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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종주/백두대간자료

태백산 구간 지명 해설(도래기재~원방재)

by 산엔달 2014. 4. 18.

◆[도래기재] 763m

도래기재는 춘양면 서벽리와 우구치리를 이어주는 고갯길이다. 고갯마루에는 금정굴로 불리는 터널이 있어 사람과 차량이 통행하였으나 근래에 폐쇄되고 현재는 고갯마루를 관통하는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과 경북 봉화군 춘양면을 이어주는 2차선 아스팔트 포장도로인 88번지방도가 지나간다. 도래기재는 서벽리 북서쪽 2km 거리에 있는 마을이름을 따와서 도래기재라고 한다. 도래기 마을에는 조선시대에 역(驛)이 있었기에 역촌마을이라 하여 도역리(導驛里)라 부르다가 이것이 변음이 되어 현재는 도래기재로 통용되었다. 재넘어 우구치는 골짜기 모양이 소의 입모양을 닮아서 우구치(牛口峙)라 불린다.

 

- 금정광산

금정광산은 백두대간 구룡산의 심장에 해당하는 경북 봉화군 춘양면 우구치리 일대에 위치. 일제 강점기 때부터 50년 이상 금을 캐온 금정광산이 문을 닫으면서 구룡산 계곡 한쪽에 광미를 산더미처럼 쌓아놓았다. 그리고 여기에 어설픈 광해 방지 작업이 더해져 5년이 지난 2002년 여름 끝내 무너져내렸다. 태풍 루사에 의해 폐기물 더미가 완전히 무너진 것.

초기 복구를 담당한 산업자원부는 폐기물을 흙으로 덮고 그 위에 아카시아를 심었지만, 주변 환경을 고려하지 않고 부실하게 복구를 한 것이 화근이었다. 큰 비를 맞고 무너져내린 중금속폐기물은 한강 상류에 해당하는 우구치리계곡을 비소, 구리, 수은 등 중금속으로 오염시켰다.

우구치리는 '창지개명(創地 改名)'된 명칭이다. 애초 강원도 영월군에 편입돼 있었으나 지금은 폐광된 금정광산에서 캐낸 금을 봉화로 실어내 오면서 행정구역이 바뀌었고 폐광지역 침출수가 영월로 흐르는 하천을 오염시켜 지역간 환경 분쟁을 낳고 있다.

 

 

◆[구룡산] 九龍山 1345.7m

강원 영월군 상동읍과 경북 봉화군 춘양면 사이에 있는 한국의 산.

태백산(太白山:1,567m), 청옥산(靑玉山:1,277m), 각화산(覺華山:1,177m), 옥석산(玉石山:1,242m) 등과 함께 태백산령에서 소백산령이 갈라져 나가는 곳에 있다. 이 산에서 발원하는 하천들은 남북으로 흘러서 각각 낙동강과 남한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이 산은 아홉 마리 용이 승천하여 구룡산 이라 하는데,용이 승천할 때 어느 아낙이 물동이를 이고 오다 용이 승천하는 것을 보고 "뱀봐라" 하면서 꼬리를 잡아당겨 용이 떨어져 뱀이 되어 버렸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구룡산 아래를 천평이라 한다.

태백산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을 때 태백산 정상을 天嶺이라 하였고, 천제단이 있는 곳을 天山이라 하여, 그 아래 있는 들을 "하늘들"이라 하여 "天平"이라 하였다 한다.

 

 

◆[고직령] 高直嶺

고직령은 ‘높고 곧다’고 해서 붙여졌다. 이곳은 ‘높은 것’은 당연하고 ‘곧은 길’은 서벽리에서 올라오는 ‘곡내계곡길’이다. 따라서 춘양면의 입장에서 이름붙인 것으로 보여진다.

 

구룡산에서 떨어지면 높고 곧은 고직령이다. 설에 의하면 고개 북쪽에 사창(社倉)이 있어 고직(庫直)이가 지킨다. 고산자 김정호[대동지지]삼척 산천에는 서쪽 일백십리에 고석령(孤石嶺)이 있고 매우 험하다.

 

 

◆[곰넘이재]

‘옛날부터 이 고갯길은 경상도에서 강원도로 들어가는 중요한 길목이였으며 특히 태백산 천제를 지내러 가는 관리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던 고갯길이었다. 문헌 영가지(永嘉誌)에 웅현(熊峴)이라고 표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언제부터인가 순 우리말로 순화하여 곰넘이재로 부르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다른 뜻풀이에 의하면. "곰"은 "검"에서 온 말로 "신"을 의미하고 태백산으로 천제를 지내려 가는 사람들이 이 고개를 넘어가며 행렬을 이루니, "신"이 있는 곳으로 넘어가는 고개라 하여 "곰(검신)님이"이라 불렀다. 즉, 웅현(熊峴)은 우리말로 "곰재" 혹은 '검재"이니 다른말로 "신령(神嶺)이다. 일설에는 "곰"을 "고개"로 해석하고 "님이"를 "넘이"로 봐서 "곰님이"는 "고개넘이"로 보기도 한다.

 

 

◆[신선봉] 1300m

화방재에서 시작하든 도래기재에서 시작하든 크게 힘들인 다음에야 오르르 수 있는 보우리다. 정상을 사이에 두고 앵 방향 등산로 모두 급경사를 이루는데 등산로의 폭이 좁다. 특별한 이정표도 없고 갈길도 멀고 사방을 둘러보아도 집 한 채 보이지 않는 절해고도(絶海孤島), 적막강산(寂寞江山)이다. ‘신선이 산다는 봉우리’인데 ‘신선만 오를 수 있는 산’인 양 오르는 사람에게 구슬땀을 요구한다.

경주 손씨 묘가 있다.

 

 

◆[차돌배기]

지나는 행락객들이 쉬어가는 곳으로 옛날 이 자리에 차돌이 박혀있었다 하여 차돌배기라 전하여 오고 있다.

 

 

◆[깃대배기봉] 1368m

예전 신라시대에는 채백산과 부소산 그리고 깃대배기봉을 연결하는 대간길을 하늘고개라는 뜻의 ‘천령(天嶺)’이라고 부를 정도로 신성시했다고 한다. ‘깃대처럼 높은 봉우리’로 해석된다. ‘~배기’는 명사형 어미다. 따라서 ‘깃대봉’이다. 이 능선은 신라와 백제의 국경선이었고, 신라 사람들이 이곳을 ‘천령’이라 불렀고, 산이름이 ‘깃대봉’인 것으로 보아 고구려나 백제, 신라 중 한 나라가 국기를 내걸었던 봉우리는 아니었을까?

일제가 측량을 하면서 깃대를 꽂아 놓아 부르게 된 이름이라 한다.

 

 

◆[부소봉] 1547m

천제단 남동쪽에서 1Km 지점에 위치한 준봉이다. 장군봉, 천제단과 비슷한 높이다. 그러나 두 봉우리에 가려 빛을 보지 못하는 봉우리다. 대간의 중요한 봉우리인데도 기존의 대간로가 옆으로 비껴 우회할 정도로 구박덩이다. 남진해오던 대간이 부소봉을 지나면서 차츰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내륙으로 진입하기 시작한다. 이곳에서 경상북도 지경으로 처음 진입한다. 북족은 여전히 태백시다. 솥두껑(釜)처럼 생겨서 부르는 이름이다.

 

단군의 아들 부소왕의 이름이다.

- 환단고기의 단군팔가(檀君八加)

단군의 여덟 아들에게 관직을 나누어 맡긴 것. 부루(虎加), 신지(馬加), 고시(牛加), 치우(熊加), 부소(鷹加), 부우(鷺加), 주인(鶴加), 여수기(狗加).

이중 둘째 아들 부소는 응가로 삼아 형벌을 주관케 했다 전한다.

-> <환단고기> 자체에 대해서는 위서 논쟁이 많으니 참고 하십시오.

 

 

◆[태백산] 1567m

태백산이란 이름이 붙어있는 산이라면 그것이 어떤 산이든 일단 민족의 영산이라 할 수 있다. 일명 태백산이라는 이름도 있는 백두산이 그렇고 태백산이 그렇다."동국여지승람"에 태백산은 신라의 오악 중 하나인 북악으로 하늘에 제사를 올리던 산이라고 기록되어 일찍부터 명산으로 여겨져 왔음을 알 수 있다.

‘太白山’이란 산이름에 대해서는 이만부(李萬敷·1664-1732)의 지행록(地行錄)에 의하면 ‘산마루에 하얀 자갈이 마치 눈이 쌓인 듯 깔려 있기 때문에 太白이란 이름을 지니게 됐다’고 했으며, 후대의 고산자 김정호도 ‘산이 다 하얀 자갈들이라 이를 바라보면 마치 흰 눈이 쌓여 있는 것 같다. 산 이름 太白은 이 때문이다(대동지지 안동조)’라고 하는 같은 견해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太白山은 대체로 ‘크게 밝은 산’이란 의미의 ‘한밝뫼’ 또는 ‘한밝달’을 소리옮김과 뜻옮김하여 혼용표기한 것으로 본다. ‘한밝달’은 ‘한백달 →한배달’로 전음되어 한민족, 배달민족과 같이 우리 민족을 상징적으로 일컫는 민족 이름이 됐다. 예부터 우리 민족은 태양을 숭배하는 ‘밝은 민족’으로, 하늘에 제사하는 풍습이 있었으며, 그 제사 지내는 산을 ‘밝은 산[白山]’이라 했다. 밝은 산 중에서도 가장 크게 밝은 산이 바로 태백산인 것이다. 그리하여 태백산을 신성한 곳으로 여기고, 그 꼭대기에 제단을 쌓고 봄가을로 하늘에 제사했다.

 

태백산을 신성한 곳으로 여기고, 그 꼭대기에 제단을 쌓고 봄가을로 하늘에 제사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에서는 이미 일성왕 5년(138) 10월에 왕이 북방에 순행하여 태백산에 제사지낸 일이 있고, 기림왕 3년(300) 3월에는 우두주(牛頭州·춘천)에 이르러 태백산에 망제(望祭)를 지낸 일이 있다. 또 삼국사기 제사지(祭祀志)에 의하면, 신라에서는 태백산을 사전(祀典)에 올리고 오악의 하나인 북악으로 삼아 중사(中祀)를 지내왔다. 이에 의하면, 신라에서는 이미 2세기 초엽부터 태백산에 천제 또는 산신제를 지내왔음을 살필 수 있다. 동국여지승람 삼척부(三陟府) 태백산사(太白山祠)조에 의하면, 그러한 제의(祭儀)의 전통은 조선시대까지도 이어지고 있음을 살필 수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태백산사는 산꼭대기에 있는데, 세간에서 천왕당(天王堂)이라 한다. 본도(本道·강원도)와 경상도에서 이 산 곁 고을 사람들이 봄가을로 이곳에서 제사지내고, 신좌(神座) 앞에 소를 매어 두고는 갑자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난다. 만약에 이를 돌아볼 것 같으면 신이 불공하게 여겨 죄를 준다고 한다. 사흘이 지난 다음 부에서 그 소를 거두어 이용하는데, 이러한 풍속을 이름하여 퇴우(退牛)라고 한다.’

위의 태백산제에 관한 내용을 보면, 상고시대 이후 고대시절에는 태백산에서 천제를 지내온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으나, 이후 통일신라시대로 내려오면서 태백산을 사전(祀典)에 올리고 오악의 하나로 삼아 중사를 지내게 된 이후로는 산신제로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음사(淫祠)에 관한 제의 풍속으로까지 변질되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천제→산신제→음사로 변질

허목(許穆·1595-1682)의 기언(記言) 권37 척주기사(陟州記事) 퇴우(退牛)조에 의하면, 그러한 미신의 폐단을 보다 못한 당시의 산승(山僧) 충학(沖學)이 태백산사를 불태워 버렸으며, 이후로는 이곳 산신에게 소를 바치는 일이 없어졌다고 하였다.

다산의 목민심서 예전육조(禮典六條) 제사(祭祀)조에 의하면, 이보다 조금 앞선 시기에도 영남관찰사로 있던 김치(金緻·1577-1625)에 의해 태백산신사(太白山神祠)가 미신적 폐단으로 인해 헐린 일이 있었음을 살필 수 있다.

여지승람의 태백산사 이야기는 성현(成俔·1439-1504)의 허백당집(虛白堂集) 권12 신당퇴우설(神堂退牛設)에도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여지승람의 내용은 아마도 이를 참조했을 것으로 보인다.

태백산에서 천제를 지내던 풍속이 민간풍속으로나마 겨우 명맥을 유지하며 전래되어 왔을지는 모르나, 그 제의의 풍속이 현대까지 이어왔다는 정사(正史) 상의 분명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단군을 숭상하는 대종교와 같은 종교적 신앙 차원에서, 그리고 민족주의적 차원에서 현대에 이르러 다시 부활된 것으로 보인다.

 

태백산은 강원도 태백시에 있는 산이다. 한반도의 척추를 이루고 있는 태백산령의 상징인 태백산은 금강산, 설악산, 오대산, 청옥-두타산을 거쳐 흘러온 맥이 한번 웅장하게 용트림한 산이다. 금강, 설악, 오대, 두타산이 대부분 기암괴봉으로 이루어졌거나 아니면 깊은 협곡을 거느려 명산에 걸맞는 경관을 가지고 있는 반면 태백산은 주능선일대에 국한해서이기는 하지만 그 이름이 연상시키듯 크고 거대한 능선과 봉우리로 이루어진 육산일 뿐 아기자기만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먼 산이다. 함백산이나 정암사로 빠지는 고개에서 태백산을 바라보면 거대한 활등 모양으로 휘어든 평탄하다고 해도 좋을 만한 둔중한 능선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정상을 가늠하기도 어려울 정도의 큰 덩어리로 다가온다.

