 곧 봉황산이어야만 한다. 그러나 「산경표」는 분명히 봉황산과 구봉산을 별개의 산으로 다루고 있다.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따르자면 구봉(峯)산은 구봉(峰)산(=속리산)과도 별개의 산이다.

기록을 종합하여 볼 때, 구봉산은 거리와 이름과 산세로 보아 관기의 구병산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정리하여 말하자면, 『증보문헌비고』의 기록은 송천이 발원하는 봉황산을 구병산으로 착각한 것이다. 물줄기의 발원을 착각하는 일은 옛날에도 흔히 있었다. 구병산은 다만 백두대간에서 갈라져 나가 보청천 상류의 골물에 둘러싸인 외딴 봉우리에 지나지 않는다. 백두대간의 봉우리도 아니므로 숙제는 역시 「산경표」에도 남는다.

 

◆[비재] 427m

비재는 나는 새의 형국이라 하여 비조재, 비조령이라 불렀으나 근래에 와서 비재라는 이름이 굳어졌다 한다.

 

◆[못제]

비재에서 갈령 삼거리 가는 길에는 백두대간상의 유일한 습지인 못제가 있다. 못제의 크기는 300-500평 정도, 10평 정도의 넓이에 물이 고이는데 유입수는 없고 빗물에 의해서만 못이 생기기 때문에 실제 물을 볼 기회는 별로 없다. 지도상에는 식수표시가 되어 있지만 사실 여름 장마철에만 물을 볼 수 있다. 현지인들은 못제가 백두산 천지와 비슷하다고 천지라고도 부른다.

 

<못제 전설_삼국유사(일연지음/권순형편역/출판타임기획)>

상주에서 후백제를 일으킨 견훤은 보은군의 호족인 황충장군과 매일 싸움을 벌여 이겼다. 싸움을 벌이는 족족 패하는 황충이 견훤의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를 비밀리에 캐내어 견훤이 못제에서 목욕을 하면 힘이 난다는 것을 알아내었다. 황충은 견훤이 지렁이의 자손임을 알고 소금 삼백 가마를 못제에 풀었다. 그러자 견훤의 힘은 사라졌고, 마침내 황충이 승리했다. 이는, 광주의 한 처녀가 지렁이와 정을 통하여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나이 열다섯 살이 되자 스스로 견훤이라 일컬었다는 삼국유사의 기이편에 전하는 얘기에서 비롯된 듯하다.

대간 마루금 동쪽에 있는 대궐터산(해발 873m인 두루봉을 상주시 화서면 청계 마을 사람들이 대궐터라고 부르는데서 연유한 것으로 보임. 상주의 역사서인 상산지에는 청계산이라 함. 국토지리정보원의 지도에는 무명봉임)의 성산산성, 속리산 자락인 화북면 북암리 견훤산성이 모두 천하를 호령하고자 하였던 견훤의 모습을 담고 있다.

 

◆[갈령 삼거리]

형제봉 오르는 중에 1Km 떨어진 곳의 ‘갈령’으로 내려가는 곳이다 갈령은 ‘칡고개’라는 뜻이다.

 

◆[형제봉] 832m

형제봉은 서쪽 골짜기속에 십승지 중의 하나인 만수동을 감싸고 있다. 십승지는 옛부터 전란과 재앙이 비켜간다는 곳으로 대부분 오지를 형성하고 있으며 공주의 유구와 마곡, 부안의 변산, 안동의 춘양, 성주의 만수동 등이 이에 해당한다.

 

-작약지맥

형제봉(충청북도 보은군 내속리면과 경상북도 상주시 화북면의 경계)을 지난 721m봉에서 동쪽과 동북쪽 및 동남쪽으로 가지를 쳐 경상북도 상주시 함창읍 태봉리의 태봉산으로 이어지는 도상거리 45km의 산줄기로 721m봉에서 시작하여 태봉산(봉화산)에서 그 맥을 영강에 넘기고 있다. 이 산줄기를 따라가면 대궐터산, 칠봉산, 작약산, 수정봉, 태봉산 등을 만날 수가 있다. 아울러 이 산줄기의 북동쪽에는 영강이 흐르고 있고, 이 산줄기의 남쪽에는 지평천과 이안천이 흐르고 있다.

