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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종주/백두대간(남)[完]

백두대간 17차 제18구간 하늘재~이화령(천대498~502)_20150314

by 산엔달 2015. 3. 15.

드디어 이번 산행에서 천대 500고지를 밟는다.

내일 동아마라톤 대회가 있어 대간산행을 포기할까 하다, 거리가 17km 정도라 후미에서 살살하면 괜찮을 것 같아 그냥 진행하기로...

나중에 숙제 부담도 있고 해서... 그런데 계산 착오였다. 대간 중에 가장 힘든 구간 중에 하나였다는...

산행하기엔 날씨가 좋아 산과 조망이 정말 멋지고 환상적인 산행이었지만, 산행길은 그저께 내린 눈으로 빙판이 되어 있고,

암릉구간과 로프를 잡고 오르내리는 곳이 많아 팔다리 모두가 넘 피곤한 산행이었다.

내일 있을 마라톤 대회가 넘 걱정된다.

 

* 산행일시 : 2015. 03. 14 (05:50~14:50) 날씨가 청명하고 맑으며 산행하기엔 정말 좋은 날씨

* 산행거리 : 16.9km, 9시간

* 누 구 랑 : 천토산 대간 3기팀 72명

* 코     스 : 하늘재 ~ 모래산 ~ 탄항산(856m, 천대498) ~ 평천재 ~ 부봉(935m, 천대499) ~ 동암문 ~ 북암문 ~ 마패봉(925m, 천대500) ~

                 조령제3관문 ~ 깃대봉(835m, 천대501) ~ 신선암봉(937m, 천대502) ~ 조령산(1,026m) ~이화령

 

▲ 마패봉 정상 인증샷~ 천대 500번째 산행한 봉우리다. 馬驛, 馬牌峰. 암행어사 박문수가 이 산을 넘을 때 조령 제3관문에서 쉬었을 때 마패를 관문 위의 봉우리에 걸어놓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지도에는 마역봉으로 되어 있으나 현지에서는 마패봉으로 불린다.

▲ 등산지도

▲ 고도표

 ▲ 새벽3시쯤 천안에서 출발하여 5시경 여기서 야식을...

▲ 하늘재에 도착하니 5시40분경~ 잠시 산행준비와 체조를 하고 5시 50분경 출발~

 

▲ 담에 갈 17구간 마지막 산인 포암산 안내도

▲ 하늘재~

경북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에서 충북 충주시 상모면 미륵리 사이를 이어주는 도의 경계로, 하늘과 맞닿아 있다고 해서 이름 지어진 ‘하늘재'는 525미터로 이름처럼 높지는 않지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고갯길이다. 겨릅산, 계립령, 대원령으로도 불리는 하늘재는 우리나라 최초로 뚫린 고갯길. 신라시대부터 북방의 문화를 영남지방에 전해주던 관문으로, 지금도 성벽이 남아 있다.

▲ 벌써 여명이 밝아온다

▲ 모래산

▲ 여명은 점점 밝아오고... 날씨가 좋아 오늘 일출은 환상적일 듯~

 

 

▲ 멋진 일출~

 

 

 

 

 

 

 

 

▲ 햇살을 받은 고사목도 넘 멋지다.

 

 

 

 ▲ 탄항산~ 탄항산의 탄항(炭項)은 아마도 변방·국경 등을 지킨다는 의미의 수자리 ‘수(戍)’자와 지키기에 알맞은 ‘목’이라는 의미의 ‘항(項)’ 자가 합성되어 ‘수항’이라 일컫던 것이 숫항→숯항으로 전음되어 숯 탄(炭) 자의 훈을 빌리어 뜻옮김 하여 불리어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 평천재

 

 

 

 

 

▲ 끈질긴 생명력이 신기한 소나무~

 

 

 

 

 

 

 

▲ 부봉 오르는 길이 장난이 아니다. 거이 유격 수준이다.

