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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명산

중국 남경/황산 여행(1)_20160604~06

by 산엔달 2016. 6. 10.

한비회 2분기 모임을 중국 남경과 황산으로 가기로 했다.

1Q 모임시 중국에 있는 근수 친구가 함께 했는데, 그 때 정한 여행이다.

여행은 계획할 때 설렘이 더 큰 즐거움과 행복을 주는 것 같다. 3개월 동안...


남경은 10여년 전에 다녀온 곳이지만, 황산은 꼭 가 보고싶었던 명산이라 더욱 기대와 설렘이 컸다.

2박 3일의 짧은 일정에 많은 곳을 둘러보지 못했지만, 초딩동창들과의 여행은 또 다른 재미가 있었다.


첫 날은

12:30 인천공항 출발하여 13:30쯤(현지시간) 난징공항에 도착하여 곧바로 중화민국(대만)에서

남경을 수도로 삼은 국민정부 때의 '총통부'를 둘러보고,

저녁을 먹고 야경이 멋진 공자의 사당인 '부자묘'를 구경하였다.


둘째 날은

남경에서 버스로 약4시간을 달려 항주에 있는 중국의 5대 명산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고 멋진

'황산'을 산행하고, 다시 남경으로 돌아와서 근수 친구랑 저녁을 먹고,


마지막 날은

오전에 손문의 묘인 '중산릉'을 둘러보고, 오후 2시45분發 항공편으로 돌아오는 일정이다.


[6월 4일(토)]

천안아산역에서 7:50 KTX를 타고 서울역에서 다시 인천공항으로 직통하는 AREX 열차를 갈아타고

09:50분쯤 인천공항에 도착한다. 잠시 기다려 친구들을 만나 출국수속을 하고 12:30발 아시아나 항공으로

남경으로 향한다. 남경에 도착하니 입국 수속을 마치고 나가니 근수 회사 직원이 마중을 나왔다.

곧바로 총통부 관광을 위해 이동하여 약2시간 동안 총통부를 둘러본다.

 

 ▲ 부자묘(푸쯔먀오)의 핵심 명소 대성전을 배경으로... 중국 고대 저명한 사상가이자 교육가인 공자()를 모시는 묘당으로, 전면에 절이 있고 뒤편에 쉐궁[]이 위치한다. 내부에는 높이 6.5m로 전국에서 최대 규모인 공자 초상화가 걸려 있다. 양쪽에는 한백옥()으로 제작된 쓰야성옌후이[], 증삼(), 공급(, 공자의 손자), 맹가(, 맹자()의 본명)의 조상()이 있다. 주변의 벽 위에는 공자 생전의 자취를 확인할 수 있는 38폭의 벽화가 걸려 있다.[네이버 지식백과]

  ▲ 출국을 위해 게이트에서 대기하고 있다.

  ▲ 설렘 가득한 밝은 표정의 친구들

  ▲ 딸이 부탁한 화장품

  ▲ 12:30 출발

  ▲ 2시간 걸려 남경공항에 도착, 마중 나온 근수친구 회사 직원의 안내로 총통부에 도착하여 직원이 표를 사는 동안 기다리고 있다. 스타벅스 커피도 한잔씩... 감동이다.

  ▲ 총통부 정문을 배경으로~ 난징 총통부(남경 총통부; 南京總統府)는 중화민국(대만)에서 난징을 수도로 삼은 국민정부 때의 총통부이다. 국민정부는 이 건물을 1927년~1937년, 1945년~1949년 동안 사용하였다. 중공군1949년 4월 23일 난징에 입성하고 하루 후인 4월 24일 총통부가 중공군에 함락되자, 중화민국 정부를 타이완 섬타이베이로 옮겼다. 1998년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에 의해 이 건물에 난징 중국 근대사 유적 박물관이 개관되었다. 2005년 4월 27일 중국 국민당 주석 렌잔이 이 건물을 방문한 바가 있다.

 

 

 ▲ 천하위공~ 쑨원의 친필로 예기에 나오는 사상으로 '하늘 아래 모든 것은 누구나 할 것 없이 공평하다'는 뜻이다.