 

◆[피앗재]

천왕봉의 남서쪽 형제봉과의 사이에 위치하며 만수동계곡과 화북면 상오리를 넘나드는 고개다. 원래는 ‘피화(避禍재난을 피하다)재’로서 전란의 화를 피하기 위해 심산유곡인 만수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라는 뜻이다.

 

◆[속리산]

<지리>

속리산 천왕봉(1.057M)이 주봉이며 무수한 봉우리들이 기암 절경을 이루고 있다. 천왕봉에서 가지 친 한남금북정맥은 서산 안흥진으로 빠지는 금북정맥과 김포 문수산으로 빠지는 한남정맥의 분기점이요 시발점인 것이다. 또한 속리산은 해동팔경의 하나이며 전에는 소금강이라 불리기도 했다. 속리 서북릉 최고의 위엄을 갖춘 문장대-문수-청법-경업-신선-입석-비로-천왕석문지나 천왕봉까지 1.000M의 고산준봉들이 줄지어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고 있다. 수백 년 된 노송들이 운치를 증폭시키고 백미의 암릉 아래 고산의 산죽들이 온산을 뒤덮고 있다. 서북릉 하이 클라이머 문장대의 위엄과 조망은 어리석은 인간들의 발길을 잡아매어 둔다.

 

속리산은 선유동계곡을 경계로 대간 등줄기를 월악산에서 넘겨받는다. 산세가 지리산이나 설악산만큼 크지는 않지만 암릉과 암장의 연속으로 그 위엄을 드높인다. 중부 내륙의 한가운데 위치하며 크게 속리산 본릉과 대야, 청화산 능선 등 두 개의 산괴로 형성되어 있다. 해발 1000미터 이상의 높은 봉우리 대부분이 속리산 본릉의 주변에 집중돼 있으며, 대야산 지역의 봉우리들은 900미터를 넘나드는 정도다.

 

법주사(法住寺)를 중심으로 4km 가량의 반경으로 호를 그리면서, 북쪽에 관음봉(觀音峰)이 있고 이어 문장대(文藏臺)·신선대(神仙臺)·입석대(立石臺)·비로봉(毘盧峰)·경업대(慶業臺)·천왕봉(天皇峰:1,058m) 등 해발고도 1,000m 이내의 산봉이 솟아 있는데 최고봉은 천왕봉이다. 속리산국립공원의 입구는 보은군 내속리면 사내리(舍乃里)이며 법주사의 사하촌(寺下村)으로 발달하였다. 이 사하촌은 속리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옛 마을이 철거되고 청주나들이골이라는 곳에 새로이 관광촌이 조성되었다.

 

<역사>

속리산은 1970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됐다. 산의 이름은 원래 아흔아홉개의 연봉으로 이루어졌다고 해서 구봉산 혹은 소금강으로 부르다가 신라시대에 들어 지금의 속리산이 되었다. 우리나라 8경 중의 하나인 속리산은 ‘속세를 떠난다’는 이름이지만 실제로는 ‘속세와 멀리 떨어진 깊은 산’이란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속리산은 예로부터 한국 팔경(八景)의 하나인 유명한 경승지로, 제2금강(金剛), 또는 소금강이라고도 한다. 광명산, 지명산, 미지산, 구봉산, 형제산, 소금강산, 자하산 등의 이름으로 불리워 왔다. 특히 9개의 봉우리가 있다 하여 구봉산으로 많이 불렸으나, 삼국시대부터 속리산으로 부르게 되었다 한다.