동국여지승람 봉화조에 의하면, 일찍이 고려시대 최선(崔詵)은 예안(禮安) 용수사기(龍壽寺記)에서 그러한 모습의 태백산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천하의 명산은 삼한(三韓)에 많고, 삼한의 명승은 동남쪽이 가장 뛰어나며, 동남쪽의 거산(巨山)으로는 태백을 으뜸으로 일컫는다.’태백산이 얼마나 큰 산세를 이루고 있는 산인지는 정선 정암사(淨岩寺)와 봉화·영주에 자리한 각화사(覺華寺), 부석사(浮石寺) 등 신라 명찰들의 일주문 현판에 그 주산을 ‘太白山’으로 표기하고 있는 예에도 잘 드러나 있다.

현재 태백산 정상부 영봉(靈峯·1,560.6m) 위에는 자연석 녹니편마암으로 쌓은, 둘레 27.5m, 높이 2.4m, 좌우 폭 7.36m, 전후 폭 8.26m로 약간 타원형으로 된 20평 가량의 천제단(天祭壇)인 천왕단(天王壇)이 자리하고 있다. 위쪽은 원형이고 아래쪽은 네모꼴인데, 이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사상을 나타낸 구도다.

그리고 앞쪽에 ‘天祭壇(천제단)’이라 쓴 석축 제단 위 중앙에 잘 다듬어지지 않은 투박한 한글 필체로 ‘한배검’이라 써서 새기고 하얗게 칠한 자연석 위패가 세워져 있다. 아마도 대종교 신도들이 ‘한배달의 임검’ 또는 ‘한배달의 신(神)’이란 의미로 쓴 국조 단군의 위패일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곳 영봉 북쪽 상봉인 장군봉에도 사각형으로 된 장군단이란 천제단이 있고, 영봉 남쪽 아래쪽에도 하단이라 일컫는 천제단이 자리하고 있다. 이들 태백산 천제단, 특히 영봉의 천왕단이 현대에 와서는 마치 상고시대 단군의 유적지처럼 인식되기도 하나, 고대 이래의 정사(正史) 상의 기록이나 역대 지리지 상에 이곳 천제단을 명확히 언급한 예는 찾아볼 수 없다.다만 신라 박제상(朴堤上·363-419)의 저술이 영해박씨 문중에 비전되어 오다가 실전(失傳)된 것을 1953년에 박금(朴錦·1895-?)씨가 예전에 본 기억을 되살려 재생하였다는 부도지(符都誌) 따위에 다음과 같은, 유사한 제단의 모습을 언급한 내용이 보인다.

‘혁거세씨(赫居世氏)는 천성은 신과 같고 지혜는 성인과 같았다…능히 여러 부족을 통솔하여 선세(先世)의 도를 행하며 제시(祭市)의 법을 부흥하고, 남태백산(南太白山)에 천부소도(天符小都)를 건설하였다. 중대(中臺)에 천부단(天符壇)을 축조하고 동서남북의 4대에 보단(堡壇)을 설치하여 계불(??)의 의식을 행하였다.’

태백산 동북쪽 기슭 태백시 소도동 당골에는 또 단군의 화상을 봉안하고 해마다 개천절에 단군제를 지내고 있는 단군성전(檀君聖殿)이 자리하고 있다. 이 또한 1975년에 태백읍장 전대연의 후원으로 유지들이 창립한 현대 건축물일 뿐이다.

이와 같이 현재 백두대간의 등뼈 부위에 자리하고 있는 태백산 일원에서는 상고시대 단군의 발자취와 관련한 명확한 유적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예나 지금이나 고금을 통하여 일관되게 불리고 있는 ‘太白山’이란 산 이름이 상고시대 단군사화 중에 등장하는 태백산이란 산 이름과 같아 산 이름에 관해서 어느 정도의 고찰이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 천제단

태백산 최고봉 장군봉에 위치한 천제단은 높이 2.5m 정도의 사각형 제단이다. 태백산에는 장군단과 천왕단, 하단 세 개의 제단이 있는데 이를 통틀어 천제단이라 부른다. 천왕단은 하늘에, 장군단은 사람(장군)에, 하단은 땅에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규모가 가장 큰 원형의 천왕단(해발 1561m)은 장군봉에서 300m쯤 더 가야 나온다. 이곳에서 300m 더 가면 작은 사각형의 하단이 있다. 해마다 10월 상순 살아 있는 소를 몰고 올라가 천제단에서 제사를 올렸고, 이를 ‘태우’라고 했다. 지금은 10월 3일 개천절, 소머리만 놓고 제를 올린다.

 

1991년 10월 23일 중요민속자료 제228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3m, 둘레 27m, 너비 8m의 제단으로 태백산 정상에 있다. 산꼭대기에 이와 같은 큰 제단이 있는 곳은 한국에서 하나밖에 없다. 제작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단군조선시대 구을(丘乙)임금이 쌓았다고 전해지는 이 제단은 단군조선시대에는 남태백산으로 국가에서 치제하였고, 삼한시대에는 천군이 주재하며 천제를 올린 곳이다. 신라초기에는 혁거세왕이 천제를 올렸고 그 후 일성왕이 친히 북순하여 천제를 올렸으며, 300년 기림이사금 3년에 우두주에 이르러 태백산에 망제를 지내니 낙랑, 대방의 두 나라가 항복하여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치는 동안 방백수령(方伯守令)과 백성들이 천제를 지냈으며 구한말에는 쓰러져가는 나라를 구하고자 우국지사들이 천제를 올렸고, 한말 의병장 신돌석 장군은 백마를 잡아 천제를 올렸고 일제때는 독립군들이 천제를 올린 성스런 제단이다. 지금도 천제의 유풍은 면면히 이어지고 있으며 산꼭대기에 이같이 큰 제단이 있는 곳은 본토에서 하나밖에 없다.

천제단은 다른 이름으로 구령단(九靈壇) 또는 구령탑(九靈塔)이라 하고 마고탑(麻姑塔)이라 하기도 하는데, 천왕단(天王檀)을 중심으로 북쪽에 장군단(將軍檀), 남쪽에는 그보다 작은 하단의 3기로 구성되었으며 적석으로 쌓아 신 역(神域)을 이루고 있다. 위쪽은 원형이고 아래쪽은 사각형이며, 녹니편암의 자연석을 쌓아 만들었는데, 이러한 구도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사상 때문이다.

특히, 해마다 개천절에는 이곳에서 제사를 받드는데 중앙에 태극기(太極旗)와 칠성기(七星旗)를 꽂고 주변에는 33 천기(天旗)와 28수기(宿 旗)를 세우며 9종류의 제물을 갖춘다. 이 주변의 계곡 일대에는 치성을 드리는 기도처로 사용된 크고 작은 적석탑과 석단들이 있으며 함부로 짐승을 잡거나 나무를 꺾는 일을 금하고 있다.

 

태백산에 천제를 올린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 삼국사기(三國史記)

逸聖尼師今 五年十月 北巡親祀太白山

(일성왕 5년 10월에 왕이 친히 태백산에 올라 천제를 올렸다)

基臨尼師今 三年三月 至牛頭州望祭太白山樂浪帶方兩國歸服

(기림왕 3년3월에 왕이 춘천에 이르러 태백산을 바라보고 망제를 올렸으니 낙랑과 대방이 항복하여 왔다)

 

-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誌)

太伯山載府西南新羅擬五岳爲北岳有祠名曰太伯天王堂諸郡人民春秋祀之

(태백산은 삼척부의 서남쪽에 있는데 신라때 오악 가운데 북악이라 하였다. 산 꼭대기에는 신사가 있는데 이름하여 태백천왕당이라 한다. 여러고을 백성들이 봄 가을로 천제를 올린다)

 

-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太白山 新羅時北岳載中祀山頂俗稱天王堂本道及慶尙道傍邑人春秋祀之繫牛於神座前狼狼不顧而走曰如顧之神如不恭而罪之過三日府收其牛而用之名之曰退牛

(태백산은 신라 때 북악으로 중사의 제를 올리던 곳이다. 산꼭대기에는 세간에서 말하는 천왕당이 있어 강원도와 경상도의 인접 고을 사람들이 봄 가을로 제사한다. 제사를 할 때에는 신좌 앞에 소를 매어놓고 3일이 지난 후에 부에서 그 소를 거두어 가 쓰는데 이름하여 퇴우라 한다)

 

太白山祠 在山頂俗稱天王堂本道及慶尙道傍邑人春秋祀之

(태백산사는 산꼭대기에 있는데 세간에서 이르기를 천왕당이라 한다. 강원도(본도)와 경상도의 인근 고을 사람들이 봄 가을로 제사한다)

 

- 척주지(陟州誌)

太白山在府西百二十里神羅北岳載中祀風俗信鬼其絶頂作天王祠春秋大祀

(태백산은 삼척부의 서쪽 120리에 있는데 신라때 북악으로 중사의 제를 올린 곳이다. 세간에 신을 믿는 풍습이 있어 산꼭대기에 천왕사를 짓고 봄 가을로 크게 제사한다)

 

- 특정 종교인들에 의해 ‘수난’

“거룩하신 하느님과 국조 단군성조님이시여 반만년을 지켜 온 문화유산의 훼손을 막지 못하였음을 용서하소서….” 박종기 강원 태백시장이 6월 12일 오전 태백산 정상 천제단에서 신라시대 때부터 민족의 번영과 안녕을 기원하는 제를 올려 온 천제단의 훼손을 막지 못한 것에 대해 용서를 비는 고유제를 지냈다. 박 시장은 ‘고유제 축문’을 통해 “천제단의 훼손을 미처 막지 못했으나 너그럽게 용서하시고 그동안 보살펴 주신 배달민족에게 앞으로도 광명과 번영을 내려주실 것을 간절히 바란다”고 용서를 빌었다.

신라시대 때부터 하늘에 제를 올려 온 곳으로 전해지고 있는 태백산 천제단(국가지정 중요 민속자료 제228호)은 5월 27일 오전 특정 종교인들에 의해 제단의 일부가 훼손됐다. 박 시장은 “유구한 역사를 간직한 문화유산을 지키지 못한 심정을 하늘에 고하고 앞으로 다시 이 같은 사건이 일어나지 않도록 관리 감독을 철저히 하겠다는 뜻으로 고유제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 특정 종교인들에 의해 ‘수난’

“거룩하신 하느님과 국조 단군성조님이시여 반만년을 지켜 온 문화유산의 훼손을 막지 못하였음을 용서하소서….” 박종기 강원 태백시장이 6월 12일 오전 태백산 정상 천제단에서 신라시대 때부터 민족의 번영과 안녕을 기원하는 제를 올려 온 천제단의 훼손을 막지 못한 것에 대해 용서를 비는 고유제를 지냈다. 박 시장은 ‘고유제 축문’을 통해 “천제단의 훼손을 미처 막지 못했으나 너그럽게 용서하시고 그동안 보살펴 주신 배달민족에게 앞으로도 광명과 번영을 내려주실 것을 간절히 바란다”고 용서를 빌었다.

신라시대 때부터 하늘에 제를 올려 온 곳으로 전해지고 있는 태백산 천제단(국가지정 중요 민속자료 제228호)은 5월 27일 오전 특정 종교인들에 의해 제단의 일부가 훼손됐다. 박 시장은 “유구한 역사를 간직한 문화유산을 지키지 못한 심정을 하늘에 고하고 앞으로 다시 이 같은 사건이 일어나지 않도록 관리 감독을 철저히 하겠다는 뜻으로 고유제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 장군봉 將軍峰 1566.7m

춘양(春陽) 남동쪽 17km 지점에 위치한다. 태백산 최고봉으로 주목과 고사목이 많아 겨울에 흰 눈이 덮히면 장관을 이룬다. 장군봉과 태백산 천제단 사이의 능선에 자란 나무들가지에는 상고대가 피가 마치 흰 꽃밭을 연상하게 한다. 북쪽의 죽미산(竹嵋山:917m), 남쪽의 일월산(日月山:1,219m)으로 이어진다. 낙동강의 여러 지류가 여기서 발원하며, 남쪽 기슭의 장군광산에서는 납·아연·망간을 채광한다.

백두대간 상의 선달산 동쪽 도래기재에서 매봉산(천의봉·1,303.1m) 동북쪽 피재에 이르는 구간의 주산인 태백산(太白山·1,566.7m)은 고대부터 천제(天祭)를 지내온 민족의 영산이다. 이 산은 백두대간의 등줄기를 이루며 큰 덩치를 지니고 주변 지역 모든 산의 제일 큰 어른처럼 자리하고 있는 명산이다.

 

동국여지승람 봉화조에 의하면, 일찍이 고려시대 최선(崔詵)은 예안(禮安) 용수사기(龍壽寺記)에서 그러한 모습의 태백산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천하의 명산은 삼한(三韓)에 많고, 삼한의 명승은 동남쪽이 가장 뛰어나며, 동남쪽의 거산(巨山)으로는 태백을 으뜸으로 일컫는다.’

태백산이 얼마나 큰 산세를 이루고 있는 산인지는 정선 정암사(淨岩寺)와 봉화·영주에 자리한 각화사(覺華寺), 부석사(浮石寺) 등 신라 명찰들의 일주문 현판에 그 주산을 ‘太白山’으로 표기하고 있는 예에도 잘 드러나 있다.