▲ 부봉~

능선이 대체로 서진해오다가 약간 남쪽으로 치우치면서 만들어낸 봉우리다. 조령산이 건너편으로 마주하고 조령계곡의 ‘꽃밭서들’이 발아래 펼쳐진다. 정산 북쪽에 옛 산성이 있다. 정상은 대간에서 서쪽으로 100m쯤 비켜나 있다. 정상부위가 솥뚜껑처럼 볼록하고 생겼다고 해서 부르게 되었다. 서쪽 능선으로 비슷한 모양의 봉우리가 한 개 더 있다.

백두대간 줄기에서 약간 비껴난 부봉은 문경새재 제2관문인 조곡관 뒤에 우뚝 솟아 있는 바위산으로, 모두 6개봉으로 이루어졌고 제2봉이 제일 높다. 조령산에서 동쪽으로 보이며, 주흘산의 북서쪽에 바위벽으로 솟아 있다. 부봉(釜峰)은 멀리서 볼 때 가마솥을 얹어 놓은 형국이라는 뜻에서 붙은 이름이다.

 

▲ 6봉까지 있다는데 시간만 있으면 가 보겠는데...

▲ 부봉에서의 멋진 경관

▲ 주흘산 방향

 

▲ 주흘산 방향

▲ 아직도 눈이 이렇게 많다.

 

 

 

 

 

 

 

 

▲ 마패봉 오르는 길에 맞은편 부봉 6봉과 그 뒤 주흘산 능선

 

 

 

 

▲ 마패봉에서 본 월악산 영봉~

▲ 마패봉 정상 부근 돌탑

▲ 천대 500고지의 마패봉~

▲ 500의 의미로 하이파이브를...

 

 

 

▲ 마패봉에서 본 앞으로 가야할 조령산 방향~

▲ 마패봉에서 본 부봉6봉과 그 뒤 주흘산 능선

▲ 파노라마로...

 

 

 

 

▲ 봉우리도 아닌데 누군가 백호산이라고 써 놓았다.

▲ 조령제3관문을 바로 앞에 두고...

▲ 조령제3관문

 

▲ 여기서 아침을 먹고...

▲ 조령제3관문을 배경으로...

조령관(鳥嶺關)-영남제3관
새재 정상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쪽의 적을 막기 위하여 선조 초에 쌓고 숙종(숙종 34년 : 1708) 때 중창하였다. 1907년에 훼손되어 육축(陸築)만

남고 불탄 것을 1976년도에 홍예문및 석성 135m와 누각을 복원했다.

 

문경(聞慶)이 과거 보러 한양으로 갔던 선비들이 급제했다는 경사스런 소식을 제일 먼저 듣는 곳이라는 데서 유래했다는 말도 있을 만큼, 이 고개는 영남의 선비들이 청운의 꿈을 품고 과거 보러 가기 위해 넘던 고개였다. 황간의 추풍령을 넘으면 추풍낙엽처럼 과거에 떨어지고, 풍기의 죽령을 넘으면 대나무처럼 죽죽 미끄러진다 하여 문경새재를 넘는다는 속설이 떠돌았다.

 

조령은 다른 이름으로 새재라고도 불리는데, 

1.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들어 쉬어 가는 험하고 높은 고개

2. 새(억새)가 우거진 고개(草岾)-고려사 기록(초점) : 새재 골짜기 마을 이름을 살펴보면 조선시대 초곡방(草谷坊)으로 정했고, 현재까지도 상초리(上草理) 하초리(下草理)로 불리는 것을 보면 이 지역에 새(억새)가 많았던 모양이다.

3. 하늘재와 이우리재(이화령) 사이(새)의 고개

4. ‘새로 생긴(新) 고개’라는 뜻이다.

일찍이 신라 때부터 영로가 개통된 계립령과 죽령이 옛 고개, 묵은 고개임에 비해 늦게 생긴 고개, 새로 생긴 고개라는 것. 조선시대부터 영남에서 한양으로 통하는 가장 큰 대로(영남대로)로서 '영남'이란 명칭도 조령의 남쪽지방이란 뜻이다.