 

속리산은 ‘세속이(을) 떠난 산’이라는 이름 뜻과는 달리 가장 세속적인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이성계가 혁명을 꿈꾸며 백일기도를 올렸다는 곳도 이 산이고, 그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 즉 태종이 왕권을 쟁취하게 위해 형제를 둘씩이나 도륙하고 참회를 한 곳도 여기다. 이뿐이 아니다. 세조의 가마가 지나가자 가지를 들어 올렸다는 정이품송, 세종이 7일간 머물며 법회를 열고는 ‘크게 기쁜’ 나머지 그 이름에 자신의 심회를 담았다는 상환암(上歡庵), 세조가 목욕을 했다는 은폭(隱瀑)과 그 때마다 학이 세조의 머리에 똥을 떨어뜨렸다는 학소대 등 가장 세속적인 얘기가 곳곳에 배어있다.

(글/윤제학/)

 

<지명>

1. 신라의 승려로 금산사(金山寺)를 창건한 진표율사가 구봉산(속리산의 그 전 이름)에 오르기 위해 보은에 다다랐을 때 들판에서 밭갈이를 하던 소들이 무릎을 꿇고 율사를 맞았으며 이를 본 농부들이 줄줄이 ‘속세를 떠나’(俗離) 출가해 여기서 ‘속리산’이 되었다 한다.

2. 도(道)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는데 사람은 도를 멀리하는구나/ 산은 사람(俗)을 떠나지 않는데 사람이 산을 떠나는구나.”(道不遠人 人遠道, 山非離俗 俗離山)

 

위의 시(詩)를 신라말기 문장가인 최치원이 지었다고 하여, 이 시를 속리산 이름이 지어진 연원으로 보기도 한다. 속리산이 속한 보은군에는 최치원의 탄생설화쯤 되는 ‘금(金)돼지’전설이 전해오는 것으로 미뤄 최치원과 인연이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는 백호 임제의 것이다.

분방이 지나쳐 스무 살이 넘도록 스승을 구하지 않던 임제는, 스물두 살이 되던 겨울 어느 날 벼슬을 멀리하고 속리산에 은거하던 성운(成運·1497-1579)을 만나 3년간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다. 이때 중용을 800번이나 읽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따라서 위 시는 중용에 나오는 공자의 말 “도는 사람에게서 멀지 않으나(道不遠人), 사람이 도를 행한다면서도 사람을 멀리 하면(人之爲道而遠人), 도를 이룰 수 없다(不可爲而道)”고 한 데서 차운(次韻)을 한 것 같다.

임제의 이 시는 1614년에 이수광이 편찬한 지봉유설에 보이고, 근년에 간행된 백호집(白湖集)의 번역본에도 기록돼 있다. 그런데 속리산에 관한 대부분의 글에서 위의 시를 최치원의 것으로 인용하고 있다.

최치원도 도불원인(道不遠人)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쌍계사에 있는 진감국사의 비문을 쓰면서 ‘도불원인(道不遠人) 인무이국(人無異國)’으로 시작하고 있다. 이 경우는 ‘도는 사람에게서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은 나라에 따라 다르지 않다’고 새길 수 있겠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돌의 형세가 높고 크며, 겹쳐진 봉우리의 돌끝이 다보록하게 모여서 처음 피는 연꽃 같고, 또 횃불을 멀리 벌여 세운 것 같기도 하다. 산 밑은 모두 돌로 된 골이 깊게 감싸고돌아서, 여덟 구비 아홉 돌림이라는 이름이 있다. 산이 이미 빼어난돌이고, 샘물이 돌에서 나오는 까닭에 물맛이 맑고 차갑다. 빛깔 또한 아청빛이어서 사랑스러운데, 충주 달천의 상류이다.' 문헌비고에는 '산세가 웅대하며 기묘한 석봉(石峯)들이 구름 위로 솟아 마치 옥부용처럼 보이므로 속칭 소금강이라 하게 되었다.' 라고 하였다. (글/윤제학/)

 

-속리산 팔봉팔석문팔대 (八峰八石門八臺)

여덟개의 봉우리, 천왕봉(天王峰, 1,058m), 비로봉(毘盧峰, 1,032m), 길상봉(吉祥峰), 문수봉(文殊峰, 1,031m), 보현봉(普賢峰), 관음봉(觀音峰, 982m), 묘봉(妙峰, 874m), 수정봉(水晶峰, 566m)

 