 

‘太白山’이란 산이름에 대해서는 이만부(李萬敷·1664-1732)의 지행록(地行錄)에 의하면 ‘산마루에 하얀 자갈이 마치 눈이 쌓인 듯 깔려 있기 때문에 太白이란 이름을 지니게 됐다’고 했으며, 후대의 고산자 김정호도 ‘산이 다 하얀 자갈들이라 이를 바라보면 마치 흰 눈이 쌓여 있는 것 같다. 산 이름 太白은 이 때문이다(대동지지 안동조)’라고 하는 같은 견해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太白山은 대체로 ‘크게 밝은 산’이란 의미의 ‘한밝뫼’ 또는 ‘한밝달’을 소리옮김과 뜻옮김하여 혼용표기한 것으로 본다. ‘한밝달’은 ‘한백달 →한배달’로 전음되어 한민족, 배달민족과 같이 우리 민족을 상징적으로 일컫는 민족 이름이 됐다.

 

옛부터 우리 민족은 태양을 숭배하는 ‘밝은 민족’으로, 하늘에 제사하는 풍습이 있었으며, 그 제사 지내는 산을 ‘밝은 산[白山]’이라 했다. 밝은 산 중에서도 가장 크게 밝은 산이 바로 태백산인 것이다. 그리하여 태백산을 신성한 곳으로 여기고, 그 꼭대기에 제단을 쌓고 봄가을로 하늘에 제사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에서는 이미 일성왕 5년(138) 10월에 왕이 북방에 순행하여 태백산에 제사지낸 일이 있고, 기림왕 3년(300) 3월에는 우두주(牛頭州·춘천)에 이르러 태백산에 망제(望祭)를 지낸 일이 있다. 또 삼국사기 제사지(祭祀志)에 의하면, 신라에서는 태백산을 사전(祀典)에 올리고 오악의 하나인 북악으로 삼아 중사(中祀)를 지내왔다.

 

이에 의하면, 신라에서는 이미 2세기 초엽부터 태백산에 천제 또는 산신제를 지내왔음을 살필 수 있다. 동국여지승람 삼척부(三陟府) 태백산사(太白山祠)조에 의하면, 그러한 제의(祭儀)의 전통은 조선시대까지도 이어지고 있음을 살필 수 있다. 그 내용을 조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태백산사는 산꼭대기에 있는데, 세간에서 천왕당(天王堂)이라 한다. 본도(本道·강원

도)와 경상도에서 이 산 곁 고을 사람들이 봄가을로 이곳에서 제사지내고, 신좌(神座) 앞에 소를 매어 두고는 갑자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난다. 만약에 이를 돌아볼 것 같으면 신이 불공하게 여겨 죄를 준다고 한다. 사흘이 지난 다음 부에서 그 소를 거두어 이용하는데, 이러한 풍속을 이름하여 퇴우(退牛)라고 한다.’

위의 태백산제에 관한 내용을 보면, 상고시대 이후 고대시절에는 태백산에서 천제를 지내온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으나, 이후 통일신라시대로 내려오면서 태백산을 사전(祀典)에 올리고 오악의 하나로 삼아 중사를 지내게 된 이후로는 산신제로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음사(淫祠)에 관한 제의 풍속으로까지 변질되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천제→산신제→음사로 변질

 

허목(許穆·1595-1682)의 기언(記言) 권37 척주기사(陟州記事) 퇴우(退牛)조에 의하면, 그러한 미신의 폐단을 보다 못한 당시의 산승(山僧) 충학(沖學)이 태백산사를 불태워 버렸으며, 이후로는 이곳 산신에게 소를 바치는 일이 없어졌다고 하였다.

 

다산의 목민심서 예전육조(禮典六條) 제사(祭祀)조에 의하면, 이보다 조금 앞선 시기에도 영남관찰사로 있던 김치(金緻·1577-1625)에 의해 태백산신사(太白山神祠)가 미신적 폐단으로 인해 헐린 일이 있었음을 살필 수 있다.

 

여지승람의 태백산사 이야기는 성현(成俔·1439-1504)의 허백당집(虛白堂集) 권12 신당퇴우설(神堂退牛設)에도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여지승람의 내용은 아마도 이를 참조했을 것으로 보인다.

 

태백산에서 천제를 지내던 풍속이 민간풍속으로나마 겨우 명맥을 유지하며 전래되어 왔을지는 모르나, 그 제의의 풍속이 현대까지 이어왔다는 정사(正史) 상의 분명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단군을 숭상하는 대종교와 같은 종교적 신앙 차원에서, 그리고 민족주의적 차원에서 현대에 이르러 다시 부활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태백산 정상부 영봉(靈峯·1,560.6m) 위에는 자연석 녹니편마암으로 쌓은, 둘레 27.5m, 높이 2.4m, 좌우 폭 7.36m, 전후 폭 8.26m로 약간 타원형으로 된 20평 가량의 천제단(天祭壇)인 천왕단(天王壇)이 자리하고 있다. 위쪽은 원형이고 아래쪽은 네모꼴인데, 이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사상을 나타낸 구도다.

그리고 앞쪽에 ‘天祭壇(천제단)’이라 쓴 석축 제단 위 중앙에 잘 다듬어지지 않은 투박한 한글 필체로 ‘한배검’이라 써서 새기고 하얗게 칠한 자연석 위패가 세워져 있다. 아마도 대종교 신도들이 ‘한배달의 임검’ 또는 ‘한배달의 신(神)’이란 의미로 쓴 국조 단군의 위패일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곳 영봉 북쪽 상봉인 장군봉에도 사각형으로 된 장군단이란 천제단이 있고, 영봉 남쪽 아래쪽에도 하단이라 일컫는 천제단이 자리하고 있다.

 

이들 태백산 천제단, 특히 영봉의 천왕단이 현대에 와서는 마치 상고시대 단군의 유적지처럼 인식되기도 하나, 고대 이래의 정사(正史) 상의 기록이나 역대 지리지 상에 이곳 천제단을 명확히 언급한 예는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신라 박제상(朴堤上·363-419)의 저술이 영해박씨 문중에 비전되어 오다가 실전(失傳)된 것을 1953년에 박금(朴錦·1895-?)씨가 예전에 본 기억을 되살려 재생하였다는 부도지(符都誌) 따위에 다음과 같은, 유사한 제단의 모습을 언급한 내용이 보인다.

 

‘혁거세씨(赫居世氏)는 천성은 신과 같고 지혜는 성인과 같았다…능히 여러 부족을 통솔하여 선세(先世)의 도를 행하며 제시(祭市)의 법을 부흥하고, 남태백산(南太白山)에 천부소도(天符小都)를 건설하였다. 중대(中臺)에 천부단(天符壇)을 축조하고 동서남북의 4대에 보단(堡壇)을 설치하여 계불(??)의 의식을 행하였다.’

 

태백산 동북쪽 기슭 태백시 소도동 당골에는 또 단군의 화상을 봉안하고 해마다 개천절에 단군제를 지내고 있는 단군성전(檀君聖殿)이 자리하고 있다. 이 또한 1975년에 태백읍장 전대연의 후원으로 유지들이 창립한 현대 건축물일 뿐이다.

 

이와 같이 현재 백두대간의 등뼈 부위에 자리하고 있는 태백산 일원에서는 상고시대 단군의 발자취와 관련한 명확한 유적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예나 지금이나 고금을 통하여 일관되게 불리고 있는 ‘太白山’이란 산 이름만 상고시대 단군사화 중에 등장하는 태백산이란 산 이름과 같아 산 이름에 관해서는 어느 정도의 고찰이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단군 사적과 태백산

백두대간 상의 등줄기를 이루고 있는 태백산은 고대부터 현금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그 주이름을 ‘태백산’이라 불러왔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단군의 사적과 관련한, 상고시대 이래의 명확한 유적지는 남아 있는 것이 없다.

 

 

태백산 이외에 고대시절에 ‘太白山’으로 불리던 명산으로는 곧 우리 민족의 성산으로 여겨지는 백두산과 우리나라 제일의 명승과 큰 산세를 갖추고 있는 명산으로 운위되고 있는 묘향산(妙香山)이 있다.

 

이들 두 명산은 모두 상고시대 단군사화와 관련되는 성산으로 많이 언급되고 있는 산이다. 먼저 상고시대의 태백산과 관련한 단군사화의 내용을 삼국유사 고조선(古朝鮮)조에서 조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고기(古記·단군고기)에 이렇게 말하였다. 옛날에 환인(桓因)의 서자(庶子) 환웅(桓雄)이란 이가 있었다. 환웅은 자주 천하에 뜻을 두고 인간 세상을 탐내어 구하였다. 아버지가 그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산과 태백산[三危太伯山]을 내려다보니, 그곳은 과연 인간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할 만한 곳이었다. 이에 천부인(天符印) 3개를 주어서 환웅으로 하여금 인간세상에 내려가 이를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은 무리 3천 명을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기에 있는 신단수(神壇樹) 밑에 내려왔는데, 이곳을 일러 신시(神市)라고 한다.’

 

위 일연(一然·1206-1289)의 삼국유사와 비슷한 시기의 저술인 이승휴(李承休·1224-1300)의 제왕운기(帝王韻紀) 전조선기(前朝鮮紀)에서 또 위의 내용과 관련한

단군사화의 내용을 조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처음에 어느 누가 나라를 열었던고.

석제(釋帝)의 손자 이름은 단군(檀君)일세.

요제(堯帝)와 같은 해 무진년(戊辰年)에 나라 세워

순(舜)을 지나 하국(夏國)까지 왕위(王位)에 계셨도다.

은(殷)나라 무정(武丁) 8년 을미년(乙未年)에,

아사달(阿斯達)에 입산(入山)하여 산신이 되었으니,

나라를 누리기를 1천 하고 28년.‘

일연의 삼국유사 태백산주(太伯山註)에 의하면, ‘즉 태백산은 지금의 묘향산’이라 하였고, 또 이승휴의 제왕운기 아사달주(阿斯達註)에서는 ‘(아사달은) 지금의 구월산(九月山). 딴 이름은 궁홀(弓忽) 또는 삼위(三危). 사당(祠堂)이 지금도 있다’라 언급하고 있다. 그렇다면 단군고기에 보이는 환인이 내려다본 인간세상의 ‘삼위 · 태백산(三危太伯山)’은 바로 지금의 구월산인 삼위산과, 지금의 묘향산인 태백산이었다.

 

그리고 인간세상을 크게 이롭게 할 만한 이 두 곳 중 환웅이 내려가 자리잡은 부산(父山)·종산(宗山)이 바로 태백산인 묘향산이요, 그 아들 단군이 도읍을 옮겨가 자리 잡은 자산(子山)·지산(支山)이 바로 아사달인 구월산이었던 것이다.

 

이들 단군사화의 삼위산과 태백산 두 산에 대해서는 그 당시 현재의 어느 산인지를 일찍이 고려시대에 일연과 이승휴 등이 분명하게 밝히고 있으나, 후대의 많은 이들이

 

 

대부분 이를 자신의 주관적 관점에 집착하여 신화적, 언어학적, 종교적, 민족주의적, 국수적 관점에 의거하여 보려고만 하므로 그 사화 속에 내재된 진실성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 때문에 어떤이는 이들 삼위산을 중국 감숙성(甘肅省) 돈황시(敦煌市)에 있는 삼위산으로 보기도 하고, 태백산을 중국 섬서성(陝西省) 미현(眉縣) 남쪽에 위치한 태백산(3,767m)으로 보기까지도 한다.

 

고대에 태백산으로도 불리던 묘향산과 아사달산으로도 불리던 구월산에는 모두 상고

시대 단군의 유적지가 남아 있다. 곧 묘향산 향로봉 중복에는 단군이 태어나신 곳이라는 너비16m, 길이 14m, 높이 4m 가량의 단군굴(檀君窟)이 있고, 단군굴 근방에 청정한 천수(泉水)가 있는데, 단군이 잡수며 생장하였던 샘물이라 하며, 그 근방에 있는 단군대(檀君臺)라는 석대는 단군이 활을 쏘던 사대(射臺)라고 한다.

 

역사학자 장도빈(張道斌)은 단군고적고(檀君古蹟考)에서 단군사적과 관련한 묘향산을 답사하고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묘향산 최고봉에 다다르면 백토(白土)로 된 고봉이 하늘에 닿았는데, 그 봉우리는 온전히 단향(檀香)나무로 엄폐되어 있다. 이렇게 백설 같은 봉만(峯巒)에 푸른 단향나무가 가득 차서 산을 가린 것을 볼 때 과연 이것이 태백산 단목하(檀木下)인 것을 알았다. 따라서 이 산에 단향나무가 많은 고로 산의 고명(古名)이 향산(香山)이요, 이 산에서 탄생한 신인(神人) 왕검(王儉)을 후세에 존칭하여 단군이라고 한 것을 알았다.’

 

삼국사기의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東明聖王)조에 의하면, 동부여의 왕 금와(金蛙)가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를 만난 곳이 바로 태백산 남쪽 우발수(優渤水)라 하였는데, 여기서의 우발수 또한 묘향산 남쪽 옛 영변군 남쪽 백령면의 은봉(銀峯) 밑 학암(鶴岩) 위에 있는 것으로 볼 때 이 기사의 태백산도 곧 묘향산을 가리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구월산에도 상봉 북동쪽 오봉 중복과 산기슭에 단군대와 단군굴이 있다. 단군대 부근에 궁궐이 있었으므로 궐산(闕山)이라 일컫던 산 이름이 연음(延音)되어 구월산이라 불리게 되었다(대동지지 문화조 참조). 이곳 단군대는 단군이 등선한 곳이라 전한다.

 

이 산 상봉 남동쪽에는 아사봉(阿斯峯·687m)이란 봉 이름도 전한다. 또 이 산 기슭 옛성당리에는 일찍이 고려 때부터 환인·환웅·환검(단군)을 모신 삼성당(三聖堂), 또는 삼성묘(三聖廟)라 일컫던 신묘(神廟)가 있었다.