5. 비지재, 비조령(飛鳥嶺)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영산골에서 평천리로 넘어가는 주흘산 중턱에 위치한 고개로 옛날에 비조룡(飛鳥嶺)이라고 하는 전설상의 새가 영산골에서 평천으로 넘어가려고 날아가다 주흘산에 가로막혀 단숨에 넘지 못하고 정상에서 쉬어 넘었다고 하여 비조령이라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또한 1700년경에는 최완룡이라는 사람이 이곳에 정착하여 생활하면서 이 재를 비지재라고 불렀다 한다.

6. 문인들이 좀더 멋스럽게 표현하는 과정에서 조령이라는 이름을 얻은 듯하다.

 

 

 

 

 

▲ 무슨 성황당 같은 것이 있다.

 

▲ 깃대봉 정상~ 치마바위라고도 하며, 산 이름은 정상 일대에 있는 화강암 절벽이 치마를 펼친 듯하다하여 생겨났으며, 산 모습이 깃대처럼 뾰족하다 하여 깃대봉이라고도 한다. 조령산 정상 북쪽 능선에 있다.

▲ 깃대봉에서 내려오면서 가야할 능선과 신선암봉, 그 뒤 조령산이 조망된다.

 

 

 

 

 

 

▲ 문경세재 골짜기

▲ 파란하늘이 넘 멋지다.

▲ 신선암봉으로 가는 암릉위에서 함께한 분들과...

▲ 저 멀리 월악산 영봉이 보인다.

 

 

▲ 부봉

 

 

 

 ▲ 바위위의 소나무가 멋지다

 

▲ 주상절리 같은 바위가 멋지다.

 

▲ 바위 사이엔 이런 통천문이...

 

 

 

 

 

 

▲ 바위위의 멋진 소나무가 말라 죽었다.

 

 

▲ 이런 경사가 심한 로프를 잡고 올라야 하는 구간이 한두곳이 아니다.

 

 

 

▲ 앞에 보이는 봉우리가 신선암봉

 

 

▲ 말안장 같은 바위도 있다.

▲ 이런 바위를 로프잡고 내려왔다는...

▲ 왼쪽 앞 봉우리가 신선암봉, 오른쪽 뒤 봉우리가 조령산

 

 

 

 

 

 

 

 

 

▲ 바위끝에 자라는 멋진 소나무~ 신기하다.

 

 

 

 

 

▲ 신선암봉을 오르는 능선~

 

▲ 신선암봉을 오르면서 지나온 능선을 바라보면서

 

 

▲ 신선암봉은 조령산과 새재(조령 제3관문)의 중간정도에 위치해 있으며 능선상의 암봉에 불과하지만 괴산군에서는 "괴산의 명산"이라고 하면서 별도 소개하고 있기도 하다.

 

 

 

 

 

 

▲ 조령산이 이제 바로 눈앞에...

▲ 주흘산 영봉과 주봉

▲ 신선암봉에서 바라본 괴산 방향

▲ 신선암봉의 넓은 정상 바위~ 다른 산악회에서 점심을 먹고 있다.

 

▲ 신선암봉에서 내려오면서 지나온 능선을... 멋진 경관이다.

 

 

 

 

▲ 조령산을 오르기 위해 치고 올라가야 할 된비알~

 

▲ 조령산 정상 부근을 올라서서 지나온 신선암봉과 능선~

▲ 신선암봉과 주흘산 파노라마

 

▲ 신선암봉을 배경으로

 

 

▲ 조령산 정상 부근의 눈길

 

▲ 조령산 정상~ 3년전 이곳을 왔을땐 조그마한 정상석이 있었는데...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과 경북 문경시 문경읍과의 경계선상에 자리잡은 명산으로, 예전에는 공정산(公正山)으로 불리웠다.