여덟개의 돌문, 내석문(內石門), 외석문(外石門), 상환석문(上歡石門), 상고석문(上庫石門),상고외석문(上庫外石門), 비로석문(毘盧石門), 금강석문(金剛石門), 추래석문(墜來石門)

 

여덟개의 돌, 문장대(文藏臺, 1,054m), 입석대(立石臺), 경업대(慶業臺), 배석대(拜石臺),학소대(鶴巢臺), 은선대(隱仙臺), 봉황대(鳳凰臺), 산호대(珊瑚臺)

 

◆[천왕봉] 1,058m

속리산의 최고봉은 천왕봉(天王峰)이다. 2007년 12월 중앙지명위원회가 천황봉을 천왕봉으로 바꾸는데 동의한데 이어 국토지리정보원이 지명 변경을 고시했기 때문이다. 일제 때 붙여진 천황봉이란 이름이 일본 왕을 뜻하는 일제 잔재라는 게 개명 이유였다.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지지’와 ‘대동여지도’에는 정확하게 ‘천왕봉’으로 기록돼 있다. 1911년 5월 일본 육군참모본부에서 만든 한국지형도에까지 천왕봉으로 적혀 있으나, 일본총독부에서 만든 1918년 지도(근세한국오만분지일 지형도)부터 천황봉으로 표기돼 있다. 조선이 천황의 식민지로 그 이름을 따서 ‘황(皇)으로 바꾼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9년 말 경에야 이르러 ’천왕봉‘이라고 새겨진 표지석이 세워 졌다.

 

천왕봉은 우리나라의 십이지종산의 하나이자, 한남금북정맥의 분기점이다. 정맥은 말티고개를 지나 청주의 산성고개, 괴산의 모래재, 음성의 행티고개를 지나 안성의 칠현산까지 이어진다. 천왕봉은 세 갈래의 큰 물, 한강(달래강-남한강) 낙동강 금강의 물길이 갈리는 곳(三派水)으로, 삼파수봉으로도 불린다. 삼파수는 달천수 우퉁수와 함께 조선시대의 3대 명수로 알려진다. 조선시대에 이행(李行)이라는 선비는 우리나라에서 “충주 달천의 물이 천하에 으뜸가는 물맛이고 한강의 우통수(牛筒水)가 둘째이며 속리산의 삼타수(三陀水)가 셋째”라고 그 품격을 매겼다. 여기서 삼타수는 달래강 상류 속리산의 삼파수가 변한 말이니 달래강이 금메달과 동메달을 동시에 석권한 셈이다.

달래강은 속리산 천왕봉에서 시작하여 삼백 리 길을 북쪽으로 흐르다가 충주 탄금대에서 남한강에 흘러드는 강이다. 달래강 인근 지명에 아직도 남아있는 ‘달천’, ‘단월’, ‘단호’, ‘감물’ 등은 모두 그 물맛이 달다는 뜻으로 달래강에서 말미암았다. 그 물길의 발원에 대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이렇게 적었다.

 

“속리산 산꼭대기에 문장대(천왕봉이 맞다)가 있는데 천연암벽이 하늘로 치솟아 그 높이를 알지 못한다. 사람 3천 명이 앉을 만한 넓은 암반 한 가운데 가마솥만한 샘이 나서 가물어도 줄지 않고 비가와도 늘지 않는다. 그 물이 세 갈래로 나뉘어 공중으로 쏟아져 내리는데 한 줄기는 동쪽으로 흘러 낙동강이 되고, 한 줄기는 남쪽으로 흘러 금강이 되고, 한줄기는 북쪽으로 흘러 달천이 되었다가 금천(金遷, 남한강)으로 들어간다.”

 

한반도에는 ‘천황’이란 이름을 가진 산(봉)이 계룡산 등 20개 가까이 있는데 대개 일제가 바꾼 것으로 의심 받고 있다. 어쨌든 그동안 녹색연합 등 시민단체와 개인들이 나서 개명운동을 펼친 결과로 지자체와 정부 관련기관이 뒤늦게나마 천왕봉의 이름을 바로잡은 것이다.