 

 

태백산의 봉우리들과 문화유적

태백산 최고봉은 현재 장군봉(1,566.7m)이라 일컫고 있고, 천왕단이 있는 영봉(靈峯·1,560.6m), 그리고 남쪽의 부소봉(1,546.5m)과 부소봉 동쪽의 문수봉(1,517m)이

 

 

대표적인 봉우리들이다. 그런데 태백산 북쪽의 함백산(1,572.9m) 등 더 높은 봉우들이 태백산권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천제단이 있는 현재의 산봉이 태백산 주봉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보면 옛날 선인들은 지금과 같이 정밀하게 산 높이를 잴 수 있던 시절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곧 이만부의 지행록에 의하면, 태백산의 산봉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문수(文殊)·대박(大朴)·삼태(三台)·우보(牛甫)·우검(虞檢)·마라읍(摩羅邑)의 봉우리들 이 6, 7백리를 울창하게 서리어 있다.’ 위의 대박봉 곧 대박산(大朴山)은 ‘한밝달’의 차용표기로, 전음되어 현재는 함백산으로 불리고 있다.

 

함백산 북서쪽 기슭에는 오대 적멸보궁의 하나가 자리하고 있는, 신라 때 자장율사가 창건한 정암사가 있다. 이 절로 인해 함백산은 동국여지승람 정선군조에 의하면, 정암산(淨岩山)으로도 불리었고, 삼국유사의 대산월정사오류성중(臺山月精寺五類聖衆)조에 의하면, 묘범산(妙梵山)으로도 불리었으며, 택리지의 복거총론 산수조에 의하면 작약봉(芍葯峯)으로도 불리었다. 또 동국명산기에 의하면, 함박봉 곧 함박산(含朴山) 속칭 모란봉(牧丹峯)으로도 불리어졌다.

또 원효대사가 창건하고 태백산사고(太白山史庫)가 있었던 각화사가 자리한 산봉우리는 각화산(覺華山·1,176.7m)이고, 의상조사(義湘祖師)가 창건한 부석사가 자리한 산봉우리는 봉황산(鳳凰山)으로 불리어졌다.

 

태백산은 고금을 통하여 일관되게 태백산으로 불리어 왔으나, 정암사사적기에 의하면 그 일명으로서 ‘대여산(黛輿山)’이라 일컬은 예도 있다.

 

 

-태백산 자연환경과 문화

민족의 영산으로 알려진 태백산(1,567m)은 주목군락지로 유명한데, 봄이면 주목과 어우러져 피는 철쭉이 장관을 이룬다. 태백산철쭉제는 철쭉이 만개하는 시기에 맞추어 1985년부터 열리고 있다. 태백시가 주최하고, 태백산철쭉제위원회가 주관한다.

태백산 정상 천제단 일대와 장군봉, 부쇠봉 일대에 이르는 화려한 철쭉과 세계적으로 희귀한 고생대 초기 화석, 구문소(천연기념물 417) 등과 연계하여 열려 해마다 관광객의 수가 증가하고 있다.

주요 행사로 산신제, 태백산등반대회, 철쭉제 태백주부가요제, 산악인 장기자랑대회, 태백 캠포트제닉, 팔도 사투리 경연대회, 철쭉제 사생대회가 열리고, 대중클래식 경음악연주회, 마임페스티벌, 대북공연(소릿길), 사물놀이 공연, 가두놀이(카지노, 칵테일), 칵테일쇼, 세미 클래식콘서트, 퓨전 국악공연, 어린이 스포츠댄스 공연, 남사당패 공연, 전통 풍물놀이 등이 펼쳐진다.

고생대 화석 명품전, 맑은 물 사진전시, 태백풍물 사진전이 행사 기간 동안 열리며, 화석모형 만들기, 현지 화석캐기를 체험할 수 있고, 화석영화를 상영한다. 그외 불꽃 퍼포먼스, 산악인의 밤이 열리고, 향토 음식장터, 옛날 태백식당, 태백특산물 판매코너(산나물, 특산품)를 통해 지역 음식을 맛볼 수 있다.

 

 

◆[사길령 산령각(산신각)]

사길령의 본래 이름은 새길령. 고려시대에 새로 개척한 길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사길령은 경상도에서 강원도로 들어오는 관문으로, 높고 험하기로 유명했지만 가장 가까운 길인 만큼 길손의 왕래가 많았고, 특히 보부상들이 수십 혹은 수백명씩 대열을 이루어 계수의 인솔 하에 넘어 다녔다. 산이 험해 맹수와 산적들의 출몰이 잦았기 때문에 고갯길의 무사안전을 위해 고갯마루에 당집을 짓고 제사를 올리게 되었으며, 지금도 매년 음력 4월 15일 제를 올린다. 현재 태백산사길령산령각계회에 보존 중인 천금록은 200여년 전부터 보부상들이 이곳 태백산산령각에서 제사를 지낸 기록으로서, 우리나라에서 유래가 없는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화방재] 939m

태백과 영월을 연결하는 고개로 31번 국도가 허리를 넘어간다. 마루금에는 어평휴게소 겸 주유소가 자리한다. 내륙쪽 200m 거리에 만항재에서 내려온 414번 지방도로가 합류한다. ‘화방’은 ‘꽃밭’이라는 뜻이다. 진달래 피는 계절에 이곳을 여행해본 종주자에게는 쉽게 납득된다. 봄이 되면 도로변의 밭을 제외하고는 온 산이 진달래로 붉게 물드는 장관이 연출되는 곳이다.

 

이곳 주민들은 주로 어평재라고 부른다. 서쪽 기슭의 어평이라는 마을에서 유래했다 한다. 어평이란, 태백산의 산신이 된 단종대왕의 혼령이 “이제부터 내 땅(御坪)이다.”라고 해서 ‘어평리’라는 이름이 붙었고 ‘재’를 어평재라 불렀다는 유래도 있고, <태백의 지명유래>에는 봄이면 고갯마루 부근이 진달래와 철쭉으로 붉게 타올라 꽃방석 같다 하여 화방재(花房嶺)라고 불렀다는 설이 있다. 또한 일제 강점기 방화선(防火線)을 설치하면서 현재의 이름이 유래했다는 의견도 있으며, ‘정거리재’라고도 한다.

 

 

◆[수리봉]

함백산 구간의 가장 남쪽 봉우리다. 남쪽 건너편으로 태백산이 올려다 보인다. ‘독수리의 일종인 수리가 살던 봉우리’다. 일견 ‘솔(松)’이 ‘수리’로 변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실제 아름드리 노송들이 군락을 이루는 지역이다. 그 중에는 수백 년쯤은 족히 먹어 보이는 것도 많다.

 

 

◆[만항재] 1330m

만항재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포장도로로 고도가 무려 1,330m이다. 그래서 국가대표선수들의 고산 적응 훈련 장소가 있다. 만항재는 정선, 태백, 영월의 경계에 위치한 재로 함백산 줄기가 태백산으로 흘러내리면서 잠시 쉬었다 가는 곳으로, 1980년대까지 일대에서 캐낸 석탄을 옮기던 운탄로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정암사 입구를 지나 고개에 오르는 동안 만나게 되는 만항마을은 본래 주변 탄광의 근로자들이 살던 마을이다. 그러나 인근 탄광들 이 문을 닫으면서 마을 주민들이 밭농사에 손을 대 삶을 이어 간다.

만항재의 북쪽 일대는 비교적 완만한 능선이 이어져 파릇파릇 잎이 돋아나는 봄부터 야생화 천국을 이룬다. 정제된 느낌이나 향기는 덜하지만 자유와 생명력 만큼은 오히려 정원을 장식하는 관상용 꽃이 따라오지 못한다. 그래서 천상의 화원이라 불린다.

 

晩學재의 뜻이라고 하며, 늦은목이재도 비슷한 뜻이라고 한다.

 

 

[꼴두바위]

광산마을 상동의 꼴두바위.

상동은 지금이야 내세울 것 하나 없는 산촌마을이지만, 한때 우리나라를 먹여살릴 정도였다는 엄청난 규모의 중석(텅스텐) 광산인 대한중석이 있던 곳이다. 대한중석은 아시아 최대의 중석광산으로 교과서에도 실릴 정도였다. 중석을 캐던 광부들은 석탄광산에서 일하는 광부보다 월급이 50% 정도 높았다는 게 마을 사람들의 설명. 그래서 매일 밤 상동의 술집이며 유흥업소들은 하루 일을 끝낸 광부들로 흥청거렸다고 했다. 광산이 문을 닫은 뒤, 상동은 빈집이 훨씬 더 많다. 가게들은 대부분 문을 닫아 마치 시간이 20여년 전에 멈춰진 것처럼 쓸쓸하다.

꼴두바위는 마을 한복판에 불쑥 솟아있는 거대하고 기괴한 바위. 금강산 만물상의 일부처럼 보이는데, 흙 한 줌 없어 보이는 바위벼랑에 뿌리를 내린 소나무들이 인상적이다.

조선시대 송강 정철이 강원감사로 있을 당시, 이 바위를 보고는 목욕재계한 뒤 절을 올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주변 사람들이 ‘왜 바위에 절을 하냐’고 물었더니 ‘몇백년 후에 세상사람들의 숭배를 받을 바위’라고 예언했단다. 마을 사람들은 1923년 이곳에서 중석광산이 개광된 것이 바로 ‘예언의 결과’라고 입을 모았다.

 

 

 

[정암사]

대한 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月精寺)의 말사이다. 자장(慈藏)이 636년(선덕여왕 5)에 당(唐)나라에 들어가 문수도량(文殊道場)인 산시성[山西省] 운제사(雲際寺)에서 21일 동안 치성을 올려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석가의 신보(神寶)를 얻어 귀국한 후 전국 각지 5곳에 이를 나누어 모셨는데, 그 중 한 곳이 이 절이었다고 한다. 신보는 석가의 정골사리(頂骨舍利)와 가사·염주 등인데, 지금도 사찰 뒷편 함백산에 남아 있는 보물 제410호인 수마노탑(水瑪瑙塔)에 봉안되어 있다고 하여, 법당에는 따로 불상을 모시지 않고 있다.

(두산백과)

 

기록에 따르면, 이 절은 1713년(숙종 39) 중수했는데 낙뢰로 부서져 6년 뒤 중건하였고, 최근에 새로 두세 차례 중건하였다. 신라시대 때 절을 창건한 자장법사가 탑을 쌓기 전 정성껏 기도를 하니 용왕이 감복해 빛이 고운 수마노(석영의 일종)를 하사했고, 이를 받아와서 탑을 쌓았다 한다.

 

양산 통도사, 오대산 상원사, 설악산 봉정암, 영월 법흥사와 함께 5대 적멸보궁으로 꼽힌다. 원래 적멸보궁에는 부처님을 모시지 않는데, ‘사리’라는 진신이 모셔졌기 때문이다. 정암사에는 그 사리가 산의 위 중턱인 수마노탑에 모셔져 있다. 수마노탑은 용왕이 보내준 마노석을 쌓은 탑으로 알려져 있다.

 

- 천연기념물 제73호인 정암사의 열목어 서식지(熱目魚 捿息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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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는 압록강, 두만강, 청천강, 대동강, 한강, 낙동강 상류지역에 분포하고 있으며, 여름에는 하천에서 가장 상류의 시원한 곳에서 살고, 겨울에는 중류지역까지 내려와서 월동한다. 정암사의 열목어서식지는 세계에서 열목어가 살 수 있는 가장 남쪽지역이며, 숲이 잘 발달하여 열목어가 살 수 있는 가장 좋은 환경을 지닌 지역 가운데 하나이므로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창옥봉]

특이한 점 없는 흙길의 능선봉우리와 이어지는 안부 능선 길. 표지석이 없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창옥봉’이란 걸 모르고 지나치기 일쑤다.

 

 

◆[함백산] 1572.9m

강원도 정선군 고한읍과 태백시의 경계에 있는 산.

강원 동부의 최고봉으로 정상에서 태백산, 백운산 등 지역 전체와 동해 일출 전망이 가능하며, 전국 최고 최대의 민영탄광인 동원탄좌, 삼척탄좌 등이 소재하고 있어 석탄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산업선인 태백선 철도가 산의 북쪽 경사면을 지난다.

함백산은 조선 영조 때의 실학자 여암 신경준이 동·서·남·북으로 뻗친 대간과 지맥의 분포를 살펴 저술한 산경표에 대박산으로 기록되어 있다. 정선총쇄록에는 상함박, 중함박, 하함박 등의 지명이 나오는데 왜 함백으로 바뀌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수 없으나, 태백(太白), 대박(大朴)과 함백(咸白)이라는 말은 모두 ‘크게 밝다’는 뜻이다. 오늘날의 측량기술을 통해 밝혀낸 높이는 함백산(1,572.9m)이 태백산(1,566m)보다 높지만 옛날에는 두 산 모두 ‘크게 밝은 산’의 봉우리였음이 틀림없다.

함백산 북서쪽 사면에는 서기 636년 신라 선덕여왕 5년에 자장율사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진 정암사(淨岩寺)가 있으며, 함백산 등산로 중 하나인 만항재는 해발 1,313m로 남한에서 가장 높은 도로이며 싸리재는 1,268m로 만항재와 버금간다. 이곳에선 매년 8월이면 함백산 야생화축제가 열린다.

 

 

◆[중함백]

중함백 정상엔 인공으로 깍은 듯 자연스레 깎인 넓은 돌 판 쉼터가 있다. 이정표나 표지석이 없으나 동남쪽으로 시야가 열려 있어 황지 시가지 일대가 내려다보이고, 함백산 방송 중계탑과 함백산 스키장이 한눈에 들어온다.

중함백에서 함백산으로 가는 길에 있는 유명한 주목군락지가 있다.