1911년 신해혁명을 통해 청나라를 멸망시키고 이듬해에 중화민국을 건립한 쑨원은 '천하위공'을 자신의 신념으로 삼았다.

 

 

 

 

 

 

 

 

 

 

▲ 총통부 가운데 있는 작은 연못이 있는 정원~ 넘 아름답다.

 

 

 

 

 

 ▲ 손문의 동상~ 자는 일선()이고, 호는 중산()이다. 공화제 창시자로 국민정부시대에는 '국부()'로서 최고의 존경을 받았다. 광둥성[] 샹산[:현재의 ]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서당에 다니다가 14세 때 하와이에서 일하고 있는 형 쑨메이[]에게로 가서 호놀룰루의 신교계() 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18세 때 귀국하여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전통과 신문화의 갈등으로 고향에서 쫓겨났다. 홍콩으로 이주하여 세례를 받고 광저우[]와 홍콩[]의 서의서원(西:의학교)을 졸업(1892)한 뒤 마카오·광저우 등에서 개업하였다.

광저우 의학교에서 삼합회()의 수령인 정스량[]과 알게 되었으며, 홍콩의 의학교 재학 때부터 혁명에 뜻을 두어 반청운동()에 가담했다. 중국을 서양과 같은 나라로 개혁하려 한 그는, 포르투갈 영지()인 마카오에서 쫓겨난 뒤부터 본격적인 혁명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1894년 청일전쟁 때 미국 하와이에서 흥중회()를 조직한 뒤 화교()들을 모아, 이듬해 10월 광저우에서 거병하였으나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 변발을 자르고 양복차림을 하기 시작하였다. 1896년 하와이를 거쳐 런던으로 갔으나 그곳에서 청국공사관에게 체포되고, 홍콩의 의학교 때 스승 J.캔틀리 등에 의해 구출되어 영문으로 《런던 피난기》를 발표하여 그의 이름과 중국 사정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영국에 머무르는 동안 견문을 넓힌 그는 삼민주의()를 구상하였다.

1897년 미국을 거쳐 일본으로 건너가, 미야사키 도텐[] 등 일본의 지사들과 사귀는 한편, 캉유웨이[] 등과의 제휴로 필리핀 독립원조를 꾀하였고, 1900년 제2차 거병(후이저우[]사건)을 시도하였지만 실패로 끝났다. 그 뒤 1905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 도쿄[]에서의 유학생 등 혁명세력을 통합하여 중국혁명동맹회를 결성하고, 반청()무장봉기를 되풀이하였다.

1911년 10월 미국에서 군자금을 모금하던 중 신해혁명()의 발발 사실을 알고, 열강의 원조를 기대하며 유럽을 거쳐 귀국하였다. 귀국 후 임시 대총통()에 추대된 그는 1912년 1월 1일 중화민국을 발족시켰으나, 청나라가 아직도 건재했기 때문에 이를 타도하기 위해 베이징을 정복할 북벌군을 조직해야만 했다. 얼마 후 북부의 군벌들과 타협하여 정권을 위안스카이[]에게 넘겨 주었다. 당시 타협은 청나라를 멸망시키고 공화제를 도입하기로 합의하였지만 위안스카이는 이를 어기고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 쑨원은 중국혁명동맹회를 개조하여 국민당을 설립하였고 위안스카이에 대항하였지만 무력에 밀려 폐퇴하게 되었다.

그 후에도 사회개혁을 추진하였으나 쑹자오런[]이 암살당한 것을 계기로 일어난 제2혁명이 실패하자, 또다시 일본으로 망명, 중화혁명당을 창설하고 군벌들이 얽혀 싸우는 틈에 호법운동()을 벌여, 광둥을 중심으로 정권수립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수많은 좌절을 겪으면서 군벌 뒤에 제국주의가 있다는 것과, 인민들과 단결하여 반제() ·반군벌 싸움을 벌여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1919년 5.4운동이 일어나자 중화혁명당의 대중성을 도입할 필요성을 느끼고 중국국민당으로 개조한 뒤, 공산당과 제휴(국공합작), 노동자 ·농민과의 결속을 꾀하였다. 그리고 국민혁명을 추진하기 위하여 장병을 양성하고 북벌을 준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혁명은 아직 이룩되지 않았다”는 유언을 남기고 1925년 3월 12일 베이징[]에서 간암으로 사망하였다. 1929년 그의 유해는 난징[] 교외의 중산릉[]에 묻혔다.