 

◆[비로봉] 1032m

비로(毘盧)란 비로자나불을 줄인 말로써, 인도말로 몸의 빛, 지혜의 빛이 법계(法界)에 두루 비치어 가득하다는 것으로 '부처의 진신'을 일컫는 말이자, 광명을 의미한다. 진표율사가 속리산에 온 다음날 아침 새벽 방안에서 좌선을 하고 있는데, 별안간 밝은 빛이 방문 가득히 비췄다. 깜짝 놀라 방문을 열었더니 맞은편 봉우리에서 눈부신 햇빛이 오색 무지개를 띄고 사방팔방 비추고 있었다. 대사가 황급히 합장배례를 하고 그곳으로 달려가 보니 비로자나불이 암석에 앉아 있다가 서쪽 하늘을 향해 구름을 타고 떠났다 한다. 이곳을 비로봉이라 이름하였다.

 

[상고석문]

상고석문을 지나 비로봉과 상고암으로 내려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상고암으로 가는 문이라는 뜻에서 상고석문인 듯하다. 상고암은 신라 성덕왕 17년(720년)에 창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법주사를 지을 적에 천왕봉에서 벤 소나무를 이 곳에 저장해 두었다 하여, 上庫(창고 고)라 한 것으로 보인다. 암자에는 어지간한 속병은 씻은 듯 고쳐내는 신비한 약수가 하나 있는데, 늘 마르지 않는다는 상고암의 팔공덕수가 바로 달래강의 발원 샘이다.

 

◆[문수봉]

속리산 8봉 가운데 하나로 그 모습이 매우 단아하다. 문장대와 마주 바라보고 서 있으며, 남서쪽 암릉 아래에는 청법대가 있다.

 

◆[문장대] 1054m

문장대는 법주사에서 약 6km 지점, 상주시 화북면 장암리에 위치한 석대다. 정상의 암석은 50여명이 한꺼번에 앉을 수 있는 규모다. 이곳 북서쪽 바위틈에는 가물 때가 아니면 늘 물이 고여 있는 석천이 있는데, 이를 감로천이라 한다.

문장대는 원래 구름 속에 묻혀 있다 하여 운장대(雲藏臺)로 불렸으나, 조선시대 세조가 복천에서 목욕하고 이곳 석천의 감로수를 마시면서 치명할 때, 문무 시종과 더불어 날마다 대상에서 시를 읊었다 하여 문장대로 불린다. 이곳에서는 천왕봉과 관음봉을 비롯해 속리산의 고봉들이 한눈에 보여, 속리산의 정상인 천왕봉보다 일반인에게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문장대 안내판에는 문장대를 세 번 오르면 극락에 갈 수 있다는 속설을 전하고 있다.

 

◆[밤티재]

속리산 북쪽을 동서로 횡단하는 고갯길이다. 늘재와 달리 제법 높다. 2차선 기타도로가 지나간다. ‘밤(栗)고개’라는 뜻이다. 고개 서쪽에 밤티마을이 있는데 진짜 토종밤이 많이 난다고 한다.

 

◆[늘재] 380m

늘재는 이름 그대로 ‘길게 늘어진 고개’이다. 우리나라 고개 가운데 ‘진고개, 진재’는 긴 고개라는 뜻이고, ‘늘티, 늘재, 늘고개’는 고갯길이 가파르지 않고 평평하게 늘어진 고개라는 뜻이다.

 

◆[청화산] 984m

늘재의 동쪽 봉우리로 산세가 우람하다. 정상에 표시목이 세워져 있다. 이 구간에서 유일하게 흙산이다. 충북 괴산군과 경북 문경시 지경을 완전히 벗어나 경북 상주시 안으로 들어간다. 직선 6Km 거리에 속리산의 암봉들의 웅장한 모습이 보인다. ‘늘 푸르러 아름다운 산’이라는 뜻이며 특별한 유래는 없다. 준봉이지만 지척에 경관이 뛰어난 속리산이 있어 손해를 보는 듯하다.