 

 

◆[은대봉] 1442.3m

함백산의 봉우리인 상함백산, 중함백산(1,505m), 하함백산(1,527.9m), 창옥봉(1,380m) 중 상함백산을 가리킨다. 정암사를 세울 때 조성된 금탑, 은탑에서 금대봉과 은대봉이라는 이름이 생겨났다고 전해진다. 두문동재(예전 이름 싸리재)를 통해 바로 이웃에 있는 금대봉과 이어진다. 정상에는 헬기장이 조성되어 있으며, 북쪽으로 금대봉·비단봉·천의봉, 동쪽으로 태백시와 백병산·면산·묘봉으로 이어진 낙동정맥, 남쪽으로 중함백산, 서쪽으로 백운산·두위봉 등이 보인다. 정상에서 내려오는 길 아래로는 죽령터널에 이어 한국에서 두번째로 긴 정암터널(4,505m)이 지나간다.

낙동강의 원류 발생지는 이곳에서 가까운 천의봉의 동쪽계곡에 자리한 너덜계곡으로 공식 인정되었지만, 은대봉의 은대샘에서 태백시 화전동쪽으로 흘러내리는 황지천(黃池川)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산자락에는 태백광업소와 한국 기차역 중 제일 높은 곳(855m)에 위치한 추전역이 있다. 부근에 정암사, 용연동굴이 있다.

 

- 낙동강의 발원샘 은대샘(너덜샘)

낙동강의 첫 물방울은, 낙동강의 발원지로 알려져 있는 황지보다 상류에 있는 은대봉의 너덜샘에서 시작한다. 그래서 전문가나 향토사학자들은 너덜샘은 낙동강의 발원샘, 황지는 낙동강의 발원지로 구분해서 부르고 있다. 황지의 상징성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두문동재] 싸리재 1268m

두문동(杜門洞)은 본래 북녘 땅 개풍군의 지명이다. 개성 송악산 서쪽 자락 만수산과 빈봉산에 각각 두 곳의 두문동이 있었다. 『개풍군지』를 들추어보니 만수산의 서두문동에는 고려의 문신 72인이 은둔했고, 빈봉산의 동두문동에는 무신 48인이 숨어 살았다 한다. 전설을 따르자면, 회유에 지친 조선의 태조는 끝내 그 두 곳의 두문동에 불을 질렀다. 많은 이들은 그렇게 불에 타 죽고 살아남은 일곱 충신이 흘러간 곳이 바로 정선의 고한 땅이었다. 또한 변함없이 두문불출하였으니 이름 역시 두문동이다. 고려왕조를 섬기던 신하들이 불사이군으로 충성을 다짐하며 정선 두문동으로 숨어들어 마지막 공양왕을 그리며 읊은 시가 정선아리랑의 시원이라고 한다.

 

-> 흔히 두문동재의 옛 이름을 싸리재라고도 하지만, 일부 학자들에 의하면 싸리재는 또다른 고개를 뜻한다고도 합니다.

 

 

◆[금대봉]

두문동재 북쪽에 위치한 ‘양강발원봉’이다. 서쪽 물은 검룡소를 출발해 한강으로 흐르고, 동쪽 물은 용수골에서 시작해 낙동강 천리 물길로 이어진다. 정상부근은 ‘산상의 야생화원’으로 불린다. 금대봉과 북쪽의 대덕산 일대 126만평은 환경부가 지리산 노고단과 함께 ‘자연생태계보호지역’으로 지정할 정도로 생태계가 잘 보존되어 있는 곳이다. 정상에서의 전망도 좋다. 인근의 태백과 고한의 시가지가 산자락 사이로 보인다. 한강과 낙동가의 발원을 표시하는 나무목과 전망시설이 있다. ‘금대(金臺)’라는 말은 원래 ‘검대’로 ‘신(神)이 사는 곳’이라는 뜻이다. 신이 사는 곳이 오늘날 야생화원으로 조성되어 의미가 더해진다.

 

 

 

[양강 발원봉] 1418.1m

"이 봉을 양강 발원봉이라 함은, 북쪽으로는 한강이 남동쪽으로는 낙동강이 비롯하여 흐름이라" 써있는 '양강발원봉'(兩江發源峯) 나무 표지목이 서 있다.

 

금대봉(1,418m) 북쪽 계곡의 '검룡소'(儉龍沼)는 "한강(漢江) 발원지"로 알려진 곳이다. 예전엔 조선 시대에 최상품의 샘물로 인정받던 평창 오대산 우통수가 한강의 발원지로 알려져 있었으나, 1980년대 정밀측정 결과 검룡소에서 흐르는 물줄기의 길이가 32km나 더 길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묻혀 있던 검룡소는 일약 한강의 발원지로 화려하게 등장했다. 검룡소는 오랜 세월 동안 솟아 흐른 물살로 인해 깊이 1~1.5m, 넓이 1~2m의 석회암반이 푹 파였는데, 곧바로 20m에 이르는 와폭이 계단을 이루며 용틀임 한다. 원시림이 잘 보존된 이곳에는 고목나무샘, 제당굼샘, 예터굼샘 등지의 물길이 땅속으로 스며들어 다시 검룡소에서 솟아나 520여km에 이르는 남한강의 발원을 이룬다고 한다. 이어 물줄기는 정선을 거쳐 영월까지 아름다운 '동강'으로 굽이치며 흐르고 흘러 단양과 충주, 여주, 양평으로 그 흐름을 계속한다.

또 검룡소에서 솟은 검룡수(儉龍水)는 사계절 내내 9℃를 유지하기 때문에 물이 흐르는 주변 바위엔 한겨울에도 푸른 이끼가 자라고 있다. 물맛 역시 그윽하게 혀끝을 감돈다.

전설에 의하면 서해에 살던 이무기가 용이 되기 위해 한강 상류를 향해 거슬러 오르다가 검룡소에 이르러 더 이상 거슬러 올라갈 곳이 없음을 알고 그 자리에서 용이 되는 수업을 쌓았다고 한다. 이때 이무기가 못으로 들어가기 위해 몸부림 친 흔적이 검룡소에서 쏟아지는 와폭으로 남아있다. 그런데, 검룡소에서 머물며 용이 되는 수업을 쌓던 이무기가 부근에서 풀을 뜯다가 물을 마시러 오는 소들을 잡아먹자 화가 난 마을 사람들이 검룡소를 메워버렸고, 이무기는 결국 용이 되지 못했다고 한다. 검룡소는 1980년대에 복구되었다.

 

- 검룡소 전설과 관련하여...

국립지리원에서 검룡소를 한강 발원지로 공식 인정하자, 산판작업 때문에 묻혀있던 못을 복원하고 검룡소라는 이름과 전설을 지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또한 태백 시내 한복판에 자리한 ‘황지(黃池)’는 영남 땅을 적시며 흐르는 낙동강의 발원 연못으로 유명하다. "낙동강(洛東江) 1,300리의 첫여울"로서, 사시사철은 물론 가뭄이 들거나 장마가 져도 연못의 물이 줄거나 늘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깊이를 알 수 없는 물굴에서 솟는 폭 20여m의 연못 주위를 돌아볼 수 있도록 커다란 바윗돌이 놓여 있으며, 물 속의 황금빛 잉어가 유유히 헤엄치고 있다.

백두대간 은대샘(너덜샘)에서 발원한 낙동강 물줄기는 황지에서 숨을 고른 뒤 낙동강 1,300리를 흘러간다. 황지의 옛 이름은 ‘하늘 못’이란 뜻의 천황(天潢). 세월이 지나면서 황지(潢池)라 부르다 나중에 삼수변이 떨어져나가면서 지금의 이름이 되었다. 원래 이 부근은 수만 평의 땅이 질퍽한 늪지대를 이뤄 버드나무와 물푸레나무 등이 우거진 천혜의 늪이었다. 여기엔 시주를 청하는 스님에게 쇠똥을 퍼주었다가 집터가 꺼지면서 큰 연못으로 변하는 화를 당한 노랭이 황부자 전설이 전해져온다. 마당늪, 방깐(방앗간)늪, 통시(변소)늪의 세 연못과 굴뚝소가 전설의 흔적이다.

 

 

백두대간 분수령을 끼고 자리 잡은 강원도 태백은 ‘강의 고향’이다. 백두대간 금대봉(1,418m) 기슭의 검룡소(儉龍沼)는 한반도의 젖줄인 한강의 발원지고, 시내 한복판에 자리한 황지(黃池)는 영남 땅을 적시며 흐르는 낙동강의 발원 연못으로 유명하다.

창죽동 검룡소 주차장에 차를 대고 이깔나무 빼곡한 널따란 산길을 1.3km 걸어 오르면 검룡소가 나온다.

 

금대봉의 고목나무샘·물구녕석간수·제당굼샘 등에서 처음 솟은 샘물은 각각 지하로 1~2km쯤 흘러 내려와 검룡소에서 솟구치는데, 웬만한 샘물은 엄두도 못 낼 하루 2,000~3,000톤이나 되는 양이다.

 

 

예전엔 조선 시대에 최상품의 샘물로 인정받던 평창 오대산 우통수가 한강의 발원지로 알려져 있었으나, 1980년대 정밀측정 결과 검룡소에서 흐르는 물줄기의 길이가 32km나 더 길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묻혀 있던 검룡소는 일약 한강의 발원지로 화려하게 등장했다.

 

검룡소는 오랜 세월 동안 솟아 흐른 물살로 인해 깊이 1~1.5m, 넓이 1~2m의 석회암반이 푹 파였는데, 곧바로 20m에 이르는 와폭이 계단을 이루며 용틀임한다.

또 검룡소에서 솟은 검룡수(儉龍水)는 사계절 내내 9℃를 유지하기 때문에 물이 흐르는 주변 바위엔 한겨울에도 푸른 이끼가 자라고 있다. 물맛 역시 그윽하게 혀끝을 감돈다.

 

전설에 의하면 서해에 살던 이무기가 용이 되기 위해 한강 상류를 향해 거슬러 오르다가 검룡소에 이르러 더 이상 거슬러 올라갈 곳이 없음을 알고 그 자리에서 용이 되는 수업을 쌓았다고 한다. 이때 이무기가 못으로 들어가기 위해 몸부림 친 흔적이 검룡소에서 쏟아지는 와폭으로 남아있다.

 

그런데, 검룡소에서 머물며 용이 되는 수업을 쌓던 이무기가 부근에서 풀을 뜯다가 물을 마시러 오는 소들을 잡아먹자 화가 난 마을 사람들이 검룡소를 메워버렸고, 이무기는 결국 용이 되지 못했다고 한다. 검룡소는 1980년대에 복구되었다.

 

이렇듯 특별한 전설이 서려있는 검룡소는 어느 계절에 가도 항상 신령스러운 분위기가 철철 넘친다. 온갖 야생화가 다투어 피어나는 요즘 같은 계절이라면 식물 생태계의 보고로 꼽히는 금대봉의 아름다운 풍광도 덤으로 감상할 수 있어 더없이 좋다.

 

 

-낙동강 1300리 첫물인 황지

검룡소 샘물을 마시고 태백산으로 발길을 돌리면 태백 시내에서 황지를 만나게 된다.

백두대간 은대샘(너덜샘)에서 발원한 낙동강 물줄기는 황지에서 숨을 고른 뒤 낙동강 1,300리를 흘러간다. 황지의 옛 이름은 ‘하늘 못’이란 뜻의 천황(天潢). 세월이 지나면서 황지(潢池)라 부르다 나중에 삼수변이 떨어져나가면서 지금의 이름이 되었다.

 

원래 이 부근은 수만 평의 땅이 질퍽한 늪지대를 이뤄 버드나무와 물푸레나무 등이 우거진 천혜의 늪이었다.

여기엔 시주를 청하는 스님에게 쇠똥을 퍼주었다가 집터가 꺼지면서 큰 연못으로 변하는 화를 당한 노랭이 황부자 전설이 전해져온다. 마당늪, 방깐(방앗간)늪, 통시(변소)늪의 세 연못과 굴뚝소가 전설의 흔적이다.

 

검룡소와 황지를 보았다면 태백산(太白山·1,567m)으로 가보자. 태백산 철쭉은 전국의 여러 철쭉 명산 가운데 가장 늦게 피는 편이다.

 

 

정상 부근의 철쭉은 보통 6월 초쯤에 만개하는데, 올해엔 최근 계속된 영동지방의 이상저온 현상으로 예년보다 7~10일 가량 늦다. 따라서 천제단과 장군봉 사이에서 군락을 이루고 있는 백두대간 분수령의 철쭉은 15일을 넘기더라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정상엔 삼국 시대부터 하늘에 제사를 지내온 천제단(天祭壇, 중요민속자료 288호)이 있다.

 

한편, 천제단과 망경사 사이에 있는 단종비각에선 억울하게 죽은 뒤 태백산 산신령이 된 조선 단종의 슬픈 사연을 엿볼 수 있다.

 

동해의 용왕신이 거주한다는 망경사 용정(龍井)도 산행길에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명소. 이 샘물은 ‘한국의 명수 100선’ 가운데 으뜸으로 꼽힐 정도로 물맛이 빼어난데, 개천절에 태백산에서 천제를 지낼 때 제수(祭水)로 쓰고 있다.

 

 

 

[태백]

천년병화 불입지지(千年兵禍 不入之地)라는 이상향, 태백 160리. 태백(太白)은 정감록에 '이상향'으로 지목될 만큼 첩첩산중의 고원에 자리잡은 곳으로, 사실 내륙지방에서 백두대간을 넘지 않고서는 그곳을 갈 수가 없다. 현재 사양산업이 되어버린 탄광지대에서 화려한 카지노 업계를 유치하여 경제적 발전을 꾀하고자 애쓰는 태백과 사북, 고한, 정선 지역 주민들의 고난과 모순이 길거리에서도 역력하게 보인다.