전체적으로는 산림이 울창하며 대암벽지대가 많고 기암괴봉이 노송과 어울려 마치 그림 같다. 능선 남쪽 백화산과의 경계에는 이화령이 있고 능선 북쪽 마역봉과의 경계가 되는 구새재에는 조령 제3관문(조령관)이 있으며, 관문 서편에는 조령산 자연휴양림이 조성되어 있다. 제3관문이 위치한 곳은 해발 642m로서 예로부터 문경새재라 일컬어지고 있다. 이를 통해 영남지방과 중부지방이 연결되어 교통의 요지였을 뿐 아니라, 험난한 지세를 이용할 수 있어 군사상의 요충지이기도 하였다. 주능선 상에는 정상 북쪽으로 신선봉과 치마바위봉을 비롯하여 대소 암봉과 암벽지대가 많다. 능선 서편으로는 수옥폭포와 용송골, 절골, 심기골 등 아름다운 계곡이 발달되어 있다. 능선 동쪽을 흐르는 조령천 곁을 따라 만들어진 길은 조선조 제3대 태종이 국도로 지정한 간선도로였으며, 주흘관(제1관문), 조곡관(제2관문), 원터, 교구정터 등의 사적지가 있고 완만하게 흐르는 계곡에는 와폭과 담이 산재하여 있다. 현재 이 일대는 문경새재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수안보온천, 월악산국립공원과 가깝다.

故 지현옥 추모비

조령산 산정에는 정상임을 알리는 팻말과 더불어 안나푸르나에서 짧은 생을 마감한 여성 산악인 지현옥을 기리는 추모팻말이 서 있다.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만 해도 산에 문외한이었던 지현옥은 이곳에서 암벽등반에 빠진 뒤 산악인이 됐다고 한다. 그녀는 에베레스트 등정과 가셔브럼Ⅱ봉(8035m) 무산소 단독 등반 등, 여성으로는 믿지 못할 기록을 남긴 채 1999년 4월 히말라야 안나푸르나에서 짧은 생을 마감했다.

지현옥이 활발하게 활동하던 1990년대는 여성이 전문 산악인으로 활동하는 것이 매우 어려웠다. ‘여자가 무슨 산이야!’하는 곱지 않은 시선이 남성 산악인은 물론 사회 전반적으로 팽배해 있었다. 게다가 여성 산악인을 후원하려는 업체가 없어 원정 비용을 조달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실제로 지현옥은 대학 후배들과 텐트와 유자차 등을 팔아 원정 비용을 마련했다.

1993년 한국 여성 에베레스트원정대의 대장으로 뽑힌 지현옥은 일부 남성 산악인들의 도를 넘는 간섭과 우월의식 속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차별과 좌절을 겪는다. 그렇지만 지현옥은 보란 듯이 여성 원정대를 이끌고 세계 최고봉 등정에 성공해 후배 여성 산악인들이 활동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다. 훗날 지현옥은 당시의 힘들었던 상황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기도 했다. “에베레스트는 또 다른 나를 발견하는 시험무대였다. 온몸을 갈기갈기 찢을 것 같던 육체적 고통을 첫 원정에서 체험했다면 에베레스트에서는 넘을 수 없는 사회적 편견을 넘어가야만 했다. 여성 등반가를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 앞에서 좌절의 고통과 서러움을 이겨내고서야 에베레스트로 가는 길은 열렸다. 그런 사회적 냉소와 질시에 비하면 시체가 나뒹구는 에베레스트 사우스콜의 죽음의 공기도 견딜만했다. 여자끼리 만의 오기로 뭉쳐진 팀을 이끌었고, 나는 그 모든 고통으로부터 자신을 견뎌내게 하는 데 성공했다.” 

지현옥(1959년-1999년)은 대한민국 논산 출신의 여성 산악인이다.등반 경력 1988년과 1993년에 대한민국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매킨리 산와 에베레스트 산 등정에 성공했다. 1999년 엄홍길과 함께 안나푸르나 등정한 후에, 하산 중 실종되었다.

 

 

 

 

▲ 이런 계단도 만들어 졌다.

 

▲ 조령샘~ 물이 넘 시원하다.

 

 

▲ 이화령~ 동물이동로를 위한 터널을 만들면서 그 위에 헬기장를... 

 

▲ 2012년에 만들었다는 동물이동로

▲ 이화령 휴게소

▲ 우리 버스가 보인다.