 

경상북도와 충청북도 3개 시군의 경계를 이루며 괴산군 중앙에 솟아 있다. 산죽군락과 소나무가 많아 겨울에도 푸르게 보인다. 전설에 의하면 수십리밖 어디에서 바라보나 산 모양이 맑고 깨끗하며, 항상 화려하고 푸르게 빛나고 있으며 아름다운 산이라 하여 청화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충북과 경북의 경계인 청화산은 멀리 소백산으로부터 조령산, 주흘산, 대야산 등과 함께 속리산을 솟구치게 하는 교두보 역할을 한다. 조선시대 실학자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청화산은 뒤에 내외의 선유동을 두고 앞에는 용유동에 임해 있다. 앞뒷면의 경치가 지극히 좋음은 속리산보다 낫다"고 할 정도로 경관이 뛰어나다.

산기슭의 농암면 비치마을 입구에는 같은 뿌리에서 6그루의 소나무가 자라 육송정(六松亭)이라 불리는 반송(천연기념물 292)이 있고, 청천면 삼송리에는 용송이라 불리는 소나무(천연기념물 290)가 있다.

 

이중환은 청화산 일대를 福地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그런데 청화산 아래 마을(상주시 화북면 용유리)은 오래 전부터 도참사상(풍수)적 측면에서 실제 소의 배속(牛腹洞)처럼 안온하다는 十勝地 가운데 하나로 일컬어지고 있다. 시루봉-청화산-문장대-천황봉-형제봉-갈령-도장산으로 이어지는 둥근 산줄기 안의 분지에서 바깥세상으로 트인 곳은 시루봉과 도장산 사이 용유리의 병천뿐이니 이 일대가 바로 우복동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중환은 실학자이면서도 많은 부분을 풍수사상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풍수사상은 다소 초현실적이며 객관적이고 합리성을 추구하는 서구 학문에 비해 검증 면에서 한계를 지닌 풍수사상은 미신으로 치부되어 위기를 맞이하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풍수는 환경오염 및 생태계 파괴를 치유할 수 있는 새로운 대안으로 각광받고 있다. 이를 테면 봉이 김선달이 대동강 물을 팔 수 있었던 것이 좋은 예가 된다. 평양일대가 배가 떠가는 行舟形이라 우물파기가 금지되어 있었다. 우물(구멍)을 파면 배가 가라앉는다는 풍수사상에 기초한 것이다. 지금 검증할 방법이 없지만 평양 일대의 지반이 실제 우물을 파면 침하의 우려가 있을 지도 모른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조선시대 과거시험에서 문·무과를 제외한 잡과에 해당하는 실용 기술학이었던 풍수학이 오랜 기간 동안의 찬밥대우에서 벗어나 다시 세인의 주목을 받고 있는 셈이다. 특히 풍수학은 최근 백두대간 마루금 타기가 새로운 트랜드로 자리잡으면서 더욱 발전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고 있다고 한다. 원래 풍수사상이 신라 말 선승 도선의 水根木幹(백두산과 지리산을 연결하는 백두대간 개념)에서 시작된 것이 아닌가. 대간꾼들은 충분히 가슴 뿌듯하게 생각할 만하다.

 

청화산은 속리산의 바위병풍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는 산이다. 예로부터 주변에는 전란(戰亂), 질병(疾病), 기근(飢饉) 이른바 삼재(三災)가 들지 않는다는 십승지(十勝地)의 땅 우복동(牛腹洞)이 있다고 한다. 지금도 비결(秘訣)을 믿는 사람들이 상당수 산다.

 

[화북면]

상주시 화북면은 우리나라의 면 단위 지역 가운데 가장 많은 명산을 보유한 곳으로 ‘삼산(三山) 삼수(三水)의 고장’으로 불린다. 삼산(三山)은 화북면을 둘러싼 산줄기의 속리산(1,057.7m), 청화산(984m), 도장산(827.9m)을, 삼수(三水)는 속리산 천왕봉에서 낙동강, 금강, 한강이 갈리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우복동천 코스는 이 세 개의 산을 하나로 엮은 산행 코스다.