 

 

태백은 자타가 공인하는 전국 제 1의 광도(鑛都)이다. 일제 무렵, 삼척개발주식회사가 조선총독부 보유 탄전의 광업권을 인수하여 장성의 석탄을 캐낸 것이 탄광의 시작이다. 태백의 연감을 들추어보니 1981년의 광부 수가 무려 19,375명에 달했다 한다. 집계되지 않은 숫자까지 합치면 2만 명을 훨씬 웃돌았다. 1987년 태백의 석탄 생산량은 640만 톤이나 되어 전국 생산량의 30%에 이르렀다. ‘지나는 개도 입에 만 원짜리를 물고 다녔다’는 말이 과장이 아닐 정도로 호황을 누렸다. 태백에 시가지가 형성되고 1981년 장성·황지읍이 삼척군에서 갈라져 나와 태백시로 승격된 것은 오로지 탄광 덕분이었다. 그러나 그 영화는 이제 흉물스럽게 버려진 탄광과 빈집을 뒤로 한 채 저마다 진폐를 쿨룩이며 대처로 떠난 광부들의 비극으로 막을 내렸다. 또한 시내 중심부의 연화산 자락에 세워진 산업전사위령탑에는, 광산에서 일하다가 죽어간 수많은 광산노동자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쑤아밭령]

노루목이다. 과거에 대간을 넘나들던 고개였는지는 모르지만 지금의 모습으로는 전혀 아니다. 잡목 사이로 대간길만 반듯하게 지나간다. 단순한 참고점에 불과하다. ‘쑤아밭’은 지금의 ‘소나무밭’에 해당한다. ‘솔(松)밭’이 소리 변화된 말이다. 일부에서는 ‘사리밭’으로 보기도 한다. 단충나무가 많아서 ‘축치(?峙)’라고도 부른다.

 

 

◆[비단봉]

추전마을 고랭지채소 단지의 서족 봉우리다. 채소밭의 경계에서 능선길로 들어와 15분 정도면 도착한다. 남쪽 아래로 추전역이 아스라하게 보인다. 정상에는 잡목이 많아 전망이 좋지 않다. 정상에서 서쪽으로 내려서면 직벽에 가까운 암릉이 나타나는데 높지는 않다. (멀리서 보기에) 비단처럼 부드러운 곡선 형태여서 붙여진 이름같다. 우리말 지명이다.

 

 

 

◆[매봉산] 1303m

매봉산은 ‘매(수리의 일종)가 사는 봉우리’인데 한자어로 표기하면서 음차한 것이다. ‘봉산(峰山)’은 봉우리의 이중표현이다.

 

원래 이름은 천의봉, 하늘의 봉우리라는 뜻을 가진 지명이라고 한다. 하늘에서 떨어진 빗물이 한강과 낙동강, 오십천으로 흘러들도록 물줄기를 만들어 주는 산으로 부산 몰운대로 이어지는 낙동정맥을 떨구어 내는 산이기도 하다. 산경표에는 ‘수다산’으로 표기되어 있다.

 

 

◆[삼수령] 三水嶺, 피재 920m

강원도 태백시 적각동에 있는 한강·낙동강·오십천의 분수령. 백두대간 낙동정맥의 분기점이며 삼강(三江:한강·낙동강·오십천)의 발원지이다. 이곳에 떨어지는 빗물이 북쪽으로 흘러 한강을 따라 황해로, 동쪽으로 흘러 오십천을 따라 동해로, 남쪽으로 흘러 낙동강을 따라 남해로 흐르는 분수령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또 하나의 이름이 전해지는데, 삼척 지방 백성들이 난리를 피해 이상향으로 알려진 황지로 가기 위해 이곳을 넘었긱 때문에 ‘피해오는 고개’라는 뜻으로 ‘피재’라고도 한다.

 

 

 

삼수령에서 북류하는 골지천은 정선 아우라지를 거쳐 남한강으로 이루어 황해로 이르게 되고, 남류하는 황지천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천천동굴(하천수가 바위를 뚫어 생긴 동굴)인 구문소를 거쳐 낙동강을 이루어 남해에 이르며, 동류하는 오십천은 청정해역 동해에 이른다.

 

 

- 빗물의 운명

하늘이 열리고 우주가 재편된 아득한 옛날 옥황상제의 영으로 빗물 한가족이 대지로 내려와 아름답고 행복하게 살겠노라고 굳게 약속을 하고 하늘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이 빗물 한가족은 한반도의 등마루인 이곳 삼수령으로 내려오면서 아빠는 낙동강으로, 엄마는 한강으로, 아들은 오십천으로 헤어지는 운명이 되었다. 한반도 그 어느 곳에 내려도 행복했으리라. 이곳에서 헤어져 바다에 가서나 만날 수밖에 없는 빗물 가족의 기구한 운명을 이곳 삼수령만이 전해주고 있다.

 

또 하나의 이름이 전하는데, 삼척 지방 백성들이 난리를 피해 이상향(理想鄕)으로 알려진 황지로 가기 위해 이곳을 넘었기 때문에 '피해 오는 고개'라는 뜻으로 피재라고도 한다.

 

 

 

 

◆[노루메기]

피재의 북동 800m에 있는 낮은 고개로 임도가 지나간다. 이곳의 지형은 산맥이라기보다 구릉에 가깝다. 산행의 참고점 정도에 불과하다. 노루메가는 ‘노루목이’의 방언으로 변화된 구어다.

 

 

◆[새목이] 850m

이두문으로 ‘조항(鳥項)’으로 풀어 쓴다.

새목이는 넘나드는 고개가 아닌 능선의 V선을 이루는 곳으로 풍수지리에서 새의 목과 닮은 산세에서 유래하였다.

 

 

◆[건의령] 巾衣嶺 840m

상사미에서 삼척시 도계읍 방면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이다. 고려 마지막 왕인 공양왕이 삼척 육백산 기슭 마읍(馬泣)의 궁터에 유배와 있을 때 고려의 충신들이 그를 배알하고 돌아 오면서 이 고갯마루에 이르러 복건과 관복을 벗어 걸어 놓고 다시는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불사이군(不事二君)하겠다고 하였기에, 그들이 입던 복건과 관복을 벗어 건 고개라 하여 건의령(巾衣嶺)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건의령 아래에는 정승터라고 하여 고려 정승이 살던 터가 있고 건의령 동쪽 산언덕 육백산이 보이는 곳을 향해 아침 저녁으로 문안 인사를 하였다고 한다.

 

건의령은 5만분의 1지형도에는 ‘한의령(寒衣嶺)’으로 적혀 있지만, 오류로 보인다. 대동여지도에도 건의령으로 되어 있으며, 지역 주민들 역시 건의령으로 부르고 있다.

 

- 백인교군자당 百人敎君子堂

고갯마루에는 오래되어 퇴락한 당집이 남아 있는데, 백인교군자당이다. 구전에 고려말 재상이 이곳 건의령에서 백사람에게 글을 가르쳐, 마을 사람들이 그의 공덕을 기리고자 백인교군자당을 건립하였다 한다. 유배되었던 공양왕을 배알하고 돌아가던 충신들 중 한명이었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푯대봉] 1009.2m

정상은 대간에서 살짝 비껴 있다. 전망이 좋고 푯대봉 삼거리에서 불과 50m 거리이므로 다녀가는 것이 좋다. 이곳 대간 능선은 오히려 서쪽의 대간이 아닌 산군보다 해발 고도가 낮다. 동쪽의 은선과 계곡으로 어지럽게 흩어지는 임도가 마치 나무부리처럼 얽혀져 있다. 임도는 구릉지 언덕의 산채(나물)와 채소를 가꾸는 농경지로 연결된다.

 

측량 깃발이 세워졌던 곳이라 하여 푯대봉이란 이름이 붙었다.

 

 

◆[한내령]

아래쪽 삼척시 도계읍에 한내리라는 마을이 있다. 이 마을이름을 딴 듯하다.

 

 

◆[구부시령] 九夫侍嶺

태백 하사미의 외나무골에서 삼척 도계읍 한대리로 넘어가는 고개다. 구부시령은 이름과 달리 고개가 아닌 봉우리 형태의 구릉이다. 덕항산과 푯대봉을 연결한다. 옛날 고개 동쪽 한 대리 쪽에 팔자가 기구한 어떤 여인이 아홉 남편을 모시고 살았다는 전설에서 유래된 고개다. 대기리(동굴마을인 대이기 옆 마을)에 주막을 하던 여인이 있었는데, 서방마다 계속 요절하는 바람에 새서방을 아홉 명이나 모시고 살았다고 한다. 그 후 대기리의 뒷산인 이곳을 ‘인생의 고단한 삶’을 표현하여 구부시령으로 부른다고 한다.

 

 

◆[덕항산] 德項山 1070m

어느 산객이 "우리나라에서 그랜드캐년을 닮은 곳이 있다면 거기는 바로 덕항산 자암골"이라고 설파했던 기경(奇景)의 산이다. 북쪽에 두타산(頭陀山:1,353m), 남동쪽에 응봉산(鷹峰山:1,303m)이 있고 지극산과 능선을 나란히 하고 있다. 동쪽 비탈면은 경사가 가파르나 서쪽 비탈면은 경사가 완만하다. 경동지괴(傾動地塊)의 표본을 이루는 곳으로 동쪽은 깎아지른 석회암 사면, 서쪽은 1000미터 전후의 고위평탄면을 이룬다. 석회암 사면에는 환선굴, 바람굴, 관음굴 같은 동굴들과 촛대봉, 사다리바위, 나한봉, 수리봉, 금강봉, 미륵봉 같은 기암들이 즐비하다. 골짜기는 거의 언제나 안개에 차있고 그 사이로 언뜻언뜻 험산과 기암이 드러나는 환상적인 풍경이다.

원래 이름은 덕메기[산]이었다. 삼척쪽에서 부르던 것으로 "저 너머(태백 하사미)에 화전하기 좋은 더기(고원)가 있는 뫼"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것이 덕목이로 변해 '목 항'(메기=목덜미(項)자 덕항산으로 표기된 듯하다. 그 더기는 지금 광동댐 수몰민들의 고랭지채소밭이 되어 있다.

 

 

◆[지각산(환선봉)] 地角山 지장산 890m

일명 `찌걱산'이라 불리는 지각산은 삼척시 하장면에 있는 오지의 산이다. 부근에 광동댐이 들어서면서 일부 훼손된 부분이 있으나 광동호와 인접해 있는 이 산의 경관은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기에 충분하다. 특히 광동댐 관리사무소가 들어선 능선부근은 남녀가 마주치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꼭 일이 생긴다는 말이 전해질 만큼 계곡 경관이 수려하다.

지각산 동쪽 깎아지른 절벽에는 설패바위, 촛대바위,금강문 등 수많은 기암이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선경을 이루는 별유천지이다. 건너편 미륵봉 밑에는 천연기념물 178호로 지정된 환선동굴이 있으며 황금색 종유석, 석순 폭포 등 기묘한 현상으로 감탄을 금치 못한다.

 

- 환선굴 幻仙窟

강원 삼척시 신기면(新基面) 대이리(大耳里)에 있는 석회암 동굴. 주굴 길이 약 3.3 km. 총길이 약 6.5 km. 환선굴을 포함한 대이리 동굴지대는 천연기념물 제178호로 지정되어 있다. 동굴은 대체로 북향으로 전개되며 안쪽 80 m 지점에 둘레 20여 m의 거대한 석주가 서 있고, 그곳에서 북굴 ·북서굴 ·중앙굴 ·남굴의 4갈래로 갈린다. 남한에서 가장 규모가 클 뿐 아니라 동양 최대로 알려져 있으며, 복잡한 구조를 지닌 노년기 동굴로, 종유석의 발달이 퇴폐적이나 윤회재생(輪廻再生)의 과정에 있는 것도 볼 수 있고, 동굴류(洞窟流)의 발달이 탁월하며, 동굴동물도 많이 서식하고 있어 학술적인 면에서 매우 중요시되어 비공개 영구보존동굴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강원 삼척시 신기면 대이리 산 117. 천연기념물 제 178호(1996.6.15).

주굴 길이 약 3.3Km. 총길이 약 6.5Km. 환선굴을 포함한 대이리 동굴지대는 천연기념물 제 178호로 지정되어 있다. 동굴은 대체로 북향으로 전개되며 안쪽 80m 지점에 둘레 20여 m의 거대한 석주가 서 있고, 그곳에서 북굴, 북서굴, 중앙굴, 남굴의 4갈래로 갈린다.

남한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복잡한 구조를 지닌 노년기 동굴로, 종유석의 박달이 퇴폐적이나 윤회재생의 과정에 있는 것도 볼 수 있고, 동굴류의 발달이 탁월하며, 동굴동물도 많이 서식하고 있어 학술적인 면에서 매우 중요시되어 비공대 영구보존동굴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환선굴은 주통로가 약 3Km이고, 총연정이 8Km이상으로 규모가 크다. 동굴생성물이 큰 규모의 광장과 힘차게 흘러내리는 동굴수와 조화를 이루며 화려한 장관을 보여준다.

 

 

대이리 동굴지대는 환선굴, 관음굴, 양터목세굴, 덕밭세굴, 제암풍혈, 큰재세굴 등 6개의 동굴이 분포하며 천연기념물 제 178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가운데 1996년에 환선굴 내부개발을 추진하여 석회동굴인 환선굴을 일반인에게 공개하게 되었다.