 

 

▲ 이화령 도착 인증샷

 

◆[이화령] 이우릿재 529m

이화령은 경북 문경과 충북 괴산을 잇는 고개이다. 이화현으로 불리던, 사람통행이 적은 조그만 고갯길이었다. 그 고갯길이 1925년 일제에 의해 신작로로 개설되면서부터 중부와 영남을 잇는 새로운 동맥으로 급부상하였다. 당시 한국민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던 영남대로의 기(氣)를 꺾기 위해 일제가 의도적으로 조령 근처에 신작로를 만든 것이라 한다. 실제 이화령이 개설된 후 양조장과 시장이 설 정도로 번성했던 조령의 풍요는 마감됐고, 이후 조령 근처 상초리 사람들은 화전(火田)으로 먹고 살아야 했다 한다.

하늘재가 신라와 고려 시대에, 조령이 조선시대에 고개로서의 역할을 담당했다면, 이화령은 근대에 그 역할을 담당했던 곳이다. 해방 이후에는 3번 국도가 쉬었다 넘는 고갯마루로 번성하였으나, 1998년 고갯길 아래로 이화령터널이 뚫려, 점차 잊혀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다 2004년에는 중부내륙고속도로에 터널 길을 또 내어주고, 이제는 등산객들 아니면 찾는 이 없는 쓸쓸한 길로 전락했다..

2012년 11월 백두대간 훼손지 복원사업으로 이화령 옛길 위로 터널형태로 대간길을 복원했다.

 

- 梨花, 伊火

추풍령과 죽령 사이에 위치하며 중부 내륙을 남북으로 관통한다. 조령의 대체도로로 이용된다. 원래는 ‘이우리고개’였던 것을 지난 1925년에 신작로 형태로 개통하면서 이화령으로 개명했다. 고갯길 연변의 배꽃이 아름답다고 해서 당시 총독부에서 붙인 이름이다. 한때는 조령과 구분하는 말로 ‘큰새재’라고도 불렀다.

조령산 남쪽에 위치한 이화령 속칭 이우릿재는 조선세종실록 지리지 문경조 및 동국여지승람·대동지지등의 역대 지리지 문경조 기록에 의하면, 조선시대에는 이화현(伊火峴)으로 표기하던 고개 이름인데, 그 의미는 분명치 않다.

현재의 ‘梨花嶺’ 표기는 조선총독부에서 1914~1918년에 걸쳐 조사 제작한 근세한국오만분지일지형도에서 잘못 표기한 것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으로, 본래의 의미가 변질된 표기다. 1929년에 김유동이 저술 간행한 팔도명승고적 문경군조에도 伊火峴으로 표기하고 있음을 살 필수 있다.

이화령은 증보문헌비고 권119 병고(兵考)에 보이는, 조선 숙종 31년(1705)조 기사에 의하면, 이오령(伊吾嶺)으로도 표기하고 있다. 이는 아마도 방언 상에서 이화령→아와령→이오령으로 전음되어 일컬어지던 것을 소리 나는 그대로 표기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화령의 속칭 이우릿재도 이화령 부근의 동리 이름을 따서 이화리의 고개란 뜻으로 이화릿재라 일컫던 말이 이와릿재→이우릿재로 전음된 것이거나, 또는 이화(伊火)의 음과 훈(訓)이 혼용된 이불(벌)재, 이부릿재→이우릿재로 전음된 것이 아닐까 한다. 음과 훈이 혼용되어 일컬어지는 땅이름 용례는 우리 땅이름에 흔히 보이는 것으로, 예컨대 하늘재 동남쪽 문경읍 갈평리의 갈평(葛坪)도 속칭 갈벌이라 일컫기도 하는 것과 같은 예이다. 또는 이화령은 아득하다, 희미하다의 옛말 ‘입다’의 고형태인 ‘이블다(이울다)’에서 ‘이블’을 취하여 아득한 고개라는 뜻으로 이블재[伊火峴]라 일컫던 것이 전음되어 이울재→이우릿재라 일컫던 고개 이름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 문경시청이 최근 ‘이화령’이란 지명을 폐기하고 ‘이우릿재’라는 전래명칭을 되살렸다. 일제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을 버리고 오랜 세월 우리 조상들이 걸어 넘던 오솔길일 때의 이름을 선택한 것이라고 했다.

▲ 이런 비석도 새로 생겼다.

▲ 뒷풀이는 버섯전골로... 내일 마라톤 대회 때문에 술도 한 잔 못하고...