 

◆[갓바위재]

조항산과 청화산 사이의 허리목인데 평평한 구릉이어서 고개처럼 보이지 않는다. 바람이 심하여 키 큰 나무는 별로 없고 억새가 지천이다. 지대는 넓어도 물길이 멀어서 야영지로 적당치 않다. 서쪽의 의상저수지와 동쪽의 궁기리로 향하는 오솔길과 교차한다.

 

◆[조항산] 951m

고모령과 갓바위재 사이에 위치한 암봉이다. 서쪽으로 의상저수지와 주변의 농촌마을이 평화로운 모습으로 펼쳐진다. 동쪽으로 나 있는 등산로는 궁기리로 내려가는 길이다. 우리나라에는 ‘새(鳥 )’를 산 이름으로 쓴 경우가 많다. 날렵하거나 높이 솟아 있는 산의 모양새에 따라 붙여진 것들이다. 조항산도 같은 경우다.

 

- 조항산 자락의 궁기리 마을

궁기리는 높은 단애아래 평안한 산곡 분지에 펼쳐져 있다. 궁기리는 동네 이름이 심상찮은 그대로 견훤이 궁터를 조성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마을이다. 조항산 능선이 북쪽계절풍을 막아주고 남으로 열린 넓은 분지라 햇볕이 가득한 이 산골짜기에 궁궐이 들어서기에도 족할 만한 여유는 있지만 왜 견훤이 여기에다 궁궐을 세우려고 했던가? 전쟁에 패하자 우복동으로 들어와 삶을 부지하려고 한 것은 아닌지. 그러나 전설은 전설일 뿐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알기는 힘들다.

 

◆[고모치]

고모치(고모령, 고모재)는 경북과 충북을 잇는 12km나 되는 험준한 재로, 옛날 부모가 없는 질녀와 고모가 함께 살았는데 질녀가 우연히 병사하자 이를 애달피 여긴 고모가 식음을 전폐하고 재에 올라 질녀의 이름을 부르다 죽었다 한다. 후대 사람들이 이를 기리기 위해 고모재(치)라 하였다 한다. 고모샘은 이곳의 바위틈에서 솟아나는 석간수다.

 

◆[밀재]

청천면 삼송리 농바위골과 가은읍 완장리 용추골을 넘나드는 고갯마루다. 대간상으로는 대야산쪽 고래바위와 창화산쪽 집채바위 중간이다. 남북으로 암릉과 암괴가 둘러지고 산자락마다 기암괴석으로 뭉쳐 있어 장쾌하기 그지없다. 양봉으로 꿀을 채취하던 곳이다. 우리말로는 ‘벌(蜜)고개’인 셈이다. 용추골 입구가 벌바위인 것으로 보아 양봉을 크게 하던 고장인 모양이다. 동쪽의 지릉에 ‘마귀할미통시바위’라는 특이한 지명이 있는데, ‘통시’는 요즘 말로 ‘변기’다.

 

◆[대야산]

경북 문경시(聞慶市) 가은읍(加恩邑) 완장리(完章里)에 속한 대야산은 대간 마루금을 경계로 충북 괴산군(槐山郡) 청천면(靑川面) 삼송리(三松里)와 접하고 있다. 내·외선유동을 거느리고 있는 대야산은 2002년 세계 산의 해를 맞아 문경의 주흘산, 황장산, 희양산과 함께 산림청에서 선정한 한국 100대 명산에 올라서 있다. 대야산의 원래 이름은 선유산(仙遊山)이었다 한다. 이중환의 택리지 ‘복거총론’에서는 ‘청화산 동북쪽에 있는 선유산은 정기가 높은 데에 모여진 국판이어서, 꼭대기는 평탄하고 골이 깊다. 위에는 칠선대와 학소굴이 있다. 옛날에 진인 최도와 도사 남궁두가 여기서 수련하였다고 한다, 저기(著記)에는 이곳은 수도하는 자가 살 만한 곳이다 하였다’ 라고 적고 있다. 또한 정확한 뜻은 알 수 없지만, 속설에는 홍수 때 정상의 봉우리가 대야만큼 남아 있었던 데서 유래한 이름이라고도 한다.