환선굴은 동굴 내부뿐만 아니라, 덕항산, 촛대봉, 지극산, 몰미산 등으로 둘러싸여 수려한 산악경관을 이룰 뿐만 아니라 굴피집, 너와집, 동방아등 민속자료가 풍부하여 주변일대를 대이리군립공원으로 지정하여 각종 편의 시설을 개발하고 있다.

 

환선굴은 총연장 6.2Km로 추정되는 동양최대의 석회동굴로 해발 820m 지점의 산중턱에 위치하고 있으며 폭 14m, 높이 10m의 아치형 동구(洞口)를 통해 다량의 동굴수가 유출되고 있다. 환선굴 내부는 국내의 다른 석회동굴에서 볼 수 있는 화려한 종유석은 물론 여러 단계로 형성된 2차 생성물들이 집적되어 있어 동굴의 생성과 성장, 퇴화의 과정을 관찰할 수 있다. 특히 중앙광장의 옥좌대와 동굴입구의 만리장성 그리고 지옥굴내의 버섯형 종유폭포는 세계 어느 동굴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환선굴만의 자랑이다.

또한 환선굴내에는 10여 개의 크고 작은 동굴호수와 6개의 폭포가 분포하고 있어 통로를 따라 걷다 보면 마치 지하계곡을 탐방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특히하게도 환선굴은 바닥의 대부분이 종유석으로 이루어져 있고 직경 40m의 거대한 중앙 광장은 수만명의 인원을 일시에 수용할 수 있는 규모의 백사장이 펼쳐져 있다.

 

환선굴의 주 통로는 직경 15m 이상의 공간을 유지하고 있어 그 웅장함은 다른 동굴과 비교할 수 조차 없을 정도이며, 천정에느느 무수한 종유석군이 매달려 있고 용식구와 용식공이 대규모로 발달되어 있고 곳곳에 천정으로부터 떨어지는 낙수가 신비로움을 더해준다. 환선굴은 연중 11°C의 기온을 유지하고 있으며 천정과 벽면을 통해 스며드는 물방울의 양으로 사계절이 뚜렷하게 구분되며 천정과 벽면의 물방울은 쉽사리 떨어지지 않고 영롱한 빛을 발하여 금광을 방불케 한다.

 

 

 

-환선굴의 유래와 전설

먼 옛날 대이리 마을의 촛대바위 근처에 폭포와 소가 있어 아름다운 한 여인이 나타나 목욕을 하곤 했다. 어느 날, 마을 사람들이 쫓아가자 지금의 환선굴 부근에서 천둥번개와 함께 커다란 바위더미들이 쏟아져 나오고 여인은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 여인을 선녀가 환생한 것이라 하여 바위가 쏟아져 나온 곳을 환선굴이라 이름 짓고 제를 올려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게 되었다. 여인이 사라진 후 촛대바위 근처의 폭포는 물이 마르고 환선굴에서 물이 넘쳐나와 선녀폭포를 이루었다. 쏟아져 나온 바위는 지금의 환선굴 가는 길목에 남아 있고 바위더미 위에는 산신당이 지어져 있다.

또한 한 스님이 도를 닦기 위해 환선굴로 들어갔으나 되돌아 나오는 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며 사람들은 이 스님 또한 환선이라 하였다. 스님이 짚고 왔던 지팡이를 산신당 앞에 꽂아 두었는데 지금의 엄나무가 바로 그것이라고 전하며 환선굴 내에는 스님이 기거하던 온돌터와 아궁이가 고스란이 남아있다.

 

 

 

◆[자암재(장암재)]

환선굴의 뒤편에 위치한 고갯길이며 동굴마을인 대이리와 귀네미마을을 연결한다. 최근 들어 대이리 환선굴 관광과 귀네미마을의 고원풍경, 간단한 등산을 장점으로 살린 체마여행이 인기를 끌고 있다. 자암재는 고갯마루에 있는 바위들이 자색을 띠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부근의 바위에는 철분이 많이 함유되어 있는데 자주색은 바위 속의 철분이 녹슬면서 나타나는 색이다.

 

 

[귀내미골]

현재 광동댐 이주민의 거주지를 이름이다. 정감록에 이르기를 귀내미골이 이상향(무릉도원)으로 가는 길목이라 했다. 귀내미골은 우귀(소귀)의 이두표기인 牛耳嶺(토정 이지함은 牛耳間으로 보았음)으로 되었다가, "귀넘이" →"귀내미"로 변음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큰재]

1062봉에서 lKm쯤 떨어진 곳에 귀네미마을에서 개간지로 넘어오는 임도와 대간로가 교차하는 지점이다. 이곳에는 오랫동안 이용하지 않아 희미해지긴 했지만 고무릉리 감나무골과 통하는 오솔길도 있다.

 

 

◆[황장산] 黃腸山

임금님의 관을 만드는 데 쓰는 품질 좋은 황장으로 된 목재용 소나무<황장목(黃腸木)>을 생산한 산이라 하여 황장산이 부른다. 백복령 아래 정선군 임계면 군대리 마을에서부터 원방재를 돌아 이기령까지 고도 1000m 능선을 따라 임도가 설치된 것은 순전히 이 황장목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댓재] 810m

산경표에는 죽현, 대동여지도에는 죽령으로 표기 되었다. 대나무나 많다고 하여 죽현. 또는 죽치령으로 부르는 이 고개는 영동(강릉지방)과 영서(원주지방)를 연결하는 고개로 2차선 포장도로가 1984년도에 개통되어 많은 차량이 왕래하고 있다.

 

 

 

◆[햇대등]

산신각에 빗대어 나름대로 풀어 보는 내용은 이렇다.

산신각에서 산신제를 지낼 때 山神이 강신하기 가장 좋은 곳에 횟대를 세우고 山神을 맞이하는 의식을 치?는데 여기서 말하는 횟대란 대나무(生竹)를 말하며, 두 개의 대나무를 잘라서 통째로 세우고 꼭대기에 오색천을 걸었다.

횟대는 경상도와 이북 그리고 강원도에서는 "햇대"로 변음되는 사투리로 "햇댓"은 "댓재"와 합하여 "햇댓"이라 한 것으로 보이며. 등(登)은 산줄기에서 전망하기 좋게 뛰어 나온(岬이나 臺)부분을 말하는 것이므로 세 곳의 뜻을 합성하여 "햇댓등"이라 지명한 것으로 판단된다.

 

 

◆[명주목이]

정선군 임계면 가목리에 속하는 여러 마을 중 하나이다.

명주목이(고개)의 원래 이름은 "데바지령"이며, 그 뜻은 삼척지방을 넘나들던 고개로 협소한 계곡의 지류를 따라 오르기가 힘들었다는데서 유래하였다.

 

 

◆[통골재] 980m

목통령이라고도 부른다. 두타산 남쪽 허리가 잘록한 노루목이다. 특별한 이정표는 없지만 거무소계곡으로 내려서는 갈림길이 있다. 허나 삼척시 미로면으로 내려서는 길은 없다. 따라서 넘나드는 고개는 아니고 단순한 허리부분이다. 목통령은 원래 순수한 우리말로 동물의 ‘목’에 해당하는 ‘목통’이다. 한자어로 표기하는 ‘木桶嶺’은 적당히 음차한 것이다.

 

 

◆[두타산] 頭陀山1352.7m

두타산은 높이에 비해 힘이 많이 드는 산이다. 다른 내륙지역(영서지방)산에 비해 해발고도가 낮은 평지인 동해안쪽에서 올라가기 때문이다. 동해시와 삼척시 경계에 위치하며 동해시 삼화동에서 서남쪽으로 약 10.2km 떨어져 있다. 태백준령의 주봉을 이루고 있으며, 북쪽으로 무릉계곡, 동쪽으로 고천계곡, 남쪽으로는 태백산군, 서쪽으로는 중봉산 12당골이 있다. 4km 떨어져 있는 청옥산(靑玉山:1,404m)을 포함하여 두타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두타(頭陀)는 불교용어로서 속세의 번뇌를 버리고 불도(佛道) 수행을 닦는다는 뜻이다. 그 형상 또한 부처가 누워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삼척시의 영적인 모산으로서 신앙의 대상이며 예술의 연원이라 하여 오십정산제당(五十井山祭堂)이 있고, 예로부터 가뭄이 심하면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두타산과 서쪽의 청옥산을 잇는 의가등(衣架嶝)은 병풍을 펼쳐놓은 것 같은 가경을 이룬다. 또한 북쪽으로 삼화사(三和寺)에 이르는 14km의 계곡에는 국민관광지인 무릉계곡, 조선시대 석축산성인 두타산성, 둥글게 패인 바위 위에 크고 작은 50개의 구멍이 있는 오십정(또는 쉰우물)을 비롯하여, 오십천(五十川)·학소대·옥류동·광음사·광음폭포·선녀탕·쌍폭포·천은사(天恩寺)·금란정·용추(龍湫)폭포 등의 명승 고적지가 있다. 수백 명이 앉을 만한 넓이의 무릉반석에는 조선 전기(前期) 4대 명필가의 하나인 봉래 양사언의 석각(石刻)과 매월당 김시습을 비롯하여 수많은 명사들의 시가 새겨져 있다. 한마디로 ‘금강산에 버금가는 관동의 군계일학(群鷄一鶴)’이란 옛 선인들의 칭송이 결코 과하지 않다는 것을 쉽게 깨닫게 하는 곳이다.

또한 두타산과 청옥산은 궁예시대부터 새 세상을 그리워하던 이들이 몸을 숨긴 채 때를 기다렸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6.25 때는 인민군 병참기지가 들어서는 바람에 미공군의 융단폭격을 받기도 했다.

 

- 무릉계

계곡 이름을 무릉계(武陵溪)라고 했다. 얼마나 대단한 경치면 감히 “무릉도원은 바로 여기”라고 내세웠다. 두타산과 청옥산, 고적대, 갈미봉, 1243봉으로 둘러싸인 반석계곡이다.

형 지형인 무릉계 물받이의 남쪽 울타리를 이루는 청옥·두타산은 언제나 쌍둥이처럼 붙어다닌다. 뗄 수 없이 돈독하고 가까운 동시에 무릉계라는 보물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생김새는 사뭇 달라 청옥은 듬직한 육산(肉山)인 반면 두타는 울끈불끈 골산(骨山)으로 되어 있다. 문자속이 있는 이는 쌍둥이 이름이 맞바뀌었나 의심할 것이다. 푸른 옥 청옥은 바위산에 붙여야 맞으며 집착을 버리고 수행의 길로 들어선다는 두타는 저 요란한 무릉계곡을 지긋이 굽어 보고 있는 후덕한 봉우리에 어울리는데…. 산경표와 대동여지도에는 분명 북쪽 것이 두타라고 나와 있다. 청옥은 두타고 두타는 청옥인 것이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여지도서는 두타산만 있고 청옥산은 없다. 동국문헌은 북으로 두타산이요 10리거리에 청옥이 있다 하였다. 문헌으로 보면 두타산과 청옥산이 바뀐 것이라는 설도 있다.

 

1977년 국민관광지 제77호로 지정, 강원 동해시 삼화동에 소재한 약2-3km의 무릉계곡. 두 산을 상징하는 골짜기인 무릉계곡은 고려 충렬왕 때 이 산에 들어 은둔생활을 했던 이승휴(삼척부사 김휴원이 지었다는 설도 있음)가 중국의 무릉도원 같은 선경이라 하여 그렇게 이름 짓고 극찬했다는 골짜기다. 소금강이라고도 한다. 이승휴는 과거에 급제하였건만 두타산이 너무 좋아 벼슬을 버리고 초야에 묻혀 학문에 정진하였고 후에 조정에 복귀 사림승지까지 지낸 후 다시금 이곳에서 은거하며<제왕운기><동안거사집>을 저술하였다. 청옥두타산 고적대 갈미봉이 에워싼 계곡에는 태암·미륵암·반학대·능암·쌍현암 용추폭포, 기암괴석과 시인·묵객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무릉반석(武陵盤石) 및 금란정(金蘭亭)이 있다. 무릉계는 1000평이 넘는 대반석이다. 반석 주위 군데군데 노송이 서 있는 사이로 무릉계 반석을 내려다 보는 금란정이 왼쪽에 보인다. 금란정으로 오기전 길가에 봉래 양사언이 썼다는 "중대천석 두타동천(中臺泉石 頭陀洞天)"이라고 쓴 일중 김충현이 고증하여 새로이 양각한 글씨가 반석을 떠서 맞추어 만든 돌에 새겨져 있다. 원래의 글씨는 무릉계반석 왼쪽 아래쪽에 남아 있으나 세월의 풍상과 계류에 휩쓸려 내려온 돌과 모래의 힘으로 거의 마멸되어 흔적만 남아 있다시피한 것을 재현하여 옛사람이 감동한 두타산 무릉계의 빼어남을 기린 문장을 전승하려한 것이다. 또한 금란정은, 한일합방 당시 지역의 유림들이 조직한 금란계라는 모임을 기리기 위한 정자라고 한다. 1903년 유림재현들이 향교 명륜당에 모여 학문에 전념하던 중 1910년 국치를 겪고 향교의 문이 닫히자 이에 분개해 금란계라는 모임을 만들어 울분을 달래던 중 그 뜻을 기리기 위해 정자를 세우려고 했으나 일본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1945년 자손들에 의해 북평동 단봉 석경지에 세워졌다가 1958년 무릉계로 옮긴 것이다.

 

- 두타 이름 관련하여..