쑨원의 정치사상은 삼민주의로 대표되는데, 그것은 태평천국()의 혁명적 전통을 이어받고, 19세기의 자연과학(진화론)·프랑스의 혁명사상(인민주권설)과 영국의 사회학설(H.조지의 등)을 받아들여 중국 현실에 적응시킨 것이었다. 만년에는 연소()·용공()·농공부조()의 3대 정책으로 발전하였다.

그는 자본주의의 폐해를 미연에 막으려는 ‘자본절제’와 토지개혁을 내용으로 하는 ‘경자유전()’의 견해를 표명하여, 제국주의 단계의 후진국 혁명이론으로써 특권과 독점을 반대하는 삼민주의로 크게 발전시켰다. 1968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임시정부를 지원한 공으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쑨원 [孫文] (두산백과)

 ▲ 태평호

 

 

 

 ▲ 물레나물

 

 

 

 

 

 

 

 

 

 

 

 

 

 

 

 

 

 

 

 

 

 

 

 

 

 

 

 

 

 

 

 

 ▲ 저녁 식사를 한 곳, 대만 음식점이다.

 

 

 

 

 

 

 

 

 

 

 

 

 

 

 

 

 

 

 

 

 

 

 

 

 ▲ 저녁 식사 후 공자의 사당인 부자묘로 이동하여 사당과 야경을 구경한다.

 ▲ 부자묘~ 푸쯔먀오()는 난징에서 가장 큰 공자 사당으로, 공자를 존경하는 의미의 ‘공부자()’에서 이름이 유래됐다. 중국 전역의 공자묘 중에서는 규모가 작은 편에 속하지만 강남을 대표하는 건축물이자 난징을 대표하는 관광지로 손꼽힌다. 난징의 푸쯔먀오는 1034년에 처음 세워졌지만 전쟁과 화재로 몇 차례 소실되어 두 차례 중건되었다. 특히 1984년에는 고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역사 전문가들이 재건 작업에 참여했다. 이후 현재까지 약 8,000만 명의 관광객이 이곳을 방문했으며, 1991년 중국 40대 여행 성지 중 하나로 지정된 바 있다.
푸쯔먀오 주변 지역은 모든 건물이 전통 가옥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어 난징에서 가장 운치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앞을 흐르는 진회하()와 야시장이 그 운치를 더한다. 매년 음력 5월 초에는 보름에 걸쳐 ‘금릉등회’라는 행사가 열려 거리가 등불로 장식되고, 시민들은 금릉서화와 무술기공, 민간공예, 전통 풍속놀이 등 다채로운 행사에 참여한다. 푸쯔먀오 주변은 볼거리와 먹을거리가 풍부해 언제든 도시의 활기를 느낄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푸쯔먀오 [Nanjing Confucius Temple, 夫子庙] (저스트고(Just go) 관광지, 시공사)


 

 

 

 

 

 

 

 

 

 

 

 

 

 ▲ 만세사표~ 학식과 덕망이 높아 만세에 모범이 될 만한 인물이란 뜻

 

 

 

 ▲ 종이 있는데 이를 치는데도 돈을 내야 한다.


 

 

 

 

 

 

 ▲ 촛불을 물 위에 띄워 놓고 소원을 빔

 

 

 

 ▲ 이곳도 개인의 소망을 적어 붙혀놓은 표말

 

 

 

 

 

 ▲ 부자묘 앞 호숫가에서 공연을 하고 있다. 배를 탈려고 했으나 사람이 넘 많아 그냥 구경만...

 

 

 

 

 

 

 

 

 

 

 

 ▲ 상점가

 

 

▲ 호텔에서 맥주 한 잔 하면서 내일 황산 산행을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