 

대야산(大耶山)은 한동안 대하산(大河山)으로 불리어졌고, 또 국립지리원 발행지도에는 대야산(大野山)이라고 적혀 있으나 옛기록을 고증한 결과(1789년 발행 문경현지 등) 대야산(大耶山)인 듯하다. 여러 기록들에 ‘大耶山’으로 적고 있으며, 특히 철종조의 대동지지[(大東地志(1861년 이후 추정)]에는 ‘대야산은 희양산의 남쪽 갈래로 제일 높은 봉우리가 비로봉이고 선유동의 주산이다. 서쪽의 청주 화양동이 30리다’라고 기록하고 있어 대야산 정상을 ‘비로봉(毘盧峯)’으로 부르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대야산의 동쪽 골은 그 유명한 선유계곡이니 옛 시인묵객들이 앞을 다투어 보고 지고를 논하며 해맑은 시상을 읊조렸다 하니 용추골 문경 선유계곡은 괴산의 선유골과 양대 맥을 이룬 절경 중에 절경이 아니랴 하겠는가? 형언할 수 없는 독특한 암반으로 매우 남성적인 포효함이 있다.

 

◆[촛대재]

 

◆[촛대봉]

대야산에서 불란치재 사이 백두대간에 있다. 산행은 대야산 돌마당 식당을 지나 20분 정도 올라가면 용추가 나오는데 용추의 오른쪽 능선을 타면 촛대봉으로 바로 오를 수 있고 정상에서 대야산이나 불란치재로 내려갈 수 있다. 정상에 무덤이 있다. 능선길은 소나무와 바위가 잘 조화되어 있는 아름다운 산이다.

 

◆[불란치재]

촛대봉과 곰넘이봉 사이에 있는 고개로 버리미기재를 넘는 922번 2차선 포장도로가 개설되기 전까지는 문경의 가은읍 완장리와 충북 괴산의 청천면 관평리를 이어주던 옛길로 통행량이 제법 많았던 고개다. 상주 화북의 늘재를 넘어 청천과 괴산으로 이어지는 길이 남북방향이라면, 문경 가은에서 불란치재를 넘어 청천과 청주로 이어지는 길은 동서로 난 방향이다.

그러나 교통이 발달하면서 늘재가 992번 지방도로로 포장되어 여전히 쓰임새를 갖춘 반면, 불란치재는 버리미기재에 922번 포장도로를 넘겨주고 지금은 쓰이지 않는 옛길이 되고 말았다. 불란치재는 지금도 뚜렷한 옛길의 흔적이 남아 있으나 통행은 거의 없다. 불란치재와 버리미기재는 사람들이 걸어 다니던 시대에서 문명의 시대로 넘어가는 고갯길의 변천과정을 보여주는 곳이다.

'불이 났던 고개‘가 불난 고개, 불난치로 변하였다는 설이 있고, 옛 명칭인 ‘불한령’(弗寒嶺-춥지 않은 고개)이 불한치, 불란치로 변하였다는 설이 있다.

 

◆[곰넘이봉]

백두대간이 장성봉(長城峰.915m)을 지나 남쪽으로 뻗어 내리다가 버리미기재에서 낮춰 다시 솟아오르며 곰넘이봉을 일으키고 이어서 불란치재를 지나 대야산(大耶山.931m)으로 이어진다. 상관평에서 벌바위로 넘어가는 자동차길이 버리미기재이고, 버리미기재 남쪽 곰바위봉과 가까운 곳에 있는 바위안부가 옛날 곰들이 넘어 다녔다는 곰넘이재이다. 가까운 곳에 733m의 곰넘이 봉이 있다.

곰넘이봉 주능선에는 미륵바위 등 기암괴석이 곳곳에 널려 있다. 정상에서 조망은 북으로는 군자산, 막장봉, 장성봉이, 동으로는 애기암봉과 둔덕산 사이로 움푹 패인 완장리 선유동계곡이 벌바위 마을과 함께 그림같이 내려다보인다. 서쪽으로는 작은군자산과 송면 선유구곡이 펼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