두타산 ·청옥산은 경북 문경의 조령산 구간과 더불어 백두대간 산꾼들 사이에 감춰진 진주로 회자되는 산이다. 댓재 ~ 두타산 ~ 청옥산 ~ 이기령 ~ 상월산 ~ 백복령를 따라가는 백두대간 마루금은 부드럽고 편안한 구간과 빚은 듯이 아담한 암릉이 교차하며 보기 드문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여기에다 대간 마루금 동쪽으로 쉰움산, 무릉계곡, 학등 따위의 능선이며 계곡이 뻗어내려간 모습과 서쪽으로 정선과 삼척일대의 크고 작은 첩첩산이 끝없이 출렁거리는 모습도 환상적이다. 짐작하다시피 ‘두타(頭陀)’는 불교용어로 ‘벗다, 씻다, 닦다’는 뜻을 지닌 산스크리트어를 음차한 것. 부다는 출가수행자가 세속의 욕망을 떨치고 정각을 이루기 위한 수행법으로 두타행(頭陀行)을 강조했는데, 수행자가 따라야할 의식주의 방식을 규정해 놓은 것으로, 보통 열두가지 수행 방법의 십이두타행(十二頭陀行)이라 불린다. 즉, 두타행이란 욕망을 벗고 깨달음으로 나아가기 위한 수행방법이다. 세속을 등지고 깊은 산속 등에서 산다(在阿蘭苦處·재아난고처), 늘 걸식을 한다(常行乞食·상행걸식), 하루 한 끼만 먹는다(受一食法·수일식법), 절식을 한다(節量食·절양식), 헌옷을 기워 입는다(着弊衲衣·착폐납의), 무상관을 닦기 위해 무덤 곁에서 산다(塚間住·총간주), 드러눕지 않는다(但坐不臥·단좌불와) 등의 방법으로 스스로를 연단하는, 불교의 수행법을 이른다. 청옥은 금, 은, 수정, 마노, 호박 등과 함께 아미타경에 나오는 극락의 7가지 보석 중 하나. 따라서 두타·청옥산을 걷는 길은 세상의 탐욕과 어리석음을 멀리한 정진의 길, 수행의 길…, 하지만 이 길은 또한 역사의 피비린내를 맡아야 하는 아픔의 길이기도 했다.

 

- 두타산성

두타산 정상 동쪽의 두타산성은 신라 파사왕 23년(102)에 처음 축조된 것으로 알려진 두타산성의 흔적이 남아 있다. 임진왜란 때, 의병과 피란민들이 웅거하며 이 지방으로 쳐들어온 5000명의 왜군을 물리친 곳. 이 전투에서 이곳을 침공한 왜군의 9할이 죽었다지만 우리 민초의 피해도 5000여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피난간 1만명에 가까운 인원이 피를 흘리면서 두타산성 아래 무릉계곡은 피로 물들고, 산아래 마을인 삼화동의 소까지 붉게 변했다고 한다. 두타산과 쉬움산 사이의 계곡이 피내골, 산성 맞은편 골짜기가 피마른골, 삼화동의 소가 피소로 불리게 된 연유다.

두타·청옥의 비극은 6·25전쟁 때도 재현됐다. 이곳 능선과 골짜기 일대에서 격전이 벌어졌고 수많은 군인과 민간인들이 죽어나간 것이다. 군사정권의 폭압통치가 엄혹하던 1981년 시인 김지하는 이 아름다운 무릉계에 들러 귀신의 울음소리를 듣고, 도망치듯 골짜기를 떠났다던가. 사람들이 별 생각없이 아름다움에 취했던 무릉계의 드넓은 너럭바위에서 시인은 귀곡성을 들으며 두타·청옥산에 서린 한많은 역사를 이렇게 적었다.

 

“두타산은 일곱개의 피복창이 있었다고 하더라/오십개의 우물터가 있었다고 하더라/오천명이 한날 한시에 총 맞아 죽었다고 하더라/피쏘 한복판에 물못 들어가는 큰 구멍 하나 있다 하더라/ 그 구멍 속에 한 여자가 발 거꾸로 해 지금도 떠 있다 하더라….”

 

- 쉰움산

군립공원으로 지정된 쉰움산은 정상부 아름에 우물 같은 웅덩이가 50개 가량 파여 있다 하여 지어진 지명이다. 국토지리정보원 발행 지형도에는 쉰움산이 683m봉으로 나와 있으나, 실제 웅덩이가 파여 있는 봉은 683m봉 남서쪽의 670m봉이며, 670m봉 정상 암릉에는 '五十井(쉰우물) 해발 670m'란 정상석이 서 있다.

 

쉰움산은 산세가 빼어나고 조망이 뛰어나면서도 무속인들의 기도터로도 이름나 있다. 곳곳에 움푹움푹 파여 기묘하게 느껴지는 정상 암릉에 올라서면 모산인 두타산과 그 산에서 뻗어내린 기운찬 능선과 웅장하고도 신비로운 골짜기들이 좌우로 펼쳐지고, 등뒤로 동해 바다도 시원스럽게 바라보이는 등 조망과 산세가 빼어나다. 정상 일원을 비롯해 남동릉 암릉 상의 돌탑과 제단들은 무속인들이 기도하느라 남긴 흔적들이다.

천은사는 고려 충렬왕 때 이승휴가 충렬왕 6년(1280) 스스로 동안거사, 혹은 두타산거사라 부르고 은거하며 <제왕운기>와 <내전록>을 저술한 곳이다. <제왕운기>는 중국과 한국의 역사를 엮은 서사시로, 당시 원나라의 정치, 문화적 지배체제를 극복하고자 중국과 한국의 지리, 문화적 차이를 강조함으로써 중국과 다른 민족문화적 주체성을 표명했다.

 

 

◆[박달령]

청옥산과 두타산의 중간에 위치하며, 무릉계곡의 박달폭포로 내려서는 분기점이다. 삼거리에는 너른 쉼터가 있고 이정표도 설치되어 있다. 박달골과 박달폭포의 뒤편 고개를 뜻한다. 박달고댕이라고도 부르는데 ‘고댕이’는 ‘고개’의 강원도 방언이다.

 

 

◆[문바위재]

문을 닮은 바위에서 비롯된 이름이라고 한다.

 

 

◆[청옥산] 靑玉山1403.7m

강원 동해시 삼화동(三和洞)과 삼척시 하장면(下長面)의 경계에 있는 산. 태백산령에서 갈라져 나온 해안산맥에 솟아 있으며, 북서쪽의 고적대와 남동쪽의 두타산 사이에 있다. 동사면을 흐르는 계곡은 국민관광지로 지정된 무릉계곡을 거쳐 전천(箭川)으로 흘러들고, 서사면을 흐르는 계류는 골지천(骨只川)으로 유입한다. 전사면이 급경사를 이루나 서쪽 사면은 경사가 비교적 완만한 편이다. 북쪽 기슭에 있는 연칠성령을 통하여 삼화동과 하장면을 잇는 도로가 지난다. 푸른 옥돌(청옥석)이 나왔다 하여 청옥산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연칠성령] 連七星嶺 1184m

백봉령과 댓재 한 중간에 위치한다. 청옥산, 두타산 등반 후 하산을 시작하는 기점으로 가장 많이 이용한다.

연칠성령은 ‘빼어난 여러 봉우리(七星)을 연결하는(連) 고개(嶺)’다. ‘난출령’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험하고 멀어서 빠져나가기 어렵다’는 뜻이다. (신동길저/뫼따라 하늘까지 中)

 

무릉골을 거슬러 문간재가 있고 이곳에서 일곱 험준한 산등성이를 넘는다. 하늘만 보이는 깊은 령이 난출령이라 하였다. 조선 인조(1623년) 이식이 중봉산 단교암에 은퇴하고 있을 때 이곳에 올라 한양을 바라보고 마음을 달랬다 하여 망경대라 불리기도 했다. 작은 돌탑이 있다.

 

◆[망군대]

연칠성령의 서쪽 봉우리다. 고적대와 함께 전망 좋은 곳이다. 이곳은 특히 내륙으로의 조망이 훨씬 좋다. 삼척시 하장면을 뒤덮고 있는 산군(山君)‘은 물론 멀리 정선군과 태백시의 높은 봉우리들도 보인다.

조선 광해군 때 재상을 지낸 택당 이식(李植)이 정계에서 은퇴해 중봉산 단교암에 머물면서 이 봉우리에 올라 한양을 바라보며 나랏일을 걱정했다고 한다. 그 후부터 ‘도성의 임금을 바라보다(望君)’ 또는 ‘한양을 바라보다(望京)’이라는 의미를 부여했다고 한다.

 

 

◆[고적대] 高積臺 1353m

삼화동 무릉계곡에서 가장 멀리 위치한 봉우리다. 정상에는 표지석과 함께 산림청 안내판이 서 있다. 이곳에서 정선군 임계면과 삼척시 하장면을 경계하는 중봉산 능선이 갈려져 나간다. 정상에서 내륙으로 나 있는 등산로는 중봉산으로 향하는 길이다. 산악에서 ‘대(臺)’라는 지명은 대체로 주변보다 높고 전망이 좋은 곳이다. 이곳 고적대는 특히 ‘높게(高) 쌓여 있다(積)’고 하니 여러 ‘대’ 중에서도 단연 으뜸이다. 무릉계곡을 정면으로 관찰할 수 있는 위치에 높이 솟아 있다. 고적대 정상에서 무릉계곡으로 내려서는 길은 없다.

 

두타산을 마주 보며 지맥이 10리를 흘러 좌우 깎아지른 절벽으로 동해, 삼척, 정선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동쪽으로 뻗은 청옥산, 두타산과 함께 해동삼봉이라 불리는 곳으로 신라의 고승 의상대사가 수행을 했다고 한다.

 

 

◆[갈미령] 갈미봉 曷味峰 1271m

무릉계곡의 북서쪽에 위치헤 있으면서 이 부근에서는 가장 높다. 백봉령 이후 청옥 두타의 화강암디재가 이곳에서 시작된다. 남쪽의 시각에서는 이곳이 끄트머리다. 무릉계곡 쪽 사면은 벼랑에 가까운 낭떠러지다. 정상은 고적대, 망군대와 함께 믈,drP가 잘 내려다보이는 전망대다. 연이은 능선을 따라 고적대를 비롯해 망군대, 청옥산, 두타산, 쉬움산 등이 부채꼴 형태로 조망된다. 이곳에서 발원하는 냇물은 내도전을 지나면서 유명헌 ‘도전계곡’을 만들어낸다. ‘노적가리’나 ‘볏가리’는 꼭지가 우뚝한 형태를 표현하는 우리말이다. ‘갈’은 ‘가리’의 준말이다. ‘미(尾)’는 ‘꼬리’ 혹은 ‘끝’이라는 뜻의 명사형 어미다. 갈미봉은 ‘꼭지가 우뚝한 봉우리’인 셈이다. 무릉계곡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연봉의 끝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강원 정선군 북평면(北坪面)에 있는 산. 황병산(黃柄山)·주봉(周峰)·발왕산(發旺山) 등과 함께 태백산령의 등줄기를 이루며, 한강의 지류(支流)인 송천(松川)이 이곳에서 발원한다. 가까이에 정선아리랑(강원유형문화재 1)의 발상지인 아우라지가 있다.

 

 

 

◆[이기령] 810m

고개치고는 꽤 높다. 동서를 넘나들 때 애용하던 길은 아닌듯 하다. 양족 어디에서든 접근과 연결이 불편하다. 서쪽 고개 밑에 군대마을에서 올라오는 임도가 다라와 있다. 이 길은 삼림을 채벌하여 목재를 나르고 그 개간지에 고랭지채소나 임산물을 가꾸기 위해 닦았다는데 별로 이용하는 것 같지는 않다. 동쪽의 소로를 따라가면 쌍용시멘트 채석장이 있는 이기동에 닿는다. 이기령은 동쪽 아래의 동해시 이기동 뒷고개라서 붙여졌다. 이기(耳基)는 ‘귀가 비롯되었다’는 뜻인데, 옛 사람들의 눈에는 이곳 형세가 ‘귀’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동해 관로동과 정선 부수베리를 잇는다

 

 

◆[상월산]

상월산 북쪽 사면은 설악산의 공룡능선만큼이나 경사가 급하여 마치 병풍을 둘러놓은 것 같다. 정상은 헬기장으로도 쓰인다. 정상에 서면 남북으로 용처럼 꿈틀거리는 대간 줄기의 군봉들이 행진을 하듯 나열하고, 집 한 채 보이지 않는 내륙의 하늘 아래에는 산봉우리들이 다도해의 섬 모양으로 떠 있는 광경이 시원스럽게 펼쳐진다. 검푸른 동해바다도 한 눈에 들어온다. 상월산은 ‘높은(上) 산’이라는 뜻으로 실제의 달(月)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월(月)은 우리말의 ‘달’인데 옛적에 이 말은 ‘달(達)’로 표기하면서 의미는 ‘산’이었다. 따라서 ‘월산(月山)’은 ‘산’의 겹쳐진 표현이며, 상월산은 ‘상산(上山)’, 즉 주변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이거나 ‘가장 빼어난 봉우리’인 것이다.

 

 

◆[원방재]

상월산 서쪽 급경사지역 아래에 있는 노루목이다. 내륙 쪽으로 오솔길 따라 50m쯤 내려가면 물을 만나고 물길 자로 아래에 군대마을과 연결되는 임도가 들어와 있다. 원방재에서 상월산을 바라보면 마치 성벽처럼 앞을 가로막는다. 동쪽의 협곡이 신흥동 서학골이다. 내륙 쪽 샘터에 아래에 있는 임도를 따라 내려가면 부수베리 삼거리를 거쳐 군대마을이나 도전마을에 닿게 된다. 부수베리에서 군대마을로 연결되는 도로는 시멘트로 포장되어 있다. 유명한 도전리는 냇가를 따라가는 비포장도로의 끝에 있다. ‘먼 곳(遠方, 遠邦)에 있는 고개’이니 그만큼 